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상륙작전 때 항모 10척 등 250척 동원
인천상륙작전 때 항모 10척 등 250척 동원
  • 미래한국
  • 승인 2005.12.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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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아더를 기리며 <4> 정일화 鄭逸和·편집위원
▲ 정일화 편집위원
한국군은 전투에서 개인호 파는 것도 알지 못해美 해군의 막강한 火力지원으로 韓國 육군 전진 가능 한국군은 낙동강 전선으로 후퇴할 때까지는 거의 소총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상태였으며 낙동강 전투를 하면서 미군으로부터 지원을 받아 겨우 개인화기와 105mm 야포를 비롯한 현대식 무기를 갖추었다. 그리고 탱크는 미군에 배속된 국군1사단만 미군이 빌려주는 형식으로 약간 배치 받았을 뿐이었다. 이런 한국군의 무기열세는 한국전을 치르는 동안 줄곧 문제가 되었다. 주요전투에는 늘 미군이나 유엔군의 화력지원을 기다려야 했고 그런 화력지원이 되지 못할 때는 성공적인 전투를 거의 해 내지 못했다.병력면에도 국군이 인민군에 비해 형편없는 열세에 있었다. 인민군은 침략을 위한 사전 훈련을 단단히 받고 있었고 숫자도 한국군의 2배를 넘었다. 인민군은 낙동강 전선으로 밀고 내려오면서 많은 병력 손실을 입었지만 점령지에서 남한 청년들을 의용군이라는 이름으로 붙잡아 병력을 보충했기 때문에 늘 우세한 병력수준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전술면에서 국군이 월등히 우세했다고 말할 수 있는 증거도 없다. 인민군은 침략계획을 세우면서 소련 고문관 아래서 완벽한 전술교육을 받고 내려왔다. 한국군은 국내치안 유지를 목적으로 하는 경비대 수준이었기 때문에 6·25 발발 때까지 대대병력의 전투훈련도 받은 바 없었다. 전쟁을 하기 위해서는 총병력을 어떻게 배치하고 어떤 순서를 갖고 화력을 운영할 것이며 보급, 정보, 대민관계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를 충분히 계획하고 이를 집행하기 위한 사전 훈련을 완벽하게 해야 한다. 한국군은 그런 병력도 없었고 화력도 없었으며 더군다나 그런 전쟁을 운영할 만한 작전계획 같은 것은 처음부터 없었다. 6·25 전쟁을 두고 가끔 ‘남침인가 북침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경우가 있는데 군사운영의 측면에서 당시의 한국군 사정을 검토해 보면 도무지 전면전을 도발할 수 있는 능력과 준비가 전혀 없었고 또 그런 전면전을 생각한 어떤 방어계획조차도 없었던 것을 한눈에 알 수 있다. 한국군은 각 도별로 사단이 창설되었지만 민병대 수준에 머무르고 있었다. 대대급을 움직여 작전훈련을 한 경우는 있었다. 그러나 연대급 작전훈련이나 사단, 군단 급의 작전계획 같은 것은 아예 들어보지도 못한 형편이었다. 한국군은 전투에서 개인호를 파는 것도 알지 못했다. 때문에 전쟁초기에는 호를 파지 않은 채 전투를 하다가 많은 희생을 당하기도 했다.북한 인민군은 달랐다. 북한은 1945년 소련군이 진주하면서부터 김일성을 우두머리로 한 공산체제를 구축했으며 소련군이 갖고 왔던 2차대전의 최신무기로 인민해방군을 조직했다. 북한이 독자적으로 인민공화국을 수립한 후부터는 평양에 무기제작창을 세워 대포, 소총, 박격포, 각종 탄약을 스스로 만들고 있었다. 남북분단은 결국에는 총으로 해결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결론을 갖고 처음부터 착실한 무력준비를 했다. 탱크병을 비롯한 중요병력 양성을 위해 북한은 일찍부터 소련 현지훈련제도를 수립했으며 1949년 중국공산당이 승리하고 중국내전이 끝나게 되었을 때 중공군에서 활약하던 조선인 부대를 고스란히 넘겨받아 최정예 인민군 6사단, 5사단을 만들었다. 방호산, 무정은 그 중 대표적인 중공군 출신 지휘관들로 6·25 때 명성을 날렸다.소련군의 도움으로 수립한 완벽한 남침계획을 갖고 내려온 이런 준비된 침략군과 민병대 수준으로 큰 소리만 쳐오던 한국군은 도무지 비교가 되지 않는다. 세계 제1, 2차대전에서 연합군의 승리를 이끌어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미군이 오지 않았다면 한국군은 침략군으로 잘 훈련되고 계획된 인민군의 대항력이 되지 않았다. 비록 인민군이 패해 북으로 달아나는 시간이었지만, 한국군이 미군보다 더 잘 싸워 동해안쪽은 휴전선이 올라가고 서쪽은 내려왔다는 분석은 타당하지 않다. 한국전에 뛰어든 미군 지휘관들은 대부분 2차대전의 영웅들이었다. 총사령관 맥아더는 그렇다 치더라도 8군사령관 워커 중장은 2차대전의 영웅이었던 패튼 장군의 참모장을 지냈고 뒤에는 전차군단장으로 베를린을 점령한 베테랑이었다. 다부동 전투에서 백선엽의 국군 1사단을 도와 낙동강 전선을 안정시켰던 마이켈리스는 2차대전 중 최연소 연대장으로 32세에 대령이 되었는데 전쟁이 끝난 후 너무 나이가 젊다는 이유로 중령으로 다시 계급이 조정된 채 한국전에 나왔다. 많은 장교들이 유럽전선, 아시아전선의 격렬한 전투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이었으며 하사관도 그런 경력자가 적어도 절반에 이르고 있었다.이런 병력구성에 항공모함, 최신예 F86 전투기, 셔만탱크, 155mm 같은 한국군은 들어도 보지 못한 최신무기로 무장된 미군보다 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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