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정치가 죽인 조선의 과학기술
기획 정치가 죽인 조선의 과학기술
  • 박성현 미래한국 편집위원· 전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원장
  • 승인 2018.02.06 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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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조는 건국 초부터 민생 안정과 국력 강화를 위해 과학기술 개발에 힘을 기울였다. 조선은 왕권이 강했던 초기(태조∼세조)에 국방력도 좋았고, 민생도 튼튼했으며 나라가 번성한 시기였다. 태조 4년(1395년)에는 조선을 기준으로 관측한 별자리를 그린 천문도인 ‘천상열차분야지도(天象列次分野之圖)’를 제작했다.

특히 세종 때를 전후해 천문학을 비롯한 과학기술의 발전이 두드러졌다. 천문학은 하늘의 변화와 왕의 통치를 관련지었던 유교적 관점에서도, 실제 농경 활동을 위한 실용적인 관점에서도 매우 중요한 것이었다. 조선 전기 과학의 발전을 살펴보면 15세기 전반 세종대(1418∼1450) 조선의 과학은 매우 발달해 활짝 꽃을 피웠다.

그 당시로는 세계 최고 수준의 역법(曆法, 천체들의 운행을 계산하는 일종의 천체력)이라고 평가받는 <칠정산내외편(七政算內外篇)>은 이후 개선, 증보되지 못했을 뿐 아니라 후대의 역산가(曆算家)들은 그 천체 운행의 계산법들을 제대로 계산을 해내지 못할 정도였다고 한다.

아날로그 방식의 물시계를 디지털 방식으로 전환해 시간을 알려주는 정교한 기계식 시보(時報) 장치를 갖춘 획기적 물시계인 자격루(自擊漏)는 또 하나의 자랑스러운 세종대 과학기술의 성취인데, 그 제작자 장영실이 죽은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제대로 관리할 사람이 없어 무용지물이 되고 말았다고 알려져 있다.

1446년 세종에 의해 창제 반포된 훈민정음(한글)은 한민족의 문화유산 중에서도 백미로 꼽는 과학적인 글로 세계에서도 인정해주는 언어다.

그 외에도 세종의 적극적인 지원과 뛰어난 과학기술자 이천과 장영실의 주도로 제작해 사용했던 각종의 천문의기(天文儀器; 혼천의, 양부일구, 간의, 일성정시의, 정남일구 등)는 이후 관측 활동에 사용되지 않고 방치되었으며, 임진왜란 등의 전란을 거치면서 대부분 없어지고, 전란 후에는 남아 있는 기구마저 그 사용법을 아는 이가 없다고 숙종대의 대학자 이이명(1658∼1722)이 한탄할 정도였다고 문중양(2016)에서 지적하고 있다.

의약학과 지리학 같은 다른 과학 분야도 괄목할 만한 것들이 있다. 15세기 조선의 의약학은 금나라와 원나라의 의약학을 수용해 종합적으로 소화 정리해낸 세종 15년의 <향약집성방(1433년)> 85권과 세종 24년의 <의방유취(1445년)>로 대표된다.

<의방유취>는 14명의 의학자들에 의하여 3년 만에 완성된 365권에 달하는 의약 백과사전으로 15세기 전반기 세계 의학사상 가장 뚜렷한 업적이라 할 수 있다. 그후 조선 의약학은 더 진전된 명나라의 의약학을 수용하기에 이른다. 1610년 완성을 본 허준의 <동의보감>은 조선 의약학의 결산으로, 중국에서도 의약학의 텍스트로 활용할  정도로 우수한 의약서로 인정받았던 동아시아 의약학의 권위서였다(참조: 김호(1994)).

조선의 과학기술-세종 시대와 그 이후

조선시대에 지리학 분야의 발전을 살펴보면 1402년에 제작된 초보적인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와 1557년 좀 더 정밀하게 제작된 ‘조선방역지도’가 있으나, 한반도 북부는 대충 그려진 한계가 있다. 18세기 들어와 정상기(鄭尙驥, 1678∼1752)의 ‘조선전도(1757년)’는 이런 한계를 극복하고 있어 발전된 지도이다.

조선의 지도제작 기술 발전이 절정에 도달한 것은 1861년 제작된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였다. 이 지도는 조선 지도학의 제작 기법을 계승 발전시켜 이룩한 조선 최고의 지도로, 그 정밀도는 20세기 초 일본 해군이 보유한 근대식 지도보다 더 정밀할 정도였다(참조: 양진경(1995)). 이렇듯이 조선의 지도학은 조선시대 동안 괄목할 만하게 발전했던 것이다.

세종시대 농업기술의 발전도 괄목할 만하다. 농업기술 지침서인 <농사직설>(세종 12년, 1430년)을 보면 유기농업에 의한 집약적 경작기술을 제안했으며, 이를 농가에 효과적으로 보급했다.

세종시대의 과학기술 수준은 세계적이라고 평가된다. 1983년 일본에서 편찬한 <과학사기술사사전>에 따르면 1400∼1450년까지의 세계 주요 업적으로 한국이 29건, 중국이 5건, 일본은 0건, 동아시아 이외 지역 28건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세계 주요 업적 총 62건 중 거의 반에 해당하는 업적이 세종시대에 만들어질 정도로 우수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세계 최고 수준일 정도로 발전했던 세종대의 눈부신 과학은 조선 중기 이후 계승 발전하지 못하고 쇠퇴했다고 볼 수 있다. 조선 중기 이후 왕권이 상대적으로 약해지고 사대부 출신 신하들의 권력이 국왕을 능가하게 됨에 따라 군약신강(君弱臣强)의 나라가 되면서 국력이 쇠퇴해 갔다.

신권의 강화는 절대왕권에 대한 감시와 견제의 필요성에서 출발했으나, 강해진 신권이 왕권을 좌지우지하는 사태로 변질되었고, 이에 따라 권력 투쟁이 심화되고 붕당정치를 낳게 되었다. 조선 중기의 임진왜란(1592∼1598)과 병자호란(1636∼1637) 등의 외침으로 인한 파괴와 처절한 피해는 세종대 눈부신 과학적 성취를 계승하지 못했다.

15세기 이후 외란을 거치면서 쇠퇴했던 조선의 과학기술은 17세기 이후 서구 과학의 유입이라는 외적 충격에 의해 다시 꿈틀대기 시작했다. 소위 실학자들의 ‘진보적 서양과학의 수용’과 ‘낡고 오래된 전통 세계관의 극복’ 등의 모습들은 그러한 변화의 실증적 사례들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영·정조 시대의 부흥 노력

18세기 중·후반 영조(21대, 재위 1724∼1776)와 정조(22대, 재위 1776∼1800) 시대 과학기술의 부활에 대한 열망으로 이어졌다. 영조는 붕당 싸움의 폐해를 간파하고 탕평책을 쓰면서 인재 등용에 심혈을 기울였고, 그 당시 새로운 학문인 실학이 뿌리내리도록 장려했다.

이 당시 뛰어난 실학자 이익의 <성호사설(星湖僿說)> 30권이 1740년경에 출판되기도 했다. 성호는 이익의 호이며, 사설은 가늘고 작은 논설이라는 뜻이다. 정조는 왕실도서관인 규장각을 세우고, 많은 인재(정약용, 박제가, 유득공, 이덕무 등)를 모아 독서하고 토론했다.

정조는 청나라를 통해 서양의 과학기술을 받아들이고 싶어 했고, 군사 제도를 개편해 강한 군대를 만들려고 노력했다. 영·정조 시대는 조선의 마지막 르네상스 시대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영·정조 시대의 열망에 부응하지 못하고, 조선 사회는 19세기 들어 급격하게 쇠퇴했다.

조선의 과학기술은 일본과의 강화도조약(1876년)에 의한 개항기를 맞이할 즈음에는 거의 백지 상태에 이르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문중양, 2016). 결국 근대과학과 강력한 무기기술로 무장한 서구 열강이 한반도를 침탈해 들어오던 시기에 그에 대응할 우리의 과학기술은 부재했고, 결과는 조선의 멸망이었다.  

조선 사대부 지식인들의 자연 이해는 기본적으로 성리학적 자연 인식 체계에 근간을 뒀다. 성리학적 자연 인식 체계란 중국 송대 유학자들에 의해서 정립된 것으로, 무(無)에서 유(有)의 창조라든가, 인격적인 천(天)의 개념에 의존하는 도가적 또는 불교적 자연 이해에 근거를 두고 있는 것이었다.

성리학적 자연 인식 체계는 크게 주돈이(周敦)의 태극(太極) 개념, 장재(張財)의 기(氣) 개념, 그리고 소옹(邵雍)의 주역(周易)에서 비롯된 상수학(象數學)적 개념에 의한 체계이다. 조선의 유학자들이 성리학적 자연 인식 체계를 소화해서 우주론적 사색을 펼치기 시작한 것은 16세기 이후였다.

그 단초를 서경덕의 <화담집>에 담겨 있는 1545년경의 우주론 논의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것은 중국 송대의 세 가지 우주론 개념들을 과감하게 통합해서 논의한 것이다. 이런 논의는 17세기 초 장현광의 <우주설>(1631년)에서는 질적으로 업그레이드된 모습을 보여준다.

‘정묘년교식가령’은 칠정산법에 따라 1447년 정묘년 8월의 일식과 월식을 정확히 계산한 예를 적어놓은 책으로, 이론적으로 정립된 칠정산을 입증했다. / 사진출처 : 우리역사넷
‘정묘년교식가령’은 칠정산법에 따라 1447년 정묘년 8월의 일식과 월식을 정확히 계산한 예를 적어놓은 책으로, 이론적으로 정립된 칠정산을 입증했다. / 사진출처 : 우리역사넷

여기에서는 우주의 ‘무한함’이라든가 별개의 ‘또 다른 우주’의 존재 가능성과 같은 파격적인 우주론적 사색을 본다(문중양, 1999). 조선 사대부 유학자들의 자연에 대한 우주론적 사색은 이후 성리학의 본격적인 성장과 함께 성숙해져 서구 과학과의 만남의 시기 이전에 이미 조선의 유학자들은 우주에 대한 세련되고 자유로운 형이상학적 사색을 펼쳤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에는 국가 간의 자유로운 교류가 없었으므로, 사신단의 정기적인 왕래가 거의 유일한 교류의 통로였다. 조선에 최초로 들어온 서구 과학의 산물은 1603년에 사신 일행으로 북경에 다녀온 이광정과 권희가 바쳤던 ‘곤여만국전도(坤與萬國全圖)’라는 세계지도였다.

이 지도는 중국 북경에서 막 선교활동을 하기 시작한 예수회 선교사 마테오 리치(Matteo Ricci)가 제작해 황제에게 바친 것으로, 지구설(地球說)에 입각해 한 개의 타원으로 전 세계를 그린 단원형의 ‘서구식’ 세계지도였다. 이처럼 중국에서 간행된 서구식 세계지도의 대부분은 사신행에 의해 바로 조선에 전래되었다.  

‘곤여만국전도’와 같은 세계 지도는 중국이 세계의 중심이며, 하늘은 둥글고 땅은 모가 났다는 동북아시아의 전통적인 천문지리관을 붕괴시키기 시작했다. 지구(地球)라는 말도 이렇게 해서 생겨난 것이다.

서구과학의 만남과 학습

중국과의 조공-책봉 관계를 안정적으로 유지해야 하는 제후국 조선으로서는 중원을 새로이 차지하고 패권을 쥔 청(淸)이 1644년에 서구의 역법이라고 일컬어지는 태양력(太陽曆)의 원리를 적용해 만든 ‘시헌력(時憲曆)’을 반포하자 조선도 개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시헌력이 비롯 서양 오랑캐의 역법이지만 중국에서 그 우수성을 인정받은 역법이기 때문이다.

일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시헌력으로의 개역 작업은 꾸준히 추진되었다(전용훈, 2002). 개력 프로젝트를 진행한 지 10년만인 1653년(효종 4년)에 시헌력에 의거해 독자적으로 역서를 편찬했다. 시헌력의 학습과 개력 사업은 비교적 정밀한 서구식 천문관측 기구의 제작 노력으로도 나타났다.

예를 들면, 정조대 김영(金泳)의 주도로 1789년 관상감에서 제작한 적도경위의(赤道經緯儀)를 들 수 있다. 정부 차원에서 서구 지도학과 천문역산학이 적극적으로 유입되었던 것에 비하면 조선 지식인 일반의 서구 과학에 대한 관심과 학습은 상대적으로 적은 편이었다.

그러나 일부 학인들은 서구 과학의 우수성을 인정하고 서구 천문학과 수학 등을 배워 익히려고 노력하기도 했다. 남인계 실학자로 유명한 이익(李瀷)은 그의 백과사전적 에세이집 <성호사설>에서 서구의 과학서적을 읽고 이해한 바를 적으면서 지구설을 사실로 인정했다.

18세기 후반에 활동했던 홍대용, 서호수 등과 19세기 중반의 최한기와 남병철 등의 학인들은 한역(漢譯) 서구 과학 서적들을 읽고 그 내용을 완벽하게 소화했던 인물들이었다. 홍대용은 유명한 지동설과 무한우주론 논의를 펼쳤고, 서호수는 중국에 소개된 서구식 천문학과 수학의 결정판인 <역상고성>과 <수리정온>을 완벽하게 소화해 분석했으며, 최한기는 조선에서는 처음으로 공전을 주장하는 등 뉴턴 역할을 학습하고 재해석하는 모습을 보여 줬다.

남병철은 <의기집설>(1859년)에서 혼천의를 비롯해서 서구식 관측기구인 간평의와 혼개통헌의 등을 분석했다.

서구 천문학의 지구설과 지전설

땅이 둥글다는 지구설(地球說)과 지구가 자전을 한다는 지전설(地轉說)은 17세기 이후 서양과학이 수용하면서 널리 인정되었다. 지구설과 지전설을 조선시대에는 어떻게 수용되기 시작했는가? 지구설에 대한 조선 학인들의 이해로 대표적 인물은 18세기 영·정조대 최고의 천문학자인 서명응(徐命膺)은 서구 천문학의 지구설을 인정할 것을 주장했던 유학자였다.  

그러나 서명응은 땅이 구형일 수 있는 원리를 서구 과학과는 다른 개념적 틀인 상수역학적 체계를 적용해 역설했다. 즉 지구의 형체가 둥근 것은 전설적인 중국의 성인(聖人)들이 ‘주역(周易)’의 괘(卦)를 만드는 데 근원으로 삼았던 ‘하도(河圖)’의 중궁(中宮) 오점에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했다.

서명응의 서구 과학 학습과 재해석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박권수(1998)에서 볼 수 있다. 지전설에 대한 조선 학인들의 이해로 대표적 인물은 18세기 후반의 홍대용이었다. 홍대용은 지구의 회전운동을 주장하면서 기(氣)의 메커니즘에 의해 이를 설명했다.

홍대용은 그의 <의산문답(醫山問答)>(1773년)에서 기의 메커니즘에 기반한 우주 생성의 과정에 대한 논의를 거론하면서, 원형인 지구가 태양계의 중심 부분에서 정지해 있지 않고, 허공 중에서 떠서 하루에 한 바퀴 도는 자전 운동을 하고 만물이 그 지면에 기대어 붙어 있는 근거를 ‘기의 상하지세(上下之勢)에 의한 것’으로 설명했다.

이러한 논리는 성리학적 자연 이해와 전통적인 기의 메커니즘에 의거해 추론해 낸 것이다. 이런 논리는 조선시대의 ‘새로운 과학의 구성’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문중양, 2003). 1860대 최한기(崔漢綺)의 ‘기륜설(氣輪說)’ 또한 전형적인 기의 메커니즘을 적용한 것으로, 기가 항성이나 혜성을 겹겹이 에워싸고 있는 모습을 마치 수레바퀴에 비유해서 표현한 개념이었다.

그는 조석(潮汐) 현상을 설명하면서, 천체들의 운전은 그 주위에 기가 따라 돌면서 ‘피륜(被輪)’을 이룬다는 것이다. 그런데 지구의 피륜과 달의 피륜이 만나는 부분에서 마찰이 일어나는데, 그러한 마찰의 작용에 의해서 조석이 일어난다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기륜의 개념은 그의 <성기운화>(1867년)에서 더 발전되었다. 최한기는 그의 기륜설이 뉴턴의 중력 이론을 규명했다고 생각했다.

문화와 결합한 조선의 과학

17세기 이후 조선의 사대부 학인들은 서구의 과학을 적극적으로 학습하면서도 성리학적 자연 인식 체계를 포기하지 않고, 고전적 자연 인식 체계를 더 발전시키면서 자연에 대한 이해의 폭과 깊이를 더해 갔던 것이다. 조선 후기의 학인들은 지구설과 지전설과 같은 문제를 대면하고 ‘그들의 방식’으로 새로운 과학을 구성해 나간 것이다.

조선 초 이후 19세기 말에 이르기까지 과학이 어떻게 변화했는지 대략적 흐름을 앞에서 살펴봤다. 세종대 눈부신 성취를 이룩했던 조선의 과학은 그 후 임진왜란, 병자호란 등의 외침에 의해 큰 발전은 없었으나, 꾸준히 이어져왔음을 볼 수 있었다. 특히 자연에 대한 체계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자연 이해는 성리학의 성숙과  함께 성장했음을 살펴 봤다.

특히 조선의 사대부 지식인들은 유입되는 서구 과학을 나름대로 학습하고 소화해 갔음을 봤다. 실제로 조선 유학자 대부분은 19세기 말까지도 조선 과학의 패러다임 하에서, 즉 ‘그들의 방식’인 성리학적 자연 인식 체계로 서구 과학을 읽었던 것이다.

그것이 자연스러운 역사의 실제 모습이다. 과학의 발전을 ‘현대과학과 유사한 형태’의 발전으로 본다면 조선시대의 과학의 발전은 별로 크다고 볼 수 없다.

그러나 전문적 자연지식(scientific techniques)만이 과학이 아니라, 다양한 측면의 문화와 사상은 자연 지식과 함께 융합하는 과학 네트워크를 과학으로 본다면 조선시대의 성리학적 자연 인식의 고도화는 그 가치가 있다고 보겠다. 

박성현 미래한국 편집위원· 전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원장
박성현 미래한국 편집위원·
전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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