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밖의 시민운동 - 노이에스 포럼
교회 밖의 시민운동 - 노이에스 포럼
  • 미래한국
  • 승인 2002.08.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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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이에스 포럼의 주역 베어벨 블라이와(우) 옌즈라이히 교수
노이에스 포럼은 ‘항아리를 넘치게 한 마지막 물한방울(Tropfen, der das Fass zum Ueberlaufen brachte)’이라는 정의에서 나타나듯이 89년 동독 민주화운동의 절정기에 공산당을 몰락시키는데 최후의 일격을 가한 반체제 모임이었다. 니콜라이 교회와 겟세마네 교회에서 시작된 평화기도운동이나 민주화 운동이 교회로부터 시작된 운동이라고 한다면 노이에스 포럼은 교회 밖에서 시작된 최초의 전국규모의 민주화 운동이었다. 노이에스 포럼은 동독의 전환기인 89년 9월 9일 전국 11개 지역에서 30명이 참가한 가운데 결성됐다. 결성식은 동독 대표적 반체제 인사이자 82년 타계한 화학자 로베르트 하페만(Robert Havemann)이 최후까지 살았던 그륀하이데 소재 자택에서 ‘개벽89(Aufbruch89)’를 창설선언으로 채택하고 공동서명하는 형식으로 진행됐다. 이 모임은 결성 초기부터 당과 슈타지의 표적이 되었고 모든 과정이 9월 9일자 슈타지 보고문서에 자세히 기록되었다. 이 기록에는 당시 창설과정에 대한 상세한 내용과 함께 참석자들의 인적사항이 포함되었다. 평화주의자이자 반체제 인사였던 베어벨 볼라이, 옌즈 라이히 등 반체제 인사들이 참가했던 이 모임에는 슈타지의 감시가 뒤따랐고 참가자들은 블랙리스트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이 역사적 현장에 가담했다. 이들은 소련의 페레스트로이카와 글라스노스트 그리고 폴란드 솔리다르노스크와 같은 개혁 및 시민운동에 크게 고무되었다. 이 후 노이에스 포럼 초기 참가자들의 집에는 연일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더 많은 체제비판세력과 민주화 세력들을 응집해냈다. ‘개벽 89’에 서명한 인원이 총 20만 명에 달했고 이 중 1만 여명은 정회원이 되었다.이들은 슈타지의 조직적인 방해와 탄압에도 굴하지 않았고 탄압과 독재정치에 침묵을 강요당했던 국민들에게 용기를 주었다. 이로부터 노이에스 포럼은 반세기 누적된 동독사회의 모순과 불만들의 성토장이었고 표현, 집회의 자유에 대한 요구가 제기되었다. 창설 후 열흘째인 9월 19일, 노이에스 포럼은 정치단체로의 승인신청을 냈고 당시 행정당국은 이 단체가 반국가적이고 불법이라는 이유로 승인을 거절했다. 시위가 지속됐고 모든 시민운동단체와 재야세력들로부터 노이에스 포럼은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고 결국 정치단체로서의 승인을 얻었다.이때부터 노이에스 포럼은 정치에 가담했고 동독의 몰락과 통일 전후 과정에 적극 참여했다. 다른 민주단체들과 함께 10월 3일에는 ‘원탁회의(Runder Tisch)’를 구성해 호네커 이후 에곤 크렌츠와 한스 모드로브로 이어지는 정계변화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무엇보다도 노이에스 포럼의 가장 큰 업적은 호네커에서 모드로브 총리에 이르는 공산당의 승계를 부인하고 90년 3월 8일 동독 땅에 최초로 자유 민주선거를 실시토록 한 데 있다. 이 선거로 동독 내 공산당은 종말을 고했고 동독 기민당의 로타 드메지어가 최초의 합법적인 총리가 되었다. 그리고 서독의 콜 총리는 드메지어와 함께 동서독 통일협상을 진행해 숙원인 통일을 이루어냈다. 서독, 프랑스, 영국 등 서방세계의 주요 방송매체들은 노이에스 포럼의 ‘개벽 89’를 특별한 관심을 갖고 지켜보았고 동독의 체제전환의 과정을 심도있게 추적했다. 오늘날 노이에스 포럼은 다른 다양한 개혁 및 민주세력들과 ‘동맹90 (Buendnis90)’을 결성해 서독의 녹색당과 함께 현재 사민당 슈뢰더 정부에 연정으로 참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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