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으른 오고당상(午鼓堂上) 어세겸, 좌의정에 오르다
게으른 오고당상(午鼓堂上) 어세겸, 좌의정에 오르다
  • 이한우 미래한국 편집위원·논어등반학교장
  • 승인 2018.02.06 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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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우 미래한국 편집위원·논어등반학교장
이한우 미래한국 편집위원·논어등반학교장

공자는 스스로 50살에 지천명(知天命)했다고 했다. 이는 무슨 특이한 체험이 아니다. 세상 일에는 도리가 있음을 스스로 받아들이고 늘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임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지천명을 외천명(畏天命)이라고도 한다. 연산군 2년에 신하로서는 최고의 권좌인 좌의정에 오른 어세겸(魚世謙)은 분명 천명을 알아 좌의정에까지 오른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세겸의 아버지 효첨(孝瞻)은 판서를 지내고 중추부 판사에 이르렀으나 의정부의 재상을 지내지는 못했다.

세조 2년 동생 세공(世恭)과 함께 문과에 급제한 세겸은 순조롭게 관직 생활을 하며 승진에 승진을 거듭해 세조말에는 우승지에 올랐다. 이 과정에서 당대의 실력자인 김국광(金國光)이나 한계희(韓繼禧) 등의 천거를 받기도 했다.

실록의 졸기(卒記)는 그의 평소 성품을 이렇게 요약하고 있다.

“천품이 확실(確實)하고 기개와 도량이 크고 넓어 첩(妾)을 두지 않았고 용모를 가식하지 않았으며, 청탁을 하는 일이 없고 소소한 은혜를 베풀지도 않았다. 천성이 또한 청렴하고 검소하여 거처하는 집이 흙을 쌓아 층계를 만들고 벽은 흙만 바를 뿐 붉은 칠은 하지 않았다. 경사(經史) 읽기를 즐기고 술 마시기를 좋아하여 손이 오면 바로 면접하여 종일토록 마시었다. 문장을 만들어도 말이 되기만 힘쓰고 연마(硏磨)는 일삼지 않았으나 자기 일가(一家)를 이루었으며, 평생 동안 사벽(邪)하고 허탄(虛誕)한 말에 미혹(迷惑)되지 아니하여 음양 풍수설(陰陽風水說) 같은 것에도 확연(確然)하여 그 마음을 움직이지 않았다.”

명문거족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할아버지 어변갑(魚變甲)이 집현전 직제학을 지낸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정통 유학을 공부하고 인격적 수련 또한 겸비한 인물임을 알 수 있다. 게다가 예종 때는 남이의 역모 사건을 처리하는 데 관여해 공신에 책록돼 함종군(咸從君)이라는 봉호까지 받았다.

특별한 잘못을 하지 않는 한 앞길이 보장된 셈이었다. 게다가 천운(天運)도 따랐다. 마침 흔히 태평성대로 불리는 성종(成宗) 시대가 열린 것이다.  성종 2년(1471년) 예조참판에 오른 어세겸은 승진을 거듭해 성종 10년 사헌부 대사헌에 이른다. 오늘날로 치면 검찰총장이 된 것이다.

그런데 당시 함께 문과에 급제한 동생 세공이 병조판서로 있었기 때문에 상피법(相避法)에 따라 한성부좌윤으로 자리를 옮기기도 했다. 성종 11년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온 세겸은 이후 전라도 관찰사, 공조판서, 형조판서, 한성판윤, 호조판서, 병조판서를 두루 거쳤다.

KBS 드라마 '왕과 비' 174회에 등장하는 어세겸
KBS 드라마 '왕과 비' 174회에 등장하는 어세겸

명나라에 사신으로 갈 때의 일화 하나가 지금도 전한다.

“허리는 굽혀도 무릎은 꿇지 않는다”

‘공이 요동(遼東)에 도착하자 (명나라 관리인) 태감(太監) 및 총병관(摠兵官), 도어사(都御史) 등이 공을 위해 연회석을 마련했는데 공이 읍(揖)만 하고 무릎을 꿇지 않자 어사가 “왜 무릎을 꿇고 술을 마시지 않습니까?”라고 하자 공이 대답하기를, “나는 우리 전하(殿下)의 명(命)으로 경사(京師)에 내조(來朝)하는 중인데 대인(大人)들이 특별히 이 자리를 베풀어서 나를 예(禮)로써 위로했을 뿐이거늘 내 어찌 무릎을 꿇고서 술을 마셔야 한다는 말이오?”라고 하였다.’

읍은 두 손을 잡고 얼굴 앞까지 들어 인사하는 예절 방식이다. 정중하게 인사는 했지만 무릎은 꿇지 않았다는 말이다. 사실 이 때는 명나라 사신의 위세가 하도 커서 한명회조차 명나라 사신에 기대어 자신의 권력을 키워갔다는 점에서 세겸의 이 같은 대응은 분명 남다른 것이었고 그것이 전해지자 조정에서도 칭송이 잇따랐다.

더불어 그의 독특한 업무 스타일과 관련해 흥미로운 일화가 또 하나 있다. 형조판서로 있을 때는 출퇴근 시간에 개의하지 않아 ‘오고당상(午鼓堂上)’이라 불렸다. ‘오고당상’은 정오 종을 칠 때 쯤에 출근하여 일을 시작하는 관리라는 뜻으로, 게으른 관리라는 뜻의 별명이다.

그러나 정치를 능률적으로 하여 결송(決訟-소송의 결정)이 지체되지 않았다 한다. 성종 말기에는 홍문관 대제학이 됐다. 이는 조선초 권근(權近) 윤회(尹淮) 변계량(卞季良) 최항(崔恒)의 뒤를 이어 문형(文衡-대제학의 별칭)이 됐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최고의 글쟁이였다는 말이다.

그는 1483년 서거정(徐居正) 노사신(盧思愼)과 함께 <연주시격(聯珠詩格)>과 <황산곡시집(黃山谷詩集)>을 한글로 번역했고 1490년 임원준(任元濬) 등과 함께 <쌍화점(雙花店)> <이상곡(履霜曲)> 등의 악사(樂詞)를 개찬(改撰)하기도 했다. 그후 의정부로 옮겨 좌참찬 우찬성 좌찬성을 지냈다.

이는 정승으로 가는 정규 코스였다. 1495년 연산군 1년 우의정에 오른 그는 이듬해 마침내 좌의정에 오른다. 연산군 초기는 임금과 대간(臺諫)의 충돌이 극에 달해 가운데 낀 대신들의 처신이 쉽지 않았다. 3년 후인 1498년 무오사화가 일어났을 때 그는 탄핵을 받아 좌의정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세겸은 좌의정으로 있으면서도 임금에 대한 직언을 꺼리지 않았다. 연산군 2년 봄에 좌의정이 된 그는 가을에 경연(經筵)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한당(漢唐) 시대는 환관(宦官)들이 권력을 제 멋대로 했는데 인주(人主-임금)는 이를 깨닫지 못하여 끝내 난망(亂亡)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대저 불은 염염(焰焰-불꽃이 이는 모양)할 때 끄기 쉽고 물은 연연(涓涓-시냇물이 졸졸 흐르는 모양)할 때 막기 쉽습니다.”

연산군의 미래상을 예감한 때문이었을까? 또 이듬해 경연에서는 후한의 명제(明帝)에 관한 대목을 진강하다가 이렇게 말했다.

“임금은 성의 정심(誠意正心)으로 학문을 닦은 연후에야 능히 이단에 현혹되지 않을 것입니다. 명제의 학문은 장구(章句)일 뿐이며 대도(大道)를 듣지 못하였기 때문에 불교에 현혹되어 만세(萬世) 화근의 기본을 만든 임금이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 성종(成宗)께서는 불교를 엄히 배척(排斥)하여 도승(度僧)을 폐지하도록 명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선릉(宣陵-성종의 능) 곁에 절을 짓는 것은 비록 대비의 명이라 할지라도 전하께서 대의(大義)를 들어 못하도록 청함이 마땅합니다. 내수사(內需司)의 비축은 모두 나라 물건이 아닌 것이 없는데, 이를 사찰(寺刹)의 창건에 쓰고 나라에서 빼낸 것이 아니라고 말하면 어찌 옳겠습니까?”

이런 세겸이었지만 결국 사초(史草)사건으로 대간의 공격을 받아 좌의정에서 물러났다. 실은 연산군이 직언을 꺼리지 않는 세겸을 물리친 측면도 있었다.

그의 졸기에는 또 그의 벼슬관과 자식에 대한 그의 태도가 표현돼 있다. “젊을 때부터 나아가 벼슬하는 일에는 욕심이 없어 요행으로 이득 보거나 벼슬하는 것과 같은 말은 입 밖에 내지를 않았고, 비록 활쏘기와 말타기 하는 재주가 있었지만 일찍이 자기 자랑을 하지 않았으며, 일찍이 편지 한 장하여 자제(子弟)들을 위해 은택(恩澤) 구하는 일을 하지 않았다.” 아마도 그가 권신들에게 편지 한 장하여 자식들을 부탁했다면 그의 자식들은 현달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만일 그랬다면 연산군 말기에 어떤 비극을 당했을지 모른다. 세겸은 이런 점에서도 분명 천명을 아는 사람이었다고 할 수 있다. 세겸은 연산군 6년(1500)년에 71살을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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