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해주에서 북·러 정상회담 가진 김정일의 출생비밀
연해주에서 북·러 정상회담 가진 김정일의 출생비밀
  • 미래한국
  • 승인 2002.08.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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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일, 러 보로실로프 출생
북한 김정일(金正日)은 지난 8월 20부터 4박 5일간 러시아를 방문, 23일 오후 연해주 정부 영빈관에서 푸틴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가졌다. 러시아를 방문한 지 1년도 채 안돼 갑작스럽게 열린 이번 회담의 내용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알려진 것이 없다. 김정일은 이번 러시아 방문 시, 러시아군 극동 관구 사령부를 방문해 자신의 출생지인 옛 소련군 88여단도 찾을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그 귀추가 주목됐으나 찾지는 않았다. 북한이 김정일의 출생지를 백두산 밀영이라 주장하고 있는 가운데 모 일간지는 최근 그의 출생과 관련된 보도를 실어 세간의 관심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 이와관련 김정일의 출생에 대한 비밀을 알아본다.<편집자 주>북 교과서는 백두산 밀영 출생으로 기술김정일의 어릴때 이름은 러시아식 ‘유라’북한의 고등중학교 국어교과서에는 “아, 친애하는 우리의 지도자 김정일 동지, 그이께서 백두산에 탄생하시였다”(고등중학교 3학년 국어 ‘해돋이’)라는 찬양이 있다. 북한은 교과서의 내용에서처럼 김정일이 1942년 2월 16일 백두산의 빨치산 밀영지 통나무집(조선인민혁명군 사령부 막사)에서 태어났다고 선전하고 있다. 북한은 김일성과 그가 이끄는 빨치산 대원들이 1936년 가을부터 백두산일대에 비밀유격근거지인 밀영(密營)을 조성하기 시작했으며 김정일의 생모인 김정숙이 1941년 6월부터 1943년 3월까지 이 귀틀집에 있으면서 국내와 장백지구 반일조직들을 지도했고 이 시기에 김정일이 태어났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주민들에 대한 김정일 우상화 작업으로 이어져, 1987년 2월 12일 백두산 밀영을 김정일 혁명사적지로 지정하고 귀틀집을 지어 성역화(聖域化)했다.하지만 위와 같은 김정일 출생지를 둘러싼 북한의 선전과 우상화작업 내용은 거짓이다.‘1978년 김정일 출생 일시 및 장소에 관한 연구’라는 논문을 펴내며 평생을 김일성부자에 대해 연구하고 있는 허만위(71·동국대·윤리문화) 교수는 “김일성이 1930년대 만주일대에서 공산빨치산 활동을 벌이다 30년대 말 일제의 대토벌에 쫓겨 아무르강(江)을 건너 소련으로 피신한 것은 1940년 10월 하순”이고 “당시 임신한 상태로 김일성과 동행했던 김정숙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북쪽으로 70km떨어진 보로실로프(일명:남야영 또는 B야영)에서 41년 2월 16일 김정일을 출산했다”고 말했다.또한 당시 보로실로프에서 김정숙과 함께 빨치산 활동을 하며 같은 침대에서 생활했던 김선(82·현 만주 거주)씨는 “남야영에서 김정숙과 나는 같은 시기에 임신한 상태로, 동일한 날 진통이 와서 차에 실려 1시간 쯤 달린 뒤 시내에 있는 소련병원에서 해산했다”는 말을 허 교수에게 전했다고 덧붙였다.김정일의 소련 출생설을 부인하는 일부 학자들은 김선씨의 병원 해산에 대한 증언에 대해, 어려웠던 빨치산 시절에는 가능하지 않은 상황이라며 부정적 의견을 표출하고 있으나 1917년 볼세비키혁명 이후 소련에서는 아이를 출산할 때 반드시 병원에서 출산해야한다는 법령이 있었다.김정일은 어린 시절 러시아 전쟁 영웅의 이름을 본 딴 소련식 이름인 ‘유라’로 불렸다. 당시 소련에서는 아이를 축복하기 위해 저명한 사람의 이름을 붙였다. 이 이름은 입북 이후 그가 60년 7월 남산고급중학교(현재 평양제1고등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그대로 쓰여졌다. 김정일이라는 이름은 그가 공민증을 발급 받고 대학에 진학하면서 사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렇게 유라로 불린 김정일을 출생한 당시 소련군 88여단 대위였던 김일성과 그 일행은 그가 두 살이 되던 1942년 7월까지 남야영에 머물렀다. 그해 8월 88정찰 여단이 창설되면서 남야영과 북야영이 합쳐졌고 김일성 일행은 42년 7월 하바로프스크에서 동북쪽으로 약 70km 떨어진 브야츠크(일명:북야영 또는 A야영)로 옮겼다. 이듬해인 1943년 이곳 하바로프스크 북야영에서는 김평일, 소련식 이름 슈라로 불린 김정일의 동생이 출생한다. 전 성균관대 정치학과 이명영 교수는 ‘김일성 열전’에서 김정일의 동생은 1947년 평양의 수상 관저 앞 연못에 빠져 죽었다고 적고 있다.김정숙과 함께 빨치산 활동을 했던 이재덕(87)씨는 1994년 중국에서 발행되는 잡지 ‘부녀생활’ 3월호 ‘고국에 잇닿은 마음’이란 글에서 “김정숙 동지의 차남도 젖 부족을 느끼고 있었다”며 “나는 그보다 젖이 많아 우리 딸애와 함께 그에게 젖을 먹이곤 하였다”라고 말했다. 그녀의 김정숙과 차남에 대한 증언은 중국의 ‘동북지구 혁명역사 문건휘집’과 같은 공식문건의 내용과도 일치한다.이후 김일성과 김정숙은 45년 8월 광복 때까지 줄곧 북야영에 머물렀으며 소련군의 항일대전에는 참전하지 않았다. 김일성은 남야영에 있을 때인 41년 4월과 42년 5월 두 차례 정찰임무를 부여받고 소수 대원과 함께 만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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