北영화 목표는 독재자의 교시 선전
北영화 목표는 독재자의 교시 선전
  • 조희문 미래한국 편집장·영화평론가
  • 승인 2018.01.03 1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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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가에 북한영화 상영이 운동권의 전략적 투쟁사업으로 시작된 것은 1990년 무렵이다. 서울대, 고려대, 연세대 등 서울 지역 16개 대학 총학생회는 1990년 10월 31일, 각 대학별로 북한영화 <소금>과 <탈출기>를 상영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소금>과 <탈출기>는 각각 지난 1984년과 85년 신상옥 감독이 제작하거나 감독한 영화로, 조총련이나 운동권 비선을 통해 비디오로 국내로 반입된 경우다.

그보다 앞서 고려대, 연세대 총학생회는 같은 영화 상영을 시도했지만 경찰이 교내에 진입해 상영을 중지시키는 상황이 벌어졌다. 당시 교육행정을 담당하던 문교부를 비롯해 국가안전가획부, 경찰 등 보안 당국은 북한영화 상영을 금지한다고 여러 차례 밝혔지만, 운동권 단체들의 입장에서는 그럴수록 상영을 밀어붙여야 한다는 전략을 고수했다. 지방의 각 대학까지 상영을 넓혀야 하는 것도 포함되었다.

북한영화 보기가 민주화 운동?

비디오로 반입된 북한영화들은 대량 복제되어 각 대학으로 분배되었다. 총학생회 측은 ▲1990년 4월부터 북한영화가 국토통일원 산하 북한 및 공산권 자료정보센터에서 상영되고 있고▲1990년 10월, 뉴욕에서의 남북영화제가 열리는 등 민간 차원의 남북한 문화교류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는 점 등을 들어 북한 바로 알기운동의 일환으로 시도되는 북한영화 상영은 하등 문제될 것이 없다는 입장을 내세웠다.

신상옥 감독이 북한에서 만든 영화,
신상옥 감독이 북한에서 만든 영화,

학생들의 이 같은 주장은 표면적인 명분이었을 뿐 북한영화 상영을 통해 운동세력의 확산, 국가 권력에 대한 타격 등 이념적 투쟁을 강화하겠다는 것이었다. 당시 북한영화는 국가보안법 상 이적표현물에 해당되었기 때문에 소지나 배포, 상영은 모두 금지 대상이었다. 북한영화 상영은 결국 국가보안법의 무력화 또는 남한 정부 또는 정권을 무력화 한다는 전략적 수단 중의 하나로 등장한 것이다.

사전 압수수색 영장을 발부받은 경찰은 10월 31일 100개 중대 1만 3000여 명을 투입해 각 학교에 병력을 투입해 필름을 압수하는 한편 주동 학생들을 검거해 북한 영화의 유입·배포 경위를 밝혀내기로 했다.

경찰이 대규모 병력을 동원해 저지에 나서기는 했지만 각 학교가 여기저기 산재한 데다 게릴라식 상영이 이뤄져 아예 상영을 하지 못했거나 도중에 중지한 곳, 끝까지 상영을 마친 곳 등 결과는 들쑥날쑥했다. 학생들은 단속에 나선 경찰 병력을 막기 위해 교문 앞 등에 바리케이드를 치고 화염병, 돌 따위를 던지는 등 격렬한 저항에 나섰고 경찰은 경찰대로 최루탄을 쏘는 등 진압에 나서 해당 학교 주변은 거친 분위기를 연출했다.

이후에도 북한영화 상영은 간헐적으로 이어졌다. 학생들 사이에서는 북한영화를 한번이라도 보는 것이 민주화 운동에 동참하는 것이라도 되는 양 분위기가 퍼졌고 북한영화는 시대적 화두가 되었다.

1990년 9월 1일 공중파 TV 중의 하나에서 <안중근 이등박문을 쏘다>라는 북한영화를 방영했다. 북한영화가 처음으로 국내 시청자들에게 공개적으로 소개된 첫 사례였다. 언론을 통해 북한영화 상영 논란을 전해 들었거나 북한영화에 대한 막연한 호기심을 가진 관객, 영화 방영을 추진한 당국의 관계자들이나 영화전문가 등 모두 어떤 반응을 드러낼지 상당한 관심을 기울였다.

방영 후의 반응은 기대 이하로 나왔다. ‘보기는 했지만 너무도 지루하고 재미가 없어 도중에 꺼버렸다’는 반응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뉴스로 들을 때는 북한영화에 특별한 무엇이 있을 거라는 기대를 가졌지만 실제로 보니 사건에 대한 묘사를 대부분 출연 배우들의 대사로 장황하게 처리하는 데다 빈약한 세트, 조악한 촬영 기술 등 전체적인 영화의 수준은 국내 관객들의 눈높이를 맞추는 데는 어림없이 모자랐다.

이어서 <림꺽정>을 10부작으로 방영했고, 북한드라마 <사육신>을 내보냈지만 역시 반응은 미미했다. 영화건 드라마건 남한과는 수준을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로 낮은 데다, 각 편이 담고 있는 의도나 목표가 너무도 생경했기 때문이었다.

남한의 영상 작품들이 다양한 소재와 세련된 기법, 역동감 넘치는 연기와 연출로 엔터테인먼트로서의 만족감을 극대화하려는 데 비해 북한 영화나 드라마들은 가난하고 우매한 백성들이 지주나 권력자들의 수탈과 압박에 허덕이고 있다는 계급투쟁론적 적대감을 조장하거나 인민들이 헐벗고 굶주리며 고생하는 것은 그들을 이끌어줄 위대한 지도자를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식의 구성을 보인다.

인민의 생활이 유쾌하고 행복하다면 모두 위대한 수령님의 은혜 덕분이라고 찬양하고, 비참하고 절망적인 상태에 있는 것은 스스로의 각성이 모자랄 뿐 아니라 김일성 같은 영도자를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극장에서 공개된 북한영화는 신상옥 감독이 연출한 <불가사리>(1985). 2000년에 국내 개봉한 이 영화는 일본의 특수촬영팀을 초빙해서 만든 괴수영화. 쇠를 먹는 괴물 불가사리의 전설을 소재로 다뤘다. 일본의 <고지라>식 기술이 반영되어 있다.

당시 박지원 문화부 장관은 남북한 교류 확대라는 측면에서 북한영화 상영을 허용하기로 했다고 밝혔고 <불가사리>는 극장 상영의 시작이었다. 이 영화는 북한과의 무역은 내국간 거래로 간주하겠다는 지침에 따라 외국영화들이 받아야 하는 수입 심의도 받지 않은 채 국내 상영이 이뤄졌다.

‘북한영화 1호’라는 문구를 붙여 대대적인 홍보에 나섰으나 흥행 결과는 참담할 정도로 외면당했다. 운동권의 투쟁전략 수단으로 활용하려는 의도와는 달리 일반 관객들은 북한영화에 특별한 흥미를 가진 경우가 적었고, 그나마 TV에서 본 인상 탓에 ‘북한영화는 재미없다’는 저항이 강했던 것으로 보인다.

<불가사리>를 수입한 영화사는 <홍길동> <꽃파는 처녀> <사랑 사랑 내사랑> 등을 묶음으로 수입했지만 <불가사리>의 흥행 실패 덕분에 나머지 영화는 상영 일정 조차 잡지 못한 채 손을 들고 말았다.

신상옥 감독이 북한에서 만든 영화,
신상옥 감독이 북한에서 만든 영화,

정권 차원의 총력 지원

북한영화가 재미없는 이유는 영화의 존재 이유를 흥미와 오락에 두는 것이 아니라 당과 수령의 가르침을 실천하며 인민에게 사회주의 이념을 강화할 수 있도록 교육하는 선전수단으로 보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북한영화는 김정일이 관리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훨씬 이전부터 영화에 대한 정권적 관리가 이뤄지고 있었다. 1946년 5월 북한 정권의 체제가 갖춰지기도 전에 북조선공산당 중앙조직위원회 선전부 정치문화과 내에 기록영화 촬영을 주로 하는 5인조 ‘영화반’을 설치했다. 그해에 <우리의 건설>이라는 선전용 기록영화를 만들었다. 대체로 북한영화의 시작을 이 영화로 보는 시각이 많다.

영화반은 1946년 8월 ‘북조선영화제작소’로 분리 독립해 독자적인 시설과 인원을 갖췄고 이듬해 2월에는 평양 교외에 대규모 국립영화촬영소를 세웠다. 소련의 상당한 지원이 있었던 것으로 전한다. ‘영화예술’이라는 월간잡지도 창간했다.

정권의 기반이 취약하고 경제적 기반도 어려운 여건에서 다른 사업에 우선해 대규모 영화 시설을 갖추게 된 것은 영화가 대중선전과 교육에 그만큼 유용하다는 것을 각별하게 인식하고 있었다는 반증이다.

6.25 전쟁 중 위급한 시기에도 북한영화계는 전시체제로 개편해 영화촬영소의 시설과 장비를 후방으로 소개하는 한편 방공시설 안에 녹음실과 현상실을 설치, 가동하는 체제를 갖췄다. 전시 상황에서도 영화를 이용한 선전 활동을 멈추지 않은 것이다.

영화가 정치선전의 중요한 수단이자 무기라는 인식은 레닌의 공산혁명 때부터 나왔다. 영화의 정치적인 가능성, 선동성을 간파한 레닌은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예술은 영화’라는 구호를 내놓았고, 그것을 뒷받침하듯 1919년 8월에는 ‘영화 산업 국유화 포고’에 서명했다.

소련에서 시작된 레닌식 사회주의 예술론은 다른 사회주의 국가들에 그대로 전파되었다. 북한도 그 교시를 충실히 따르고자 한 것이다. 레닌시대 러시아 영화 중 기록영화와 뉴스영화가 유난히 많은 것도 그 같은 교시를 실천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일찍부터 당과 수령의 가르침에 따라 운영되던 북한영화는 1973년 김정일의 ‘영화예술론’이 발표되면서 이론적인 체계를 갖추게 된다. 김일성 주체사상에 입각한 문예이론을 영화 분야에 구체적으로 접목한 것으로, 북한영화계의 절대적 지침서가 되었다.

영화예술론은 사상적 알맹이(종자)를 주제사상에 기초하여 인민대중의 전형적인 생활상을 깊이 있게 그려야 한다고 교시한다. 연출가는 사건의 논리적 연결보다는 감정의 자극에 역점을 둬야 하며 배우는 단순한 연기자가 아니라 공산주의 사상, 체험 등을 미적, 창조적 능력으로 화면에 재현하는 노동계급적 예술가로 연기해야 한다는 식이다.

사실 전혀 새로울 것 없는 내용을 정리한 것이지만 인민의 지도자가 교시하는 내용이라는 점에서 ‘영화일꾼’들은 죽기 살기로 따르고자 했다.

하지만 가르침은 가르침일 뿐이고, 현장의 내놓는 결과물은 실행에 한계가 있기 마련이어서 이후의 북영화는 이념적 교조성은 강화되었지만 그럴수록 영화의 역동성은 약화되었다. 김정일조차 북한영화가 인민대중의 흥미를 끄는 데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최은희, 신상옥 같은 남한 영화인을 납치해 영화제작 경향을 바꾸려 했다는 사실은 연구자들 사이에서는 널리 알려져 있다.

대학가 영화 상영에 동원된 <소금> <탈출기>, 북한영화 상영 시작을 알린 <안중근 이등박문을 쏘다>나 <불가사리>, 춘향전을 각색한 <사랑 사랑 내사랑> 등은 신상옥 감독이 감독이나 제작에 참여한 ‘신상옥 영화’들이다. 그나마 다른 북한영화들에 비해 역동감이나 수준이 낫다고 평가받았다.

현재도 여전히 북한영화는 오락보다 교육에 기울고 있지만 DVD나 USB 등을 통해 한국영화나 드라마, 예능 프로그램 유입이 늘어나면서 북한 주민들의 선호도 변하고 있는 추세라고 한다. 최근 북한의 공연프로그램 등을 보면 이전과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로 화려한 변화를 보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북한은 평창올림픽에 대해 어떤 영상을 내보낼까? 북한은 흠을 잡으며 비난하고 오히려 남한은 온갖 미사여구로 성공을 포장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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