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없는 대한민국은 노예의 길”
“자유없는 대한민국은 노예의 길”
  • 조희문 미래한국 편집장
  • 승인 2018.02.23 1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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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수 이승만기념사업회 상임고문 인터뷰

정리 : 박주연  미래한국 기자 / 사진 : 백요셉 미래한국 기자

- 근황이 어떠십니까. 건강관리는 어떻게 하고 계신지요.

내세울 것은 없고, 담배와 술을 안 해요. 담배는 중학교 때 친구 둘과 셋이서 친구 집에서 했는데, 맛을 모르겠어요. 한 가치 피우고 나서 졸업했어요. 술은 군대 생활하면서도 술자리가 있으면 대접 하나 상 밑에 두고 쪼르르 따라 내고는 술 안 마셨어요. 간식 먹지 않고 식사를 세끼 시간 맞춰 규칙적으로 합니다. 하와이에서도 어머니(프란치스카 여사)가 아침 8시, 12시, 6시 딱딱 맞추셨지요.

- 요새 시국을 어떻게 보십니까.

(문재인 대통령을 지칭) 대통령이 됐으면 열심히 공부해야 하는데, 보니까 공부 하나도 안 했습니다. 80년대 운동권 머리 그대로더군요. 참 걱정입니다. 잘못하다간 북한에 결재 받고 돈 갖다 주고...미국이 어떻게 보겠어요?

- 평창에 오는 펜스 부통령이 오토 웜비어의 아버지인 프레드 웜비어 씨를 평창 개막식 행사에 동행한다고 합니다. 문재인 정부는 북한인권 문제는 가능한 감추고 싶어할 텐데, 트럼프 정부는 지난 번 연두교서에서도 탈북자들을 내세워 북한인권 문제를 조명하는 것 같습니다.

이번에 평창에 태극기를 깔았으면 좋겠어요. 평양 올림픽이 될 바에는 이쪽에서 더 적극적으로 나갔으면 해요. 우리가 북한을 상전으로 모시니 얼마나 기가 막힙니까. 보수를 불태우겠다는 말 봐요. 야당은 뭐하는지 모르겠어요. 젊은 2030이 사람들이 깨어나면 좋겠어요.

- 젊은 친구들은 좌나 우나 다 다루기 힘든 세대로, 이들에게는 이념이 중요한 것 같지 않아 보입니다. 자신들 이해관계에 민감해 보입니다.

젊은 세대가 도덕이나 지성의 힘으로 바로 서는 게 아니라 ‘기분 나쁘다’는 감성적으로 흐르고 있는 것 같아 걱정입니다. 데이비드 흄이 이야기했듯, 인간에겐 지성과 감성이 있는데, 불행하게도 인간의 지성은 감성의 노예라고 했지요. 감성을 자극하면 아무리 좋은 이론도 안 먹힙니다.

진실을 보여줘도 보지 않으려고 해요. 보여주는 사람을 오히려 나쁜 사람으로 봅니다. 참 문제예요. 요즘 젊은 아이들은 책을 안 읽고 한자를 모르니 생각하는 것이 유치하지요. 해방된 후 중학교 때서야 제가 ‘가갸거겨’ 한글을 배웠습니다. 요새 아이들이 흙수저라고 자기 처지들을 비관하던데, 제가 학생 때를 생각해보면 요새 아이들의 문제는 문제도 아니지요.

기차도 맨 날 늦고, 고장 나고, 어느 날은 학교 간다고 나가 기차 기다리다 지쳐 그냥 돌아오기도 했고요. 요새는 얼마나 호강이에요. 세상 삶이 다 그런 것이지요. 너무 불평하지 말고 고생을 달게 생각했으면 좋겠어요.

- 2030 젊은 층 말씀하셨지만, 전교조 교육 문제가 큽니다. 이념이 깊지 않아 학교에서 가르쳐 주는 대로 배우거든요.

젊은 사람들한테 자꾸 이야기하고 싶은데, 어느 나라든지 청년이 살아 있어야 장래가 있다는 말이에요. 청년이 죽으면 나라가 끝나는 거예요. 우리나라 청년들이 자꾸 금수저, 흙수저 이야기나 하고, 소위 거저 먹으려 해선 안 돼요.

그 나라가 어떻게 될지는 국민이 어떤지 보면 알아요. 얼마나 근면하고 성실하고 정직한지 세 가지만 보면 알지요. 저는 하와이에서 아버님을 모시면서, 한국인으로서 완전히 자존심을 회복했어요. 사람들이 이승만 대통령을 너무 몰라요. 우리나라 보수 진보 이야기를 할 때 문제가 커요.

이인수 이승만기념사업회 상임고문
이인수 이승만기념사업회 상임고문

보통 보수 진보 이야기를 하면, 공산주의를 언급하지 않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해방 직후에 공산주의를 진보적 민주주의라고 했어요. 진보주의자는 공산주의자예요. 진보 애들이 진보라는 걸 독점해서 지금은 진보가 공산주의인 걸 모른단 말이죠. 모순이 뭐냐면, 이 세상에서 보수 아닌 사람이 없고, 진보 아닌 사람이 없어요.

이걸 왜 가리느냐, 공산주의자들이 자기들을 정당화하기 위해서예요. 젊은애들한테 너는 보수냐, 진보냐 물으면 진보다 그러죠? 그럼 ‘네가 얘기하는 진보와 공산주의가 뭐가 다르냐’고 물으면 대답을 못해요. 그런데 야당이나 우리나라 지식계가 왜 가만 있냐 말이에요. 점점 더 심해지고 있어요.

- 그 말씀도 결국 교육과 연결되는 것 같습니다.

요새 젊은이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고생을 왜 두려워하냐 이거예요. 일정 말, 해방 직후, 6·25사변을 쭉 통해서 생각해보니, 내가 어떻게 그런 고생을 이겼는가, 돌이켜보면 감사한 것은 그때 그 고생을 했기 때문에 옛날 일에 대해 내 자신이 떳떳할 수 있다는 겁니다.

일본 말에 ‘힘든 고생이 너를 옥으로 만든다’는 말이 있어요. 고생을 마다 않는 정신을 강조한 것이지요. 일본이 무서울 정도로 교육을 참 잘해요.

“이승만은 국가를 가다듬은 목수”

- 정권이 바뀌면서 대한민국이 풍전등화의 처지가 아니냐고 걱정하는 분들이 늘고 있습니다.

극으로 가면 결국 반동이 옵니다. 대한민국 건국과 관련해 말씀드릴 것은, 건국이 상해 임시정부라고 하는데, 이 문제는 너무나 분명한 거예요. 이승만 대통령이 구한말에 대한제국에서 의관을 했어요. 감옥에 가기 전 한 달쯤이지만 배재학당에서 공부하시고, 이 분이 워낙 한문 실력이 있었지요.

구국운동을 하다 결국 감옥에 가게 되는데, 그 안에서 영어 공부하시고, 이 실력을 가지고 외교 하러 가시잖아요?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도 만나셨어요. 세계 명문대학을 졸업하셨어요. 나라를 뺏기자 국내에 들어오셔서 YMCA 학감으로 계시다가 1912년 다시 미국에 가셨죠.

그래서 33년 동안 독립운동을 하시거든요. 내셔널 빌딩이라는 것은 하나의 목수와 같다는 얘기죠. 이 분이 목수예요. 목수 일을 잘 하세요. 6·25 때 일이에요. 제주도 훈련소에 시찰을 가면 문이 고장 나 쥐가 들락날락거려요. 그럼 연장을 가져오라 해서 고치셨어요. 이 목수님은 대목수였죠.

대한민국은 이승만 박사라는 그야말로 대목수가 지은 거예요. 이승만 박사를 보면 대한민국 건국이 나오는 것이지요. 평범하면서도 집을 짓는 수를 다 가지고 있었어요. 국민 교육부터 시작해서 말이지요.

해방 후 돌아오셔서 이 분이 자유민주주의에 대해 뭐라고 말씀하셨냐 하면요, 사람이나 자연이나 만물은 자유를 원한다고 하셨습니다. 특히 인간은 자유가 있어야 창의가 발휘된다고 하셨지요. 자유를 뺏기면 안 된다고 하셨어요.

- 이승만 대통령의 건국정신도 결국 자유대한민국을 세우겠다는 것으로 봐야 하겠습니다.

아버님이 하와이 계실 때 교민들에게 유언처럼 하신 말씀이 있어요. 성서 갈라디아서 5장 1절에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굳세게 서서 다시는 노예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하셨는데, 이게 우리 민족을 위해 하신 말씀이라고 하셨습니다.

감옥에서도 아버님의 첫 번째 기도가 ‘하나님, 제 영혼을 구해주시고, 우리나라를 구해주십시오(save my soul, save my country)’ 였어요. 아버님은 일생 동안 기독교인으로서 늘 기도하셨어요. 조국에서 쫓겨나듯 나와 계신 분이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고, ‘이제는 내 심신이 허약해져 더 이상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게 됐습니다.

이제 우리 한국, 하나님께서 보호해 주시옵소서, 축복해주시옵소서’ 이러셨는데, 눈물이 났습니다. (이인수 박사 옆에서 듣고 있던 조혜자 여사가 답변을 이어갔다) 또 어머님이 말씀해주셨는데요, (아버님이) 6·25 때 낙동강까지 밀려갔을 때도 ‘하나님이 우리 편에 계시는데 무엇이 두려우냐’ 그러셨다고 해요.

많은 어려움이 생겨도 꼭 기도하셨습니다. 또 하나 말씀드리고 싶은 건, 해방되고 1945년 10월 16일 돌아와 국민에게 하신 말씀이에요. 그때 공산당이 ‘너는 친일파’ ‘너는 누구’ 이렇게 낙인찍고 있을 때였습니다. 아버님은 우리 민족이 과거 어두움에 묻혔던 이유에 대해 첫째 우리가 불문했기 때문이라고 하세요.

자기 반성을 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당신께서는 특히 ‘나와 같이 나이 많이 먹은 사람의 죄가 크다’고 하셨어요. ‘그 죄를 내가 지겠다. 여러분은 나보다 나이가 적으니 나보다 죄가 덜하다’ 그러셨어요.

우리가 잘해서 나라를 빼앗기지 않았다면 왜 당신들이 친일파가 되었겠느냐 이러신 거죠. 그 죄를 내가 지겠다... 그런 분한테, 지금 우리 사회가 친일파니 뭐니 하니 얼마나 아휴... 이 분이 그런 분이었기 때문에 지도자로서 한국인으로서 건국 대통령이 되신 것이 아닌가 싶어요.

진정한 광복은 1948년 헌법 공포로 완성 -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는 8·15 ‘광복’과 ‘건국’의 의미가 혼동되고 있고, 그나마 건국의 시점에 대한 논란도 커지고 있습니다. 일제에서 해방된 후 처음에는 해방기념일이라고 했지 광복절이라는 말을 쓰지 않았습니다.

일제로부터 해방된 것을 광복(光復)이라고 하지만 광복은 단순한 민족 해방이라는 개념보다 독립의 성취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영토, 국민, 주권 이 세 가지를 갖추고 독립을 해야 광복이죠. 이승만 박사는 일제에서 해방된 것도 의미가 있다고 보셨지만 진정한 광복은 독립국가가 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1919년 상해임시정부를 건국의 출발로 얘기하자는 주장이 있지만 그 당시는 국권을 강탈당한 상태로 독립국가로서의 요소는 없었죠. 영토, 국민이 없기 때문이죠. 이런 의미에서 1945년 해방도 진정한 광복은 아닙니다.

1943년 11월 27일 미·영·중의 카이로선언으로 장차 한국을 독립시키기로 결의했지만 1945년 2월 11일 미·소·영이 얄타협정에서 한국을 미·소·영·중 네 나라의 신탁통치 대상국으로 비밀히 결정했습니다.

1945년 일제로부터 해방과 동시에 국제간에 밀약된 신탁통치 대상국이 된 것이니 이런 점에서 광복이 아니죠. 따라서 진정한 광복은 국권이 온전히 회복돼 독립을 이룬 1948년 8월 15일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렇더라도 1945년 8월 15일 일제에서 해방된 것이 소홀하게 취급돼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한 이 박사는 1948년 5월 31일 제헌국회 의장으로서 헌법 제정을 서둘러 7월 17일에 헌법을 공포하고 8월 15일에 정부 수립이 가능하게 했습니다. 일제의 해방도 기념하고 독립도 기념하기 위해서죠.

이에 애초에 8월 15일은 첫째 광복절이 민족이 해방된 날, 둘째 건국운동을 해서 독립국가를 완성해 국제적으로 인정받게 한 날 두 가지 의미를 가졌습니다. 그러던 것이 이승만 박사 하야 후 독립국가 즉 건국으로서의 광복의 의미는 무시되고 말았죠.

- 상해임시정부와 한성임시정부의 차이를 말씀해주신다면

1919년 3월 1일에 일어난 3·1운동 이후 국내외에서 3개의 임시정부가 출범했습니다. 노령(露領·블라디보스토크)에서 3월 17일, 상해에서 4월 11일, 한성(서울)에서 4월 23일 선포됐습니다.

상해 임시정부는 이동녕, 이시영 등 독립운동가들이었고 노령에서는 손병희를 대통령으로, 이승만을 국무총리로 출범했죠. 4월 23일 서울에서는 13도 대표들이 모여 국민대회를 열고 국체를 민주제로 하고 이승만을 집정관총재로, 이동휘를 국무총리로 하는 임시정부가 선포됐어요.

이화장 거실에 있는 이승만 대통령 초상
이화장 거실에 있는 이승만 대통령 초상

이를 한성임시정부라고 합니다. 한성임시정부는 이승만 집정관총재가 미국,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일본 등의 정부와 파리강화회의 의장에게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수립과 이 정부가 대한제국의 외교관계를 승계하는 한민족의 정통 정부임을 통보했죠. 이 공문에서 처음으로 영문 국가명칭 ‘Republic of Korea’를 사용했어요.

8월 25일 워싱턴DC에 구미위원부를 설치하고 9월 1일 독립공채를 발행했습니다. 이후 9월 6일 한성임시정부의 정통성을 존중해 상해에서 세 임시정부를 통합한 새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출범했습니다.

서울은 일제 치하에서 활동할 수 없고 노령은 북쪽에 있어 교통이 불편하고 상해의 프랑스 조계가 독립운동을 하기에 좋았기 때문이죠. 여기서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선출했는데 서울에서 국민대회와 13도 대표에 의해 수립된 민주 방식을 중시한 까닭입니다.

- 1945년 8·15 해방 후 이승만 박사의 건국운동의 주요 내용은 무엇이었습니까.  

해방 직후는 남북한을 막론하고 좌익 세상이었습니다. 1945년 8월 8일 소련이 일본에 선전포고하고 소련군이 8월 13일 북한의 청진에 들어왔습니다. 북한을 점령한 소련군은 인민위원회를 조직했고 9월 20일 스탈린의 비밀 지시로 북한 공산화와 공산 정권의 수립을 추진하기 시작했습니다.

일본 총독은 북한에 소련군이 들어온 것을 보고 남한까지 소련군이 들어와 공산화될 것으로 알았습니다. 처음에는 우익 지도자 송진우에게 일본인의 생명과 재산 보호를 요청했다 거절당하자 여운형에게 제의해 수락을 얻습니다.

여운형은 일본 총독으로부터 당시 일본돈 2000만 엔을 받아 박헌영과 손을 잡고 전국에 치안대를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소련군이 들어오지 않고 38선을 기준으로 이북에는 소련군이, 이남에는 미군이 일본군의 무장 해제를 위해 진군한다는 것이 알려졌습니다.

미군 상륙 이틀 전인 1945년 9월 6일 여운형이 조선인민공화국을 선포했는데 이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부정하는 것이었습니다. 주석에 미국에 있는 이승만 박사를 추대하고 자신은 부주석이 됐습니다.

워싱턴에서 해방을 맞은 이승만 박사는 곧 귀국하려 했으나 임시정부의 승인을 요청하고 소련의 한반도에 대한 팽창정책을 경고해와 이에 대한 의견이 다른 미 국무부가 허락하지 않아 두 달이 지나서야 33년 만에 조국 땅을 밟을 수 있었습니다.

조선인민공화국 주석 취임을 거절하고 정당사회단체를 통합한 독립촉성중앙협의회를 결성해 11월 4일에는 ‘연합국에 대한 우리의 결의문’을 발송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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