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년에 임금을 잘못 만난 정승 노사신(盧思愼)
말년에 임금을 잘못 만난 정승 노사신(盧思愼)
  • 이한우 미래한국 편집위원·논어등반학교장
  • 승인 2018.01.24 1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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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우 미래한국 편집위원·논어등반학교장
이한우 미래한국 편집위원·논어등반학교장

연산군 때 좌의정을 지낸 노사신의 배경은 한 마디로 임금 못지 않았다.

친할머니가 태종의 왕비 원경왕후 민씨(閔氏)의 동생이고 어머니는 세종의 왕비 소헌왕후 심씨(沈氏)의 동생이다.

1427년(세종 9년)에 태어났으니 그의 인생은 거칠 것이 없었다.

그러나 노사신은 배우기를 좋아했고 사치나 거드름을 멀리했다.

어려서 홍응(洪應)과 더불어 홍응의 외숙인 참찬(參贊) 윤형(尹炯)에게 배웠는데 사람을 볼 줄 알았던 윤형은 처음 노사신을 보자마자 홍응에게 이렇게 말했다.

“노가(盧家)의 아이는 참으로 원대(遠大)한 그릇이다. 마침내는 그 명성과 지위가 아마도 너와 비등할 것이다.”
실제로 홍응도 훗날 정승에 올랐다. 1453년(단종 원년)에 문과에 급제한 것을 보면 다행히도 당시의 격변에서는 조금 떨어져 있었다.

외사촌이기도 했던 세조는 노사신을 중용하려고 1462년(세조 8년) 세자 좌문학으로 있던 그를 1년에 5자급(資級)이나 뛰어넘어 승정원 동부승지로 임명했다가 이듬해 도승지에 임명했다. 세조는 그의 학식과 부지런함을 높이 평가했다. 홍귀달이 지은 그의 비명의 한 대목이다.

“자문(諮問)하기 위해 늘 내전(內殿)으로 불러들였고 경(經)과 사(史)를 강론함에 있어 공이 분변하여 대답하는 것이 소리의 울림과 같았다. 임금이 늘 밤중에도 권태를 모르고 책을 봄으로 인해 금중(禁中)에서 유숙하는 날이 많았고, 때론 휴가(休暇)로 나갔다가도 곧 부름을 받고 들어와 하루도 집안에서 쉬는 일이 없었다.”

경국대전 편찬 총괄

1465년에는 호조판서가 되어 최항(崔恒)과 함께 <경국대전(經國大典)> 편찬을 총괄했다. 그 중에서도 호전(戶典)의 집필은 그가 도맡았다. 노사신은 아주 드물게 학재(學才)와 이재(吏才)가 겸비된 인물이었다. 같은 해에 호조판서로서 충청도 가관찰사(假觀察使)를 겸해 지방 행정의 부정을 낱낱이 조사했고 이듬해 실시된 발영(拔英)·등준(登俊) 양시에 응시해 각각 1등과 2등으로 합격하는 영예를 얻었다. 관리를 대상으로 한 과거에서 선두를 달렸다는 말이다.

그의 관리로서의 능력은 특히 예종을 거쳐 성종 때에 큰 빛을 발하게 된다. 성종(成宗)이 즉위하자 의정부 좌찬성(左贊成)으로서 이조판서(吏曹判書)를 겸했다. 이는 사람을 보는 데 눈 밝지 않고서는 맡을 수 없는 자리다. 아마도 왕실 외척으로서의 책임감이 크게 작용했으리라 추측해 볼 수 있다.

1482년(성종 13년) 평안도에 기근(饑饉)이 들었고 다음 해 경기에 또 기근이 들었는데 노사신은 두 곳 모두 진휼사(賑恤使)가 되어 양도의 백성들이 그에 힘입어 생업을 유지할 수 있었다. 황해도는 지역은 넓으나 인구가 적어 조정에서 백성을 이주시켜 채우려 하였는데 이때도 그가 체찰사(體察使)가 되어 선발에 타당성을 잃지 않으니 이주된 자에게 원망이 없었다.

그는 학재에 문재(文才)까지 더해졌다. 1476년 12월에는 서거정(徐居正)·이파(李坡)와 함께 <삼국사절요(三國史節要)>를 찬진하고, 1481년에는 서거정과 함께 <동국통감(東國通鑑)>의 수찬에도 참여했다. 그리고 강희맹(姜希孟) 서거정 성임(成任) 양성지(梁誠之)와 함께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의 편찬을 총괄했으며, 이를 위해 1476년부터 동국문사시문(東國文士詩文)을 수집했다.

한편 1482년에는 이극돈(李克墩)과 함께 <통감강목(通鑑綱目)>을 신증(新增)하고, 이듬해에는 <연주시격(聯珠詩格)>과 <황산곡시집(黃山谷詩集)>을 서거정 어세겸(魚世 謙) 등과 같이 한글로 번역하는 등의 학문적 업적을 남겼다. 홍귀달이 지은 비명 중의 한 대목이다.

“공은 독서하길 좋아하여 평소에 손에서 책을 떼지 않았는데, 무릇 경서(經書),사서(史書), 백가서(百家書)와 석전(釋典, 불가서), 도질(道帙, 도가서)에 이르기까지 모두 널리 통하였고, 성리학(性理學)의 연원(淵源)에 있어서는 그 심오한 뜻에 밝아 당시 넓고 정미(精微)한 이로는 대체로 일인(一人)이었다.

성종(成宗)이 <성리대전(性理大全)>을 보려는데, 강관(講官)이 구두(句讀)를 제대로 띄지 못하는 경우가 있자 공에게 명하여 구결(口訣)을 붙이게 하였고, <율려신서(律呂新書)> <황극경세(皇極經世)>와 같은 책 및 사람이 풀이하기 어려운 책 등을 명하여 모두 나아가 질정(質正)하게 하거나 혹 번역하여 그 뜻을 나타내게 하니, 사람들은 세남비서(世南秘書)에 견주었다.

그리고 비록 문사(文詞)를 좋아하진 않았으나 굳이 지을 일이 있을 경우 그 수단은 문장가(文章家)가 미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나라에 큰 논의가 있을 때에 공은 고사(古事)를 인용하고 금세(今世)를 증거로 하여 붓을 날려 그 편의(便宜)를 주석(注釋)하여서 모두 시행할 만한 것이었으니, 일시의 논자(論者)들이 그보다 나은 이가 없었다.”

노사신이 병상에서 유언을 남기고 있다. MBC에서 방영된 대하드라마 '역적'의 한 장면
노사신이 병상에서 유언을 남기고 있다. MBC에서 방영된 대하드라마 '역적'의 한 장면
연산군 시대의 곤란

말 그대로 르네상스적인 지식인이자 청렴한 관리였다. 아마도 그가 세종 시대에 중견 관리로 살았다면 얼마나 더 많은 업적을 쌓았을지 모를 정도다. 그는 성종 말기에 드디어 우의정에 올랐고 연산군 초기에 좌의정으로 정치의 전면에 나선다. 무결점(無缺點) 노사신의 인생에 오점이 생겨나는 기간이기도 하다.

당시 연산군은 아버지의 정치 방식을 뜯어고치려 했다. 무엇보다 홍문관을 비롯한 언관들의 권한을 제어하려 했다. 이에 대간(臺諫)은 결사적으로 맞섰다. 노사신은 유감스럽게도 그 사이에 끼게 됐다. 조금만 임금 편을 들면 젊은 사대부들로부터 권력에 아첨한다는 맹렬한 비난이 쏟아졌다.

1498년(연산군 4년) 9월 6일 사신은 세상을 떠났다. 그의 졸기(卒記)를 보면 그의 흠결을 억지로 찾아내려 한 흔적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성종조에 정승이 되었으나 건명(建明-건의)한 바는 없었고 금상(-연산군)이 즉위한 처음에 수상(首相)이 되었는데 왕이 대간(臺諫)에게 노여움을 가져 잡아다가 국문하려 하니, 사신이 아뢰기를 ‘신은 희하(喜賀)하여 마지 않는다’라고 하였고, 태학생(太學生)이 부처에 대해서 간(諫)하자 귀양 보내려고 하니, 사신이 또한 찬성했으므로 사림(士林)들이 이를 갈았다. 그러나 그 성품이 남을 기해(害)하는 일은 없었다.

사옥(史獄)이 일어나자, 윤필상(尹弼商) 유자광(柳子光) 성준(成俊) 등이 본시 청의(淸議)하는 선비를 미워하여, 일망타진(一網打盡)하려고 붕당(朋黨)이라 지목하니, 사신은 홀로 강력히 구원하면서 ‘동한(東漢)에서 명사(名士)들을 금고(禁錮)하다가 나라조차 따라서 망했으니 청의(淸議)가 아래에 있지 못하게 해서는 아니 된다’고 했다. 그래서 선비들이 힘입어 온전히 삶을 얻은 자가 많았다.”

실록이 이 정도 기록했다는 것은 오히려 극찬이라 하겠다. 그럼에도 연산군 대에 생을 마감하는 바람에 삶의 후반부가 옥의 티로 남게 된 것은 안타까운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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