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곧음 하나로 정승에 오른 구치관
올곧음 하나로 정승에 오른 구치관
  • 이한우 미래한국 편집위원·논어등반학교장
  • 승인 2018.01.11 1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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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치관(具致寬)은 흔히 구정승, 신정승의 야사 정도로만 알려져 있다. 원래 구치관이 처음 우의정에 제수됐을 때 당시 영의정이었던 신숙주(申叔舟)와 다소 불편한 관계에 있었다고 한다. 워낙 술을 좋아했던 세조는 이에 두 사람을 불러 술자리를 베풀었다.

그리고 흥미로운 제안을 했다. 자신의 물음에 바르게 답하지 못하면 벌주를 먹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고는 세조가 “신정승”하고 부르자 신숙주가 “예”하고 대답했다. 그러자 세조는 “신(新)정승을 불렀는데 왜 신(申)정승이 대답하느냐”며 벌주를 먹였다. 이번엔 “구정승”하고 불렀다.

구치관이 “예”하고 대답하자 “구(舊)정승을 불렀는데 왜 구(具)정승이 대답하느냐”며 벌주를 먹였다. 다시 “신정승”을 부르자 아무도 대답을 못하니 “임금이 부르는데 신하가 감히 대답을 하지 않는다”며 둘 다 벌주를 마셔야 했다. 이렇게 술잔이 오가다 보니 두 정승의 어색한 관계도 풀어질 수 밖에 없었다.

이 일화가 사실이라면 세조9년(1463년) 8월 29일 이후의 일이다. 이날 구치관은 우의정, 한명회는 좌의정에 오른 날이기 때문이다. 즉 당대 최고의 실력자 한명회가 좌의정, 구치관이 우의정이었고 실권은 없지만 영의정에 신숙주이던 시절의 일화다.

그러면 과연 구치관은 어떤 배경이나 연유로 이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일까? 사실 세조는 정란(靖亂)을 통해 정권을 잡았기 때문에 적어도 정승이 되려면 큰 공로가 있지 않고서는 거의 불가능했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구치관은 오직 본인의 실력과 강직함 하나로만 이 자리에 올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406년에 태어난 구치관은 남들보다 조금 늦은 28살 때인 1434년(세종 16년) 문과에 급제해 관리의 길에 들어섰다. 그러나 세종의 치세에 집현전 학사의 반열에 들지 못하고 평범한 관리로 지낸 것을 보면 크게 현달했다고는 할 수 없다.

그 이유를 곁에서 지켜본 서거정(徐居正)은 이렇게 풀이했다.

“공은 지조가 굳고 확실하였으며 식견이 고매하여, 당시 일을 논의하는 가운데 자신의 의견을 발표할 때는 대범하고 엄격하며 언행이 바르고 곧았다. 그러나 공은 성품이 정직하여 진취(進取)에 염치 있는 행동을 취하였으므로, 아무도 공을 추켜세워 추천하거나 높이 등용되도록 이끌어 주려고 하는 사람이 없어서 낮은 벼슬에 배회한 지가 10여 년이었는데 공은 높이 보고 큰 걸음으로 걸었을 뿐이다.”

이는 세조실록의 졸기(卒記)에 나온 기록과도 일치한다.

“몸가짐을 청백하고 검소하게 하였으며, 악을 미워하기를 원수같이 하였다. 전후(前後)하여 인재 선발의 임무를 맡았으나 자기 집에 개인적으로 찾아오는 사람이 없었고, 뽑아 쓰기를 모두 공평하게 하였다. 혹 간청하는 자가 있으면 관례상 응당 옮길 사람이라도 끝내 옮겨 주지 아니하였다. 생업(生業)을 돌보지 아니하여 죽던 날에는 집에 남은 재산이 없었다.”

1984년 MBC에서 방영된 대하사극‘설중매’에 등장하는 구치관.
1984년 MBC에서 방영된 대하사극‘설중매’에 등장하는 구치관.
곧은 처신, 유능한 행정

한 마디로 곧음[直]으로 일관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세조가 정권을 잡는 계기가 된 계유정난(癸酉靖難)에도 참여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세조의 눈에 들게 된 계기는 정난 직후 함길도(咸吉道)로 파견돼 역당(逆黨)들을 토벌하고 세 품계를 뛰어넘어 보공 대장군(保功大將軍)에 임명되면서부터였다.

세조는 국정을 맡게 되자 공신 못지않게 유능한 관리가 필요했다. 세조가 아직 즉위하기 전 영의정으로서 국정(國政)을 맡고 있을 때 구치관과 함께 일을 해보고서는 이렇게 말했다.
“경을 늦게 안 것이 한스럽다.”

그후 승지가 되어 지근거리에서 세조를 보필했다. 구치관의 일처리는 한 마디로 빈틈이 없고 주도면밀했다. 승진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1455년(세조 1년) 세조가 즉위하자 책훈(策勳)되어 좌익공신(佐翼功臣) 3등이 됐다. 실은 아무런 공로가 없었지만 정난 이후 즉위하는 과정에서 보여준 업무능력에 대한 보상이었다. 이에 능성군(綾城君)에 봉해졌고 다른 공신들보다 훨씬 빠른 출세의 길을 걷게 된다.

말 위에서 정권을 잡을 수는 있어도 말 위에서 정권을 유지할 수는 없다는 말 그대로였다. 세조는 평안도(平安道)를 북문(北門)의 자물쇠로 여겨 이곳을 중하게 여겼다. 그런데 절도사(節度使)는 무신(武臣) 가운데 등용하여 임명하는 것이 상례(常例)였다. 하지만 그렇게 할 경우 그곳 백성들을 어루만져 잘 다스리는 데는 문제점이 있었다.

그 때문에 문무(文武)를 겸비한 중신(重臣)으로 이 지역을 진정시킬 수 있는 사람을 임명키로 생각하고서 구치관을 보냈다. 이 때 세조가 한 말은 구치관에 대한 그의 신임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경이 부임한 뒤에는 나는 다시 서쪽을 돌아보지 않을 것이다.”

세조의 뜻대로 일을 잘 마치고 돌아오자 보상은 컸다. 이조판서에 임명된 것이다. 이때 사대부들은 서로 경하하여 말하기를 “바른 사람이 전형하여서 선발하는 임무를 맡았으니 공도(公道)가 시행될 것이다”라고 했다고 한다. 인사권을 쥔 당시 이조판서 구치관의 모습을 서거정은 이렇게 전한다.

“비록 작은 벼슬 낮은 직책일지라도 일찍이 한 번도 혼자 천거하는 일이 없었고, 또 친한 친구라고 하여 개인적으로 은혜를 베푸는 일도 없었다. 한편 간청(干請)하는 사람이 있으면 이를 미워하여, 간청의 대상자는 꼭 자리를 옮겨서 서용하지 않았다. 일찍이 위에 건의하여 용관(冗官-쓸데 없이 자리만 지키는 사람)을 도태시킨 사람만도 백 수십 명이나 되었다. 또 고관이나 귀인(貴人)으로 자제(子弟)를 위하여 좋은 벼슬을 요구하는 경우가 있으면 모두 먼저 이들을 도태시켰다.”

세조9년(1463년) 8월 29일 우의정이 돼 정승의 반열에 오른 구치관은 마침내 반년만인 세조10년 2월 23일 최고의 실권을 가진 좌의정에 오른다. 참고로 이때 그의 후임으로 우의정에 오른 이는 황희(黃喜)의 아들 황수신(黃守身)이다.

구치관은 2년 2개월 동안 좌의정에 있다가 세조12년 4월 18일 영의정에 오른다. 그는 젊어서는 불우(不遇), 즉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만나지 못했으나 중년에 이르러 세조의 알아줌을 만나 이렇다 할 공로도 없이 오직 곧은 성품과 탁월한 일처리 능력으로 영의정에까지 오른 것이다. 그로 인해 능성(綾城) 구씨는 조선이 끝날 때까지 명문가의 하나로도 자리 잡게 된다.

그런데 그의 졸기(卒記)는 맨 마지막에 이런 말을 남기고 있다.
“그러나 좋아하고 미워하는 것이 편벽되어 사람들이 자못 비난하였으며 심지어는 거짓으로 행동하여 이름을 낚는다고 비방하는 자도 있었다.”

비방의 사실 여부를 떠나 흔히 곧은 자들이 쉽게 받게 되는 비난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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