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업국가 베네치아 vs 패권국가 스페인
상업국가 베네치아 vs 패권국가 스페인
  • 김승욱 중앙대 교수·미래한국 편집위원  
  • 승인 2018.02.06 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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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한 나라와 실패한 나라
대한민국 세우기
나라가 누란의 위기에 처했다는 인식이 각계의 지식인들을 각성시키고 있다. 미래한국은 이에 우리 사회 각 계 전문가들이 집필 편찬한 ‘오래된 새로운 비전’의 주요 논제를 대한민국 바로세우기 각성 운동 차원에서 발췌 소개한다. (편집자 注)


역사에는 수많은 실패한 나라와 성공한 나라가 있다. 실패한 나라는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고, 그 자리를 성공한 나라가 메운다. 작은 나라가 패권국가로 등장하기도 한다. 고대 시대에 이탈리아 반도에서 도시국가 로마가 그랬고, 지중해 세계의 베네치아와 북해의 네덜란드가 그런 나라다.

반면에 수많은 나라가 세계를 호령하다가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져갔다. 중국의 여러 왕조가 그러했고, 고대 시대 말기에 서로마 제국도 그랬다. 오스만 터키, 무굴제국 등 고대와 중세의 여러 제국들이 흥했다가 사라졌다.

15세기 베네치아, 기업가들이 다스리다

오늘날 베네치아는 이탈리아의 한 관광도시에 불과하다. 약 150개의 섬으로 구성되어 180개의 운하, 400여 개의 다리가 있는 특이한 도시이다. 중앙의 마르코광장은 밤만 되면 관광객들로 북적이며 낭만이 흐르는 명소다. 이런 도시 베네치아가 한때 인류 역사상 최고의 번영을 이뤘던 때가 있었다.

‘바다의 도시’ 또는 ‘바다 나라’라고 불렸던 베네치아는 약 17만 명 정도밖에 수용할 수 없는 조그만 섬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럼에도 15세기 중반 이후 서구 기독교 국가들을 위협했던 오스만제국과 200년 동안 일곱 차례에 걸친 큰 전쟁을 치르고도 패하지 않았다.

오스만제국은 1453년에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키고, 당시 서방 세계의 최강대국이었던 신성로마제국의 수도 빈을 한 달 반이나 포위해 공격한 나라였다. 이렇게 막강한 오스만제국에 베네치아는 지중해무역을 빼앗기지 않았다. 그로써 베네치아는 이슬람 세력을 약화시키고 서방세계를 보호하는 데 큰 역할을 감당했다.

특히 베네치아는 동로마제국이 멸망한 이후에 서방세계의 보호자 역할을 자처해서 500년 동안 ‘기독교 세계의 수호자’였고 ‘동부 지중해의 지배자’였다. 이슬람과 지속적으로 관계를 맺은 첫 번째 유럽 강대국이었다. 그래서 베네치아를 ‘유럽과 동방의 두 경제체제를 돌아가게 하는 톱니바퀴’라고 부르기도 하고 ‘세계를 소통케 하는 통역자’라고 부르기도 했다.

작은 나라 베네치아가 어떻게 이렇게 막대한 힘을 발휘했을까?

베네치아는 지역적 특수성 때문에 자급자족할 수 있는 것은 생선과 소금밖에 없어 상업에 전념했다. 중세 유럽은 자급자족적 경제체제 아래 있었으며, 토지를 소유하는 것을 천박한 상업에 종사하는 것보다 더 영광스럽게 생각했던 시대에 베네치아는 육지를 식민지로 삼지 않고 오직 무역에 필요한 거점이 되는 항구, 요새, 섬들만 지배해, 세계 최초로 ‘가상경제(virtual economy)’를 만들어냈다.

과거에 해로는 일종의 고속도로였다. 육로로 몇 달씩 걸리는 거리를 배로는 불과 한두 주일 만에 갈 수 있었다. 그래서 베네치아는 해상 고속도로의 디딤돌이 되고 정보의 감청기지가 되는 아드리아해 입구의 코르푸 섬과 크레타 섬을 사들이고, 모노네와 코로네를 해적들로부터 빼앗았다.

상업과 법치 중시했던 베네치아

베네치아가 성공할 수 있었던 요인은 경제에 관심이 집중된 기업가들이 다스리는 나라였기 때문이다. 이 나라는 기업가들이 운영하는 나라였다. 베네치아에서는 권력의 3대 기구가 모두 상업 규칙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는 집단에 의해서 운영되었다. 이들은 수요와 공급 법칙을 잘 알았고, 소비자 선택의 필요성 또한 잘 이해했다.

안정적인 통화, 상품의 적기 공급, 합리적인 법과 세금제도 등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어, 일관되고 통제된 장기적인 정책을 실시했다. 영국인 셰익스피어는 16세기 말에 가장 천대받고 차별대우를 받는 유대인조차도 계약서 한 장을 근거로 사람의 목숨을 요구할 수 있는 놀라운 사회였다는 것을 <베니스의 상인>을 통해 소개했다.

자본주의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계약 양 당사자간에 동등한 권리가 보장되어야 한다. 안 그러면 소위 말하는 갑질로 인해서 자발적인 거래가 어려워진다. 시오노 나나미는 베네치아의 역사를 다룬 <바다의 도시 이야기>에서 베네치아의 평등한 법치주의는 다른 나라에도 널리 알려져 외국인들도 베네치아에서 재판을 받고 싶어 할 정도였다고 적고 있다.

이런 덕분에 베네치아 금화 두카트는 함유량이 일정하기 때문에 가장 신용 있는 국제통화였으며 멀리 인도에서도 통용되었으며, 파운드화가 세계 통화가 되기 전까지 두카트가 가장 중요한 국제통화였다. ‘은행(bank)’은 15세기 이탈리아의 유대인 강제 거주지역인 게토누보(Ghetto nuovo)에서 탄생했다.

오늘날 은행의 유래는 환전상들이 사용하던 ‘탁자(banco)’라는 이탈리어에서 나온 것이다. 베네치아에서는 고리대금업이 금융업으로 발전되었다. 베네치아는 해상왕국인 만큼 정부의 요직도 상인의 장악 하에 있었는데, 정부는 상인의 활력을 누르지 않으면서도 적절하게 개입해 질서를 유지했다.

‘무다(Muda)’라고 하는 국유 상선단의 정기 항로는 베네치아만이 가진 특수한 제도였다. 이 무다를 통해서 해양무역에 많은 시민이 참여할 수 있었다. 그리고 ‘콜레간차’라는 한정 합자회사를 만들어서 자본을 확보해 위험을 분산하게 했다. 공평한 사법제도의 확립과 집행은 장기 경제성장을 촉진한다는 사실은 오늘날 잘 알려져 있다.

작은 도시국가인 베네치아가 이렇게 중세 말에 놀라운 경제력을 보유할 정도로 발전할 수 있었던 이유는 먼저 법이 공평하고, 개인들 사이의 사적계약이 지켜져, 약속어음이나 환어음 등이 돌고, 더 나아가 각종 효율적인 제도가 발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가 18세기 영국의 산업혁명으로 시작되었다고 하지만, 사실 시장경제를 가능하게 하는 각종 효율적인 제도의 맹아는 이미 16세기 베네치아에서 자라나고 있었다. 성공의 요인을 제도 창출에서 찾았다면 이러한 실패의 원인도 제도로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약탈로 일어선 스페인, 약탈로 몰락하다

스페인이 강대국으로 부상하게 된 것은 결혼, 왕위 세습과 전쟁, 그리고 약탈의 결과였다. 이는 고대 로마나 동방의 제국들과 비슷한 방법으로 강대국이 된 것으로, 앞에서 설명했던 베네치아나 네덜란드 그리고 영국 등이 교역과 산업의 발달로 강대국으로 발전한 것과 대조를 이룬다.

먼저 스페인이 강대국으로 부상하게 된 계기는 1469년에 카스티야 왕국의 이사벨 1세와 아라곤 왕국의 페르난도 2세가 결혼해 이룩한 통일 때문이다. 그런데 이 통일이 후에 스페인 몰락의 원인이 되는 나쁜 제도의 기초가 되었다. 왜냐하면 스페인 국민들은 귀족들의 분쟁에 염증을 느껴 의회기구인 코르테스가 제 기능을 포기하더라도 분쟁이 끝나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통일이 된 이후에 이 의회는 거의 소집되지 않았고, 절대왕정이 형성되었다. 네덜란드와 영국에서는 대의기구가 국왕에 대한 통제권을 확보하는 데 성공했지만, 스페인과 프랑스에서는 그렇지 못했다. 통일 후 이베리아 반도에서 이슬람세력을 완전히 몰아내 레콘키스타(재정복)를 완성했다.

그리고 이사벨과 페르난도의 둘째 딸인 공주 후앙(Joan Juana)이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인 오스트리아의 막시밀리안 1세의 아들인 미남왕 펠리페 1세와 결혼해, 오스트리아와 스페인은 합스부르크 왕가에 의해서 왕조통일을 이룩했다.

16세인 1516년에 왕위를 이어 받은 그들의 아들 카를로스 1세는 스페인 본토, 남부 이탈리아의 시칠리아와 나폴리, 그리고 카스티야왕국과 아메리카 신대륙 식민지, 오스트리아, 부르고뉴공국(현재 네덜란드) 등을 포괄하는 막대한 영토의 스페인이 탄생했다.

1519년에 카를로스 1세는 할아버지로부터 신성로마제국 황제 자리를 이어받아 카를 5세(독일어 Karl V, 또는 샤를 5세)가 되어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의 황제가 되었다. 그와 포르투갈의 마누엘 1세의 딸 이사벨 사이에서 태어난 펠리페 2세는 1556년에 왕위에 올랐는데, 포르투갈의 왕위까지 계승하고, 잉글랜드의 여왕 메리 1세와 결혼하여(1554) 잉글랜드까지 공동으로 통치했다.

이렇게 결혼과 세습으로 대제국을 형성한 스페인은 경제적으로는 잘못된 결정을 계속했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유대인들을 박해했다. 그뿐만 아니라 가장 선진적인 문명을 보유하고 있었던 이슬람 세력을 쫓아냈다.

알람브라 궁전(1323) 등 세련된 이슬람 문화를 이베리아 반도에 꽃피웠던 그라나다(Granada) 왕국의 개종한 후손인 모리스코인들을 1609년에 모두 북아프리카로 추방했다. 무어인과 모리스코인들은 정교한 관개사업을 통해 포도, 베리, 쌀, 설탕 등을 생산했는데, 이들의 추방으로 이베리아반도에서 농업 생산이 크게 줄어들었다.

유럽의 패권자 스페인, 시대 변화를 놓치다

중상주의 시대는 부의 원천을 금·은이라고 생각하는 중금주의(bullionism) 사상이 지배적이었다. 그래서 신대륙의 정복자들은 금과 은을 확보하는 데 열을 올렸다. 이들은 멕시코와 안데스 산에서 많은 금과 은을 가져왔다. 카를로스 1세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를 물려받아 카를 5세가 된 1519년부터 신대륙에서 금은보화가 밀려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의 아들 펠리페 2세는 1556년에 왕위에 올랐다. 펠리페 2세는 1580년에 조카인 포르투갈의 세바스티앙이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서거하자 포르투갈 왕국을 상속하여, 남아메리카, 필리핀, 밀라노공국, 보르네오, 말라카, 아프리카 남서부, 필리핀 등 포르투갈의 식민지들을 속국으로 하여 4개 대륙에 걸친 지상 최대이며 최초의 ‘해가 지지 않는’ 스페인제국을 이룩하여 스페인의 최전성기를 이룩했다.

이렇게 상속과 결혼 그리고 정복으로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을 건설한 스페인의 영광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카를 5세는 신대륙에서 밀려들어오는 금은보화를 믿고, 가톨릭의 수호자로 자처하며 수많은 종교전쟁에 가담했다.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 선언(1517)에 대해서 카를 5세는 가톨릭의 보호자로 자처하면서 종교재판을 열어 개신교도들을 화형에 처하는 등 탄압을 하자 종교전쟁이 시작되었다.

이탈리아 북부 아드리아해 북쪽 해안에 있는 항구 도시 베네치아. 7~8세기 무렵 무역 도시로 발전해 중세 말에는 동지중해지역의 무역을 독점하기도 했다.
이탈리아 북부 아드리아해 북쪽 해안에 있는 항구 도시 베네치아. 7~8세기 무렵 무역 도시로 발전해 중세 말에는 동지중해지역의 무역을 독점하기도 했다.

그의 아들 펠리페 2세는 네덜란드에서 개신교도들이 성당과 성물을 우상이라고 파괴하자 1567년에 2만 명에 달하는 정예병을 파병하여 칼뱅파 목사 등 약 2000명을 처형했다. 이로 인해 네덜란드에서 반발이 심해졌다. 막스 베버의 추계에 의하면 스페인은 국가 수입의 70퍼센트를 전쟁으로 낭비했다.

카를 5세는 신대륙에서 들어온 세금(3005만 두카트)보다 더 많은 금액의 빚을 아들 펠리페 2세에게 물려줬다. 이 빚은 스페인의 연간 총 세입의 다섯 배가 되어, 1543년에는 경상수입의 65퍼센트가 이자로 지불되기도 했다. 그래서 펠리페 2세는 즉위한 다음 해에 파산을 선언했다.

그는 차입금을 장기공채로 전환한다고 선언하고 재정위기를 모면하려고 했다. 이로 인해 푸커가 등 남부 독일의 금융가들이 몰락했다. 그 후 스페인은 1575년과 1576년에 파산을 선언했고, 그 뒤로도 1607년, 1627년, 1647년 등 20년마다 한 번 꼴로 채무불이행을 선언했다.

왕만 그런 것이 아니라 스페인 사회 전체의 노동윤리가 땅에 떨어졌다. 스스로 일하여 생계를 버는 것을 굴욕으로 생각했고 차라리 헐벗음과 비참함을 택할 정도로 상업적 본능과 노동의욕을 잃어버려 부의 저주가 임했다. 반면에 프랑스 노동자들이 피레네 산맥을 넘어와 일을 독차지해서 스페인의 금은보화는 프랑스인들이 차지했다. 스페인 본토는 제국 소득의 10분의 1밖에 생산하지 않았다.

세금, 세금, 세금…

스페인 국왕의 중요한 세입원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세 가지였다. 첫째는 앞에서 언급한 신세계에서 들어오는 귀금속이다. 둘째는 저지대 국가 즉 네덜란드나 기타 식민에서 들어오는 세금이었다. 그리고 셋째는 양목업자 길드에서 거둬들이는 세금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지역은 저지대 국가에서 들어오는 수입이었다.

이 지역에서 들어오는 세입은 다른 지역들보다 약 10배 이상 큰 비중을 차지했다. 네덜란드의 개신교도들을 진압한 알바 공작은 네덜란드 국민들에게 매우 과중한 세금을 부과했는데, 특히 10퍼센트의 거래세는 반발이 심했다. 당시 네덜란드 상인들은 유통에 종사하는 인구가 많았기 때문에 더 반발이 심했다.

양목업자에게서 세금을 거두게 된 것은 보다 쉬운 징세 방법을 찾아 나서게 된 결과였다. 당시에는 세금을 거두는 것이 어려웠기 때문에, 세금을 쉽게 거두는 방법을 고안했다. 그 방법의 하나로 프랑스에서는 징세청부업자를 두었는데, 스페인에서는 세금을 걷기 쉬운 세원을 확보하는 방법을 선택했다.

스페인에서 목양업이 그랑디(grandees: 대공)라고 불리는 24개의 대토지 소유 가문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13세기에 이들의 길드인 메스타(Mesta)에게 독점권을 부여하고 세금을 거두는 것이 농부들에게 조세를 매기는 것보다 훨씬 쉬웠다. 이슬람 교도들이 추방된 이후에 거대한 면적의 농지가 휴경지가 되었다.

메스타는 이 지역이 겨울 방목에 적격이라고 판단하고 왕에게서 이 지역에서 방목할 특권을 매입했다. 스페인도 모직물 공업이 발달했는데, 여름을 북부의 고지대에서 보내고, 겨울을 남부의 저지대에서 보내는 식으로 양치기 패턴이 형성되었다. 신대륙에서 들어오던 금과 은이 다 소진되고, 네덜란드의 식민지가 독립하면서 제국으로 들어오는 수입이 줄어들자, 메스타에서 들어오는 수입이 중요한 세원이 되었다.

1723년에 메스타는 왕실에 상당액을 납부하고 가축이 이동 중에 농산물에 피해를 주더라도 그 피해를 보상해주지 않아도 되는 권리를 획득했다. 게다가 메스타는 방목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공유지에 대한 울타리설치(인클로저)를 금지시켰다. 목축을 위해 이동하면서 양들은 주변의 목초지를 황폐화시켰다.

이에 그치지 않고 목동들은 목초지를 확보하기 위해 나무를 태웠고, 이는 광대한 토양 침식을 야기했다. 이로 인해 스페인에서는 농업이 피폐하게 되었다. 메스타를 통한 조세는 국왕의 입장에서는 조세를 안정적으로 거둘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지만 농업을 위기에 빠뜨려, 장기적으로는 경제 전체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영국에서는 인클로저를 통해 토지의 사적소유제가 확산되면서 토지를 더 효율적으로 활용했던 것에 반해서 스페인에서는 효율적인 토지소유권이 도입되지 못했다. 게다가 스페인 왕실은 국내나 해외에서 정복을 통해 얻은 광대한 토지를 공신들에게 보상으로 하사했는데, 그 토지는 상속은 가능했지만, 매각은 할 수 없게 했다.

그 결과 거대한 영지를 수세기 동안 묵혀두고 효율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사람에게 팔지도 못하게 되었다. 막대한 빚을 상속한 펠리페 2세는 귀족의 작위도 팔고, 상인들이 해외에서 송금 받은 은을 몰수하고 국채인 유로스(juros)로 보상한 후에 지급정지를 남발했다.

이로써 스페인의 상인공동체가 왕에게 등을 돌리고 왕실에 물품을 납품하던 상업체계가 몰락했다. 그리고 성직자와 귀족, 군인들에게 세금을 면제하자 더 많은 사람이 성직과 작위를 매입하게 되고, 이로 인해 세원이 줄어들게 되었다. 세율을 더 높여 농부나 상인들은 인센티브가 없어졌다.

사람들은 학생이나 수도사, 거지 또는 군인이나 관료 외에는 할 것이 없었다. 스페인은 재정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가격통제, 조세인상, 그리고 몰수를 반복했다. 그리고 왕은 저급한 동전을 주조했지만, 아무도 그것을 신뢰하지 않았다. 이렇게 왕의 반복적인 채무불이행, 화폐 악주(惡鑄)로 인해 이자율이 올라 스페인의 이자율은 10퍼센트가 넘었다.

왕은 부채에 대해서 40퍼센트의 이자를 지급했기 때문에 민간부문으로 흘러들어갈 자본이 없었다. 당시 네덜란드에서는 3퍼센트에 돈을 빌릴 수 있었던 것에 비하면 스페인은 이자율이 너무 높아 기업을 영위할 수 없었다.

개혁을 거부했던 국왕

게다가 스페인의 종교재판소는 교황의 감독에서 독립해서 스스로 재원을 조달할 정도의 힘을 가진 강력한 관료 기구가 되었다. 종교재판소는 유대인과 이슬람교, 프로테스탄트들을 공격했으며, 후에는 계몽주의 철학자나 과학자들도 비판했다. 그리하여 스페인에서는 17세기에 과학적 합리주의가 확산되지 못했다.

그리고 지리적으로 스페인은 불모의 산악지형이 많아 수로교통이 거의 불가능했다. 섬나라이며 내륙 깊숙이 발달된 하천으로 인해 수송에 어려움이 없었던 영국과는 달리 스페인은 지리적으로 수송에 매우 불리한 입장이었다. 그런데 펠리페 2세는 내륙 한복판에 있는 마드리드(Madrid)로 수도를 이전했기 때문에 마드리드에서 대서양 연안의 리스본을 이어주는 타구스(Tagus) 강에 수송을 의지했다.

새로운 수도 마드리드로 물자를 운송하기 위해 이 타구스 강을 준설했는데, 후에 이 강의 깊이가 낮아져 항해할 수 없을 정도가 되어도 성직자들은 이 운하 프로젝트를 거부했다. 스페인 사람들은 노새와 좁은 도로를 선호했으며, 신대륙 식민지에서도 이러한 운송 수단을 사용했다.

이렇게 스페인에서는 왕과 교회의 잘못된 판단으로 인해 최악의 결정을 연속해서 내림으로써 시장경제와는 매우 먼 길을 걸어갔다. 이러한 비효율적인 제도들로 인해 스페인은 쇠퇴하리라는 것을 국왕과 관료조직이 자각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경로의 방향을 바꿀 수 없었다.

17세기 한 세기만에 스페인은 서구세계에서 로마제국 이래 가장 강력한 국가에서 2류 국가로 쇠퇴했다. 스페인 의회기구 코르테스가 각종 개혁을 시도했지만, 왕이 번번이 그것을 폐지시켰다. 1930년까지도 스페인에서는 인구의 0.1퍼센트에 불과한 지주가 농지의 3분의 1을 소유했고, 4퍼센트의 지주가 농지의 3분의 2를 소유했다. 

김승욱 중앙대 교수·미래한국 편집위원  
김승욱 중앙대 교수·미래한국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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