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림픽’이라는 이름의 종교
‘올림픽’이라는 이름의 종교
  • 한정석 미래한국 편집위원
  • 승인 2018.01.30 1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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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한 신체에 건전한 정신이 깃든다’ 로마 제정(帝政)기에 시인 유베날리스가 자신의 풍자시 10편에서 한 말이다. 유베날리스는 로마인들이 신체의 강건함만을 추구하고 정신적인 단련을 소홀히 하는 모습을 비꼬아 그렇게 말했다. ‘너의 신체가 건강하다면 당연히 너의 정신도 건전해야 한다’는 의미가 ‘건강한 신체에 건전한 정신이 깃든다’의 정확한 해석이다.  

2000년 전 사도 바울도 비슷한 생각을 했다. 바울은 당시 그리스 올림피아드의 유산이 남아있던 코린트에서 사람들이 육상과 권투경기에 열광하는 것을 보고 다음과 같이 교회들에게 보내는 편지에 썼다.

“경기장에서 여러 선수들이 다 함께 달리지만 우승자는 하나뿐이라는 것을 모르십니까? 이와 같이 여러분도 우승자가 되도록 힘껏 달리십시오. 우승자가 되려고 경쟁하는 선수마다 모든 일에 절제합니다. 그들은 썩을 면류관을 얻기 위해 그렇게 하지만 우리는 썩지 않을 면류관을 위해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나는 목표 없이 달리는 사람처럼 달리지 않고 허공을 치는 권투 선수처럼 싸우지 않습니다” (고린도전서 9:24-26)

코린트는 헬라제국에서 가장 번영하던 상업 항구도시였다. 바울은 그리스의 여신 나이키(Nike)로부터 승자의 월계관을 받기 위해 자신을 절제하고 훈련을 통해 달리고, 치고받는 코린트 사람들의 노력을 높게 평가하면서도 그 목적이 “썩을 면류관을 얻기 위해”라는 점에 개탄했다.

그러면서 바울은 크리스천들은 “썩지 않을 면류관을 위해” 코린트인 들처럼 목표를 향해 전력을 다해야 한다고 썼다. 바울의 이러한 관점으로부터 우리는 올림픽정신이 기독교 세계관과 부합되는지에 대한 질문을 해볼 수 있다. ‘더 빨리, 더 높이, 더 멀리’라는 올림픽 슬로건에는 인간이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열망이 담겨 있다.

서울 중구 동대문디자인플라자에서 열린 평창올림픽 메달 공개행사에서 메달이 진열돼 있다. / 연합
서울 중구 동대문디자인플라자에서 열린 평창올림픽 메달 공개행사에서 메달이 진열돼 있다. / 연합

그런 올림픽의 모토는 무엇을 얻기 위한 것일까. ‘강건한 크리스천’과 스포츠 정신? 스포츠는 기독교인들과 보수주의적 시민 그룹에서 미덕으로 여겨져 왔다. 19세기 미국에서 시작된 YMCA는 청년들에게 스포츠정신을 통한 ‘강건한 크리스천’(Muscular Christianity)이라는 미덕을 가르쳤다.

1905년 대한제국에 처음 야구라는 경기가 들어오게 된 것도 한국 YMCA의 전신이었던 황성기독교청년회의 선교사들을 통해서였다. 이른바 ‘강건한 크리스천’이라는 독특한 기독교 철학은 17세기 영국에서 그 기운이 싹텄다. 처음에는 산업혁명으로 도시와 교역을 통해 부를 축적한 영국 농촌의 소(小)귀족 출신 신사(紳士·gentry)들 사이에 사냥이 그 모티브가 됐다.

그들은 독실한 기독교인들이었는데 ‘엽총과 성경을 든 크리스천’이라는 자신들의 이미지로부터 ‘강한 남성적 기독교’를 강조했다. 19세기에 이르면 런던을 중심으로 스포츠와 기독교를 접목시키는 운동이 본격적으로 일어났다.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영국에서 ‘럭비’ 경기를 탄생시킨 럭비학교(Rugby School)의 설립자 토마스 휴즈(Thomas Hughes)였다.

그는 소설가이자, 정치가였으며 동시에 기독교 사회주의자였고 노동운동가이기도 했다. 토마스 휴즈는 청소년들에게 스포츠 교육이 육체를 단련시켜 나약함을 이겨내고 협동심과 규칙, 그리고 사회 정의를 실천하는 데 용기를 준다고 믿었다. 그러한 삶은 ‘크리스천이 겪게 되는 삶의 난관’을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되기에 스포츠는 기독교정신과 부합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주목해야 할 점은 당시 영국의 ‘강건한 크리스천’은 남성에 대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러한 기독교적 세계관은 ‘가부장적 크리스천’(Christian patriarchy) 세계관에 바탕한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하나님은 ‘아버지’이시고 그리스도는 그의 ‘아들’이라는 성경의 기록에 따라 기독교 남성이라면 당연히 육체적으로 남성성을 강력하게 유지해야 한다는 생각은 19세기 유럽문화에서는 당연하게 받아들여졌다.

흥미로운 사실은 영국의 이러한 ‘강건한 크리스천’을 가장 부러워했던 이가 다름 아닌 근대올림픽의 창시자 프랑스의 쿠베르탱이었다는 점이다. 쿠베르탱은 1875년 영국 사회와 접촉하면서 토마스 휴즈의 럭비학교에 관한 책들을 읽고 크게 감명을 받았다. 다만 영국의 럭비학교는 쿠베르탱에게 낭만적인 착오를 안겨 줬다.

1870년에 있었던 보불전쟁에서 프랑스가 프로이센에 참패했던 원인이 프랑스 청년들의 문약함 때문이라고 결론짓게 된 것. 그 결과, 열렬한 애국자이자 낭만주의자였던 쿠베르탱은 프랑스에 학교체육과 사회체육 보급에 열성을 바치게 된다. 쿠베르탱이 근대 올림픽의 부활을 추진키로 결심하게 된 결정적인 사건은 1882년 아테네의 올림피아드 유적지의 발굴이었다.

그는 고대 그리스의 올림픽으로부터 큰 영감을 얻게 되는데, 올림픽이 그리스 사회를 통합하고 평화의 제전이 되었다는 해석으로부터 불안한 근대초기, 제국 열강들의 경쟁으로부터 세계 평화를 도모하자는 아젠다를 쿠베르탱은 올림픽에서 찾았던 것이다.

근대 올림피즘을 종교로 고백한 쿠베르탱 하지만 고대 그리스의 올림픽과 쿠베르탱의 생각 간에는 큰 괴리가 있었다. 무엇보다 1000년간 지속된 고대 그리스의 올림픽은 그리스 도시국가들이 공통분모로 하던 제우스신과 기타 올림포스의 신들에 대한 그들만의 충성심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이러한 종교적 일치성은 도시국가들 간에 존재하는 갈등과 경쟁에 최종심급으로 작용하는 일종의 최고규범이 된다. 실제로 그리스에서는 도시국가들 사이에 전쟁이 있더라도 종교적 축제 차원의 올림피아드 기간에는 전쟁을 중단하고 평화를 모색할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쿠베르탱이 기획했던 근대 올림픽에는 세계 열방과 민족들이 절대 복종해야 할 만한 종교적 규범이 존재하지 않았다. 이러한 점은 쿠베르탱에게도 부담이었던 듯, 그는 올림피즘(Olympism)이라는 명칭과 함께 이를 ‘사람, 평화, 미(美)’라는 세 가지 개념으로 종교성을 구상하기에 이른다.

그런 쿠베르탱은 1935년 베를린 올림픽을 앞두고 독일에 초청됐다. 쿠베르탱은 거기에서 올림피즘의 종교적 규범성을 설명해야 했는데, ‘인도주의’와 ‘민주주의’를 올림피즘의 정신으로 역설했다. 그런 맥락에서 쿠베르탱이 1931년에 행한 연설의 한 대목은 지적할 만하다. ‘올림픽은 교회의 교리에 관한 하나의 종교다’라고 했던 것. 쿠베르탱의 올림픽이 결국 ‘인간 중심의 지구촌 운동’임을 고백한 것이다.

하지만 고대 그리스의 올림픽이 가진 종교성은 인도주의나 민주주의가 아니라, 그리스인들의 주(主)였던 올림피아 신들에 대한 ‘신본주의’적 복종과 예배였다. 이 문제에 대해 학자들 일부에서는 쿠베르탱이 ‘기독교 없는 기독교윤리’ 교육을 받은 영향으로 분석하기도 한다.

쿠베르탱은 올림픽이 세계 평화에 크게 이바지할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하지만 근대 올림픽이 개최되었던 1896년 이후 올림픽은 우여곡절 속에서도 계속 개최됐지만 세계는 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이라는 전무후무한 근대성의 재앙을 맞이해야 했다. 근대 올림픽은 회를 거듭하면서 강력한 민족주의와 국가주의 상징으로 변질되기에 이르기도 했다.

냉전기의 올림픽은 옛 소련과 동구 공산주의 국가들로서는 공산주의 수출을 위해 체제 선전의 장이 되어야 했다. 그런 나라들의 스포츠 선수들은 개인이 아니라 국가가 길러내는 스포츠 병사라는 표현이 오히려 걸맞았다. 아울러 올림픽은 시간이 지나면서 상업주의 유혹에 순수성을 잃어갔다는 비판도 면할 수 없었다.

아마추어리즘을 원칙으로 했던 올림픽은 1974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열린 75차 총회에서 선수의 광고행위를 허용하고 유니폼에 상표 부착을 허용하는 규정을 채택했다. 이후 86년 스위스 로잔 총회에서는 아마추어리즘을 강조한 제26조 규정을 선수의 윤리규정으로 바꾸면서 프로선수의 올림픽 출전 길이 열렸다.

88년 2월 캘거리 겨울올림픽 때 프로아이스 하키선수들이 출전했고, 서울올림픽에서는 당시 세계 여자 테니스 랭킹 1위였던 슈테피 그라프(독일)가 출전해 우승함으로써 4대 그랜드슬램 대회와 올림픽을 휩쓴 최초의 ‘골든 슬래머’가 됐다. 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 때 미국은 NBA 스타들로 ‘드림팀’을 구성해 파견했다.

2000년 전 사도 바울이 코린트에서 경고했던, ‘썩을 면류관’을 위해 달리고, 치고받던 영혼 없는 올림피아드가 지금의 올림픽이라면 지나친 해석일까. 그리스에서 모두를 하나로 만들어 주던 올림포스의 신들이 사라진 후 올림픽이 타락의 심연으로 빠져들었던 생생한 사례가 있다.

1936년 독일 나치의 베를린 올림픽.
1936년 독일 나치의 베를린 올림픽.

평창올림픽이 세계 평화에 기여하려면 AD 67년 로마 황제 네로는 500명이 넘는 로마 군인들과 전차를 이끌고 그리스로 넘어가 그 해 올림픽에 출전했다. 네로는 대부분 종목에서 우승했으며 그의 머리에는 올림픽의 승자에게 헌정되는 월계수관이 바쳐졌다.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네로 황제의 월계수관은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때 심판관들은 무려 1808개에 달하는 상을 네로에게 수여했다. 어떻게 가능했을까. 로마 황제와 겨뤄 이긴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했다. 선수들은 알아서 경기장을 기었다. 심지어 이런 경기도 있었다.

네로는 10명이 참가하는 전차 경기에 출전했으나 중간에 굴러 떨어졌다. 수치심이 들었던 네로는 경기를 포기했다. 하지만 심판관들의 의견은 네로가 우승자였다. 이유는 기상천외했다. ‘전차경기는 전차를 소유한 이에게만 출전이 주어진다’는 유권해석을 통해, 유일하게 자기 전차를 몰았던 네로 황제만이 이 경기의 정당한 출전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타락했던 고대 올림픽은 로마 제국의 테오도시우스 1세 황제가 기독교를 로마 제국의 국교로 정하면서 종막을 고했다. 2018년 2월 우리는 평창에서 다시 한 번 기상천외한 올림픽 경기를 보게 될 것 같다. 올림픽 경기를 주관하는 IOC는 유엔 북한인권보고서에 따르면, 탈북자들을 처형하고 나치 같은 정치범 수용소에 약 10만 명을 가두고서는 핵무기로 미국과 한국을 위협하는 김정은을 위해 모든 레드카펫을 깔아줬다.

출전 경비는 물론, 출전 자격이 안 되는 북한 빙상 선수들을 출전시키기 위해 IOC는 브라질 리우올림픽 당시 난민 올림픽 팀의 사례를 들어 ‘특별 출전권’을 부여하겠다고 말했다. 북한 선수들이 난민이라는 이 기상천외한 해석은 네로의 전차 우승 심판을 보는 것 같다.

물론, 출전비도 없는 북한 선수들이니 ‘난민 대우’를 이해하지 못할 바도 아니다. 다만 IOC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이 80년대에 시작한 흑백인종차별정책(아파르트헤이트)을 문제 삼아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올림픽 참가 자격을 30년간 박탈하는 의로움을 보였다.

그런 IOC는 유엔과 국제사회가 인권탄압국으로 지목하고 심지어 유엔 인권조사관의 입북마저 거부하는 북한에 대해서는 언제나 환영의 문을 열어줬다. 평화라는 명분으로 말이다.

하지만 그 결과는 무엇이었던가. 올림피즘이 세계종교라면 거기에는 평화를 내건 장사와 정치적 협잡은 있어도 구원은 없어 보인다. 그런 올림픽이 과연 세계 평화에 이바지하고 있기는 한 것일까. 

= ‘올림픽’이라는 이름의 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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