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자의 결단이 핵전쟁 막았다
지도자의 결단이 핵전쟁 막았다
  • 조희문 미래한국 편집장
  • 승인 2018.01.16 14:4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쿠바 미사일 사태와 미국의 해상봉쇄

유엔 결의를 통해 북한에 대한 압박을 강화하고 있는 미국이 중국, 러시아 등 일부 국가 소속 선박들이 밀수 형태로 북한에게 정유제품을 넘기다 적발된 사안에 제재 수위를 높여가고 있다.

렉스 틸러슨 미 국무장관은 1월 16일 캐나다 밴쿠버에서 6.25전쟁 참가 유엔 16개국과 한국 인도 일본 등 19개국 외무장관이 참여하는 회담을 소집해 북한을 상대로 한 불법무역을 원천봉쇄하기 위한 대북 해상로 차단에 동맹국들이 동참해줄 것을 호소할 예정이다.

일단 미국은 동맹국들의 동참을 통한 대북제재를 유지하려는 것이지만, 필요하다면 미국이 무력으로 해상봉쇄에 나설 수도 있다는 관측까지 나오고 있다.

해상로 차단은 불법 무역을 막기 위한 감시활동의 성격이 짙지만 해상봉쇄는 군사적 무력 시위 성격을 띠기 때문에 그 내용이나 수준이 크게 다르다. 해상로 차단은 의심 선박에 대한 입항거절, 억류, 나포 등의 조치가 가능하지만 해상봉쇄는 무력충돌을 배제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적대적 선전포고 행위나 다름없다.

쿠바 미사일 위기와 영화 <디데이 13>

미국영화 <디데이 13>(D-13, 2000)은 쿠바 미사일 사태를 배경으로 삼았다. 1962년 10월 14일 미국의 U-2 정찰기가 쿠바에 미사일 기지가 건설되고 있는 장면을 포착하는 것에서 사건은 시작한다.

보안부서에서는 항공 사진 판독 결과 핵탄두를 장착하는 것이 가능한 모델로 결론 내린다. 소련의 핵무기가 미국의 턱밑에서 발사 준비를 서두르고 있는 것이다. 비밀정보는 백악관까지 곧장 전달되고, 다음날 비상대책회의가 소집된다.

케네디 대통령을 중심으로 장관, 자문관 등 관련 부서의 담당자들이 배석한다. 소련 정부는 쿠바에 공격용 무기를 배치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 밝히며 미사일 기지 완성을 서두르고, 군부는 폭격을 비롯한 강공 드라이브를 주장한다.

어떤 방법으로 대안을 찾아야 할지에 대해 케네디 정부는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다. 그렇다고 시간이 여유로운 것도 아니다. 상황은 점점 더 긴박해지고 결단의 시간은 초읽기로 다가온다.

U-2기가 쿠바 미사일 기지 정보를 포착한 직후부터, 쿠바로 향하던 소련 함대가 기수를 돌려 상황이 종료되기까지의 13일간 진행된 미소 간 막후 접촉과 미국 정부의 대응 상황이 치열하다.

쿠바 미사일 사태를 다룬 미국 영화 '디데이 13'의 포스터
쿠바 미사일 사태를 다룬 미국 영화 '디데이 13'의 포스터
카스트로의 공산혁명과 산업 국유화

쿠바에 소련의 미사일 기지가 건설되기까지의 과정은 쿠바의 공산혁명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 1959년 사회주의자 피델 카스트로는 혁명으로 쿠바 정권을 장악했다. 대학 시절부터 학생운동에 가담하여 폭력투쟁을 경험한 카스트로는 1953년 당시 쿠바의 독재자 바티스타 정권을 전복시키기 위한 군부대 습격사건을 실행했다.

계획은 실패했고, 체포돼 15년 형을 선고받았다. 잠시 복역 중 1955년 5월 특사로 풀려나 아바나로 돌아오자마자 멕시코로 망명, 다시 바티스타 정권 타도 계획을 세웠다.

1956년에는 쿠바의 시에라 마에스트로 산속에 숨어들어 게릴라전을 전개했고, 1958년 봄 무렵에는 시에라 마에스트로 지역을 점령했다.

바티스타 정부는 1만 명의 군대를 동원해 카스트로군을 포위했지만 실패했다. 정부군은 오히려 카스트로에게 투항했다. 승기를 잡았다고 판단한 카스트로는 수도 아바나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혁명에 가담한 게릴라는 소수였지만 바티스타 정권에 등을 돌린 쿠바 주민들은 혁명세력을 지지했다. 이듬해인 1959년 1월 1일 카스트로는 마침내 바티스타 정권을 무너뜨리고 공산독재정권을 세웠다.

카스트로는 시에라 마에스트라 산속에서 무장투쟁을 하던 시절에 공약했던 전면적 농지개혁, 산업의 국유화, 국민소득의 공정한 분배, 교육의 확충 등을 우선 정책으로 꼽았다.

이를 위해서는 외국인, 특히 미국인이 장악하고 있던 토지와 산업시설들을 확보해야 했는데, 강제로 몰수하는 방법을 적용했다.

카스트로는 석유법과 대기업 국유화법을 제정하여 1960년 7월부터 쿠바에 있던 미국인 소유 기업과 은행들을 모두 국유화했다. 외국인 소유 자산을 무상 몰수 한 것이다.

당연히 해당 기업들은 격렬하게 반발했지만 카스트로는 밀어붙였다. 초기에는 석유업 관련 기업들에서 시작한 국유화 몰수는 전기회사와 전화회사, 설탕 가공업계 등으로 확산되었다. 

1961년 8월까지 미국 내 외국인 소유 기업은 모두 국유화 대상이 되었다. 또한 카스트로는 바티스타의 농장, 대농장주들의 토지를 몰수하여 농민들에게 분배했다. 그래도 토지를 소유하지 못한 농민들은 농지개혁청(INRA)이 관리하는 협동농장에서 농사를 짓게 했다.

영화와 출판사업 등 문화산업 분야에 대해서도 공산화 조치를 시행했다. 카스트로는 “혁명 안에 모든 것이 있고 혁명 밖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선언했다.

쿠바의 문화예술인들에게 오직 문화예술활동은 혁명을 옹호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교시를 내린 것이다. 이전 레닌이 러시아 공산혁명을 일으킨 후 러시아 영화제작을 국유화하며 모든 문화·예술 활동은 혁명을 위해 봉사해야 한다고 선언했던 것의 연장선이었다.

이 같은 조치가 단기간에 이뤄졌고, 쿠바는 카스트로의 등장 이전과 이후가 확연하게 달라졌다. 미국으로서는 친미 정권이 붕괴된 것에서 더 나아가 격렬한 반미 정권이 턱밑에서 도발하는 것에 대해 용인하기 어려웠다.

카스트로의 공산화 정책에 쿠바인들 모두가 동의한 것은 아니어서 카스트로 집권 초기에 70여만 명 정도 미국으로 망명했다.

1961년 4월 미국은 망명 쿠바인들을 반 카스트로 세력으로 규합해 쿠바 피그스 만에 상륙시켜 저항운동을 시도하지만 처참한 실패로 그치고 만다.

쿠바 침공군 1500여 명은 바티스타 정권의 군인세력과 망명 쿠바인 중 용병으로 자원한 인원 등으로 구성되었고, 미국이 과테말라에서 훈련을 시켰다. 부대 이름은 ‘2506 공격여단’.

미 CIA(중앙정보국)가 제공한 각종 무기와 장비를 갖춰 수도 아바나와 가까운 피그스 만에 상륙을 시도했지만 해안에 닿지도 못한 상태에서 쿠바군 비행기 공격을 받았다.

미 공군의 지원을 받지 못하는 상태에서 벌어진 전투 끝에 100여 명이 넘게 전사하고, 나머지 1200여 명은 쿠바군에 포로로 잡혔다.

포로들은 목에 팻말을 달고 아바나 시내를 행진하는 수모를 당했다. 이 사건으로 미국의 작전능력은 국제적 조롱거리가 되었고 케네디 대통령의 리더십은 큰 상처를 입었다.

망신을 무릅쓰고 미국은 6200만 달러의 몸값을 쿠바 측에 제공하고 포로들을 미국으로 송환했다. 소련의 흐루시초프 서기장이 케네디 대통령을 만만한 지도자로 얕보게 만드는 사건이기도 했다.

영화 '디데이 13 '의 한장면
영화 '디데이 13 '의 한장면
쿠바에 미사일 기지 세우려 했던 소련

이 사건으로 미국과 쿠바 관계는 최악의 상황으로 치달았다. 미국으로서는 카스트로가 골칫덩어리였고, 쿠바는 혁명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경제 사정은 하루가 다르게 악화되었다. 라틴 아메리카 여러 나라들이 쿠바와 외교를 단절하는 바람에 쿠바의 국제적 위상도 불안했다.

그 상황을 컨트롤 하지 못하는 한 카스트로의 권력 기반은 여전히 유동적이었고, 피거스만 사건에서 보듯 미국은 언제라도 카스트로의 신변을 위협할 수 있는 가장 유력한 적대세력이었다. 미국은 쿠바에 대한 경제제재로 압박의 강도를 높여 나갔다. 1962년에는 전면적인 경제봉쇄를 가동했다.

이 같은 상황에 대하여 쿠바는 소련과의 새로운 관계 설정으로 압박을 돌파하려 했다. 소련으로부터 1억 달러의 차관을 제공받고, 소련은 5년간 500만 톤의 제당을 쿠바에서 수입하기로 했다. 국유화를 통해 급진적인 사회주의 정책을 펴기 시작한 쿠바로서는 미국보다는 소련과 이념적으로 더 가까워질 수 밖에 없었다.

1962년, 쿠바는 소련과 군사조약을 맺었고 이를 계기로 소련은 라틴아메리카의 사회주의 국가를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미국의 코앞에 있는 쿠바에 미사일 기지를 건설하기 시작했는데, 그 과정이 미국에게 포착된 것이다. 미국은 이 정보를 바탕으로 소련에게 미사일 기지를 쿠바에서 철수할 것을 강력히 요구했다.

영화 <디데이 13>가 묘사하는 사건의 배경이다.
고심을 거듭하던 미국의 지도부가 구상한 3가지 대처 방안은 미사일 기지에 대한 공습, 군대를 동원한 공격, 해상봉쇄 작전으로 정리되었다. 일단 실행에 들어간 것은 해상봉쇄. 케네디 대통령은 1962년 10월 22일 저녁 7시 대국민 연설을 통해 쿠바에 대한 해상봉쇄(공격용 무기의 반입 금지)를 선언하고 소련에 대하여 핵미사일을 철수시킬 것을 요구했다.

소련에 대한 전면적 응징도 가능하다는 케네디 대통령의 성명은 사실상 소련에 대한 선전포고나 다름없었고, 세계는 극도로 긴장했다. 이유가 무엇이던 핵무기로 무장한 두 강대국이 충돌한다면 통제 불능의 전면전으로 번질 가능성이 높았고, 세계 여론은 이를 3차 세계대전의 신호로 평가했다.

소련은 쿠바에 설치하는 미사일은 방어용이며 미국의 침략을 막기 위한 것이라는 이유로 기지 중단을 거절했다. 이러한 소련의 대응에 미국은 1962년 10월 미사일을 싣고 쿠바로 향하던 소련선박을 카리브 해역에서 봉쇄했다.

소련 선박들이 해상봉쇄선을 넘을 경우 소련과의 핵전쟁도 불사하겠다는 최후통첩이 소련에 전달되었다. 일촉즉발의 위기였다. 미국은 물러서지 않을 태세였고, 소련 또한 상황을 되돌리기에는 지켜보는 눈이 많았다.

그런 상황에서도 미국과 소련 사이에는 핫라인이 가동되고 있었다. 미국은 소련을 실제 공격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렸고, 소련은 미국이 터키에 배치한 핵미사일을 철수할 것을 요구했다. 결국 소련은 미국 함정들과 마주치기 전에 방향을 돌렸고, 일촉즉발의 충돌 상황은 해제되었다.

얼마 후 미국은 터키에 배치했던 핵무기를 철수 시켰다. 미국은 북한에 대한 해상봉쇄를 실행할까? 그 전에 북한이 핵포기를 선언할까?

=조희문 미래한국 편집장

본 기사는 시사주간지 <미래한국>의 고유 콘텐츠입니다.
외부게재시 개인은 출처와 링크를 밝혀주시고, 언론사는 전문게재의 경우 본사와 협의 바랍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