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 자화상의 비밀...예술가가 세상에 내놓은 얼굴
[신간] 자화상의 비밀...예술가가 세상에 내놓은 얼굴
  • 김민성 미래한국 기자
  • 승인 2018.02.28 0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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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로라 커밍은 미술평론가. 『리스너』 『뉴스테이츠먼』 『리터러리 리뷰』의 편집자, BBC 라디오3의 간판 격 예술 문화 프로그램 「나이트웨이브스」의 진행자로 일했다. 1999년부터 영국의 시사주간지 『옵서버』의 미술평론가로 활약 중이다.

커밍의 첫 책인 『자화상의 비밀』은 출간된 그해 영국 유수 언론에서 뽑은 ‘올해의 책’에 선정되는 등 호평을 받았다. 2016년에는 분실된 벨라스케스 초상화의 행방을 추적하는 『사라진 남자―벨라스케스를 찾아서(The Vanishing Man: In pursuit of Velazquez)』를 펴내 역시 호평을 받았다.

1905년 어느 겨울, 뮌헨 알테피나코테크 미술관 경비는 순찰하다가 이상한 점을 발견한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자화상인 알브레히트 뒤러의 1500년 작 「자화상」의 양쪽 눈이 날카로운 도구로 손상돼 있었던 것이다. 그 결과 형형한 빛을 내뿜던 뒤러의 오른쪽 눈은 흐릿해졌고 왼쪽 눈은 생기를 잃었다(현재는 복원돼 있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여전히 흠집을 발견할 수 있다). 뒤러의 눈에 손상을 가한, 잡히지 않은 이 범인은 왜 이런 일을 벌인 것일까? 

뒤러의 이 자화상은 오랜 시간 동안 숭배의 대상이자 반감의 대상이었다. 무엇보다 이 자화상이 엄청나게 강렬한 존재감으로 관람자의 시선을 잡아끌기 때문일 것이다. 뒤러 자화상의 훼손은 다소 극단적인 예이긴 하지만, 모든 자화상은 분명 관람자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초상화와 달리 자화상이 현실에 존재했던 화가 자신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초상화가 실제 인물의 모습을 반영하고 있는 것에서 더 나아가, 자화상은 화가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 일어나는 일까지 (화가가 의도했든 그렇지 않았든 간에) 드러낸다. 

자화상은 화가와 그림의 결합이다. 아무리 못 그렸어도, 아무리 간략하고 서투르게 그려졌어도, 모든 초상화는 이미지로 전환되기 전의 실제 인물과 마주하는 것 같은 느낌을 담고 있다. 자화상은 거기서 더 나아가 그 둘, 즉 인물과 이미지가 하나이며 동일하다고 천명한다. 자화상을 두고는 ‘작품과 그것을 낳은 작가는 별개’라는 말을 쉽게 할 수가 없다. 자기 자신을 그리면서 예술가들은 그들의 외양보다 훨씬 깊은 무언가를 드러낸다. 세상이 자신을 바라봐주기를 바라는 방법, 그들 스스로 드러내고자 했던 자신의 모습에 관한 진실을 말이다. 지은이는 학계의 딱딱한 이론 틀이나 전문용어에 빠지지 않고, 문학·시·영화 등 다양한 이야기를 끌어와 쉽고 문학적으로 자화상의 비밀을 풀어내고 있다. 

화가는 왜 자화상을 그렸을까? 

풍성한 도판으로 채워졌을 뿐 아니라 유려하게 쓰인 이 책에서, 『옵서버』의 미술비평가 로라 커밍은 뒤러부터 렘브란트까지, 또 벨라스케스에서 반 고흐와 뭉크, 워홀 그리고 신디 셔먼 등 현재에 이르기까지 자화상에서 펼쳐지는 드라마를 탐색한다. 지은이는 왜 자화상이 시선을 끄는지 그리고 화가들이 자신에 대해 생각하는 가장 내밀한 모습을 자화상이 어떻게 드러내는지, 거기에 더해 자화상이 실제 삶에서 우리의 행동을 어떻게 모방하는지에 대해서 숙고한다. 

화가들은 왜 자화상을 그렸을까. 이유는 다양하다. 때로는 자신의 실력을 후원자나 잠재 고객에게 알리기 위한 광고의 용도로, 때로는 고백이나 러브레터로, 때로는 분노와 항의를 표출하기 위한 수단으로, 심지어 때로는 ‘자살 노트’의 목적으로 제작되기도 했다. 독일 태생의 펠릭스 누스바움은 가슴에 유대인임을 뜻하는 노란별을 달고 있는 자화상을 그렸는데, 이 그림을 그렸을 무렵 그는 유대인임을 숨기고 도망 중이었기에 그는 실제로 별을 달았던 적은 없었다. 따라서 이 그림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일종의 고백이었던 셈이다. 또 초상화가로 이름 높은 조슈아 레이놀즈는 화가로서 자부심을 드러내거나 스스로를 홍보하려는 목적으로 많은 자화상을 제작했다. 그런가 하면 17세기 이탈리아 화가 크리스토파노 알로리는 연인에게 버림받자 성경의 이야기를 가져와 연인을 비난했다. 적장 홀로페르네스의 머리를 자른 여인 유디트를 연인의 얼굴로, 그녀가 들고 있는 잘린 머리는 바로 알로리 자신의 얼굴로 그린 것이다. 사랑과 감사의 뜻으로 자화상을 그린 경우도 찾을 수 있다. 17세기 스페인의 화가 무리요는 아버지의 모습을 영원히 간직하고 싶다는 아이들의 요청에 따라 자화상을 그렸고, 고야는 자신을 살려준 의사 아리에타에게 감사하는 뜻에서 자신의 몸을 받치고 컵을 입에 대주고 있는 의사의 모습을 그렸다. 

이 모든 제작의도를 지은이는 한마디로 정리한다. 화가가 자신에 대해 숙고하고 그것을 세상에 이야기하고자 할 때, 즉 세상을 향해 화가가 무언가 얘기할 필요나 요구가 있을 때 제작된다는 것이다. 이 책의 원제인 ‘세상을 향한 얼굴(A Face to the World)’은 바로 그런 뜻을 담은 것이다. 

세상을 향해 매번 변화하는 ‘얼굴’을 만들어내야 하는 것은 자화상을 그린 화가들에게만 해당되는 일은 아니다. 실은 이것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매일매일 하는 일이다. 회사에서의 얼굴, 애인을 대할 때의 얼굴, 가족을 대할 때의 얼굴, 혼자 있을 때의 좀 더 편안한 얼굴이 모두 다를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우리는 자화상을 보면서 그것을 그렸을 때 화가가 처했던 상황을 상상하며 자신의 경우에 대입해볼 수 있고, 자화상을 보면서 마치 화가 그 자신을 마주하고 있는 것처럼 느낄 수 있다. 

사람들의 얼굴 구경하려고 합승마차 타는 것을 즐겼다는 인상파 화가 에드가르 드가는 “서로를 바라보기 위해 태어난 것, 그것이 인간 아닌가?”라고 했다. 다른 이의 얼굴을 보고 싶어하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다. 다른 사람이라는 존재는 본질적으로 타인이자 동시에 나를 비추는 거울이기 때문이다. 이 책에 실린 자화상들을 보면서 독자들은 화가가 세상에 보이고자 선택했던 그들의 얼굴을 볼 수 있고, 거기서 또 다시 자신의 얼굴을 비춰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럼으로써 그림과, 더 나아가 화가와 내밀한 대화를 나누는 경험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은 자화상에 대한 하나의 종합 정리된 이론을 제시하는 것은 아니다. 실은 그것은 불가능한 미션일지도 모른다. 자화상이라는 장르가 가진 면면은 그만큼 다종다양하기 때문이다. 자화상을 다양한 주제를 통해 다각적으로 바라보고 있는 이 책은, 느슨하지만 연대기적으로 구성돼 있기도 하다. 각각의 장은 묶인 주제에 따라 독립적이지만, 반에이크에서 시작해 신디 셔먼의 사진 같은 현대의 자화상까지 다룬 다음, 다시 16세기 후반 이탈리아 화가 안니발레 카라치의 시적인 자화상으로 돌아가 끝을 맺는다. 그러는 중에 지은이는 자화상에 대한 여러 의문을 제기하고 정보를 전하며 자화상이라는 매혹적인 장르를 찬미한다. 지은이의 서술을 따라가면서 독자들은 자화상이라는 하나의 단어로 묶일 수 있는 그림들의 면면이 얼마나 다양하고 풍부한지 느낄 수 있을 것이다. 

1장. 비밀 

반에이크는 「참사회원 헤오르흐 판 데르 파엘레와 함께 있는 마돈나와 아기예수」에서 성 조지가 입은 청동 갑옷에 희미하게 자신의 반영체를 그려넣는다. 미술사가들은 이 이미지가 ‘자화상’이라는 것을 좀체 인정하지 않는다. ‘증거’가 불충분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지은이는 「아르놀피니 초상」의 뒤편 거울에 비친 남자의 초상까지 면밀하게 살펴보며 이 작은 이미지들이 화가가 바라본 세계와 그림을 연결하는 매개체로서 형이상학적 깊이를 지닌 자화상임을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2장. 눈 

자화상의 ‘시선’을 집중적으로 다룬다. 관람자들은 초상화나 자화상을 볼 때 그림 속 인물이 바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고 착각하게 되기 쉽다. 이것은 실은 화가들의 의도이기도 했다. 눈을 어떻게 표현해내는가, 또 얼마나 잘 표현해내느냐에 자화상의 성패가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자코포 틴토레토가 젊은 시절 그린 자화상은 그 강렬한 눈빛으로 관람자의 시선을 잡아끈다. 반대로 시선 처리에 미숙해서 실패해버린 자화상도 있다. 스위스 태생의 화가 안톤 그라프의 자화상이 그런 예다. 그 외에도 눈을 통해 다양한 표정을 연기해낸 렘브란트, 한쪽 눈만을 드러낸 채 눈썹을 추어올려 관람자들과 비밀 대화를 시도하는 리피(바로 이 책의 표지를 장식한 인물이다), 꼭 감은 눈으로 내면의 풍경을 드러내는 클레의 자화상도 소개된다. 

3장. 뒤러 

이 장은 온전히 뒤러의 자화상에 할애된다. 그중에서도 중심에 있는 것은 지은이가 “자화상의 알파요 오메가”라고 표현한 1500년 작 자화상이다. 이것은 마치 예수와 같은 도상으로, 그림이 그려진 이래 엄청난 애정을 받아왔고 심지어 분노나 혐오를 이끌어내기도 한 자화상의 대표 격인 작품이다. 완벽한 정면상인 이 자화상은 불가사의한 분위기를 뿜어낸다. 지은이는 뒤러가 열세 살 때 그린 자화상부터 이 1500년 작 자화상까지 짚어가며 그 불가사의함의 정체를 탐색해보고자 하지만, 이 위대한 그림은 여전히 신비로움을 간직하고 있다. 

4장. 모티프, 수단, 기회 

화가들은 왜 자화상을 그릴까? 이 장은 화가들이 자화상을 그린 다양한 이유들을 다룬다. 초상화는 그려진 이유가 명확하다. 적어도 누군가가 초상화 속 인물이 그려지기를 바랐고 그에 대한 대가를 화가에게 지불했기에 그려진 것이다. 하지만 자화상은 그렇지 않다. 때로 화가들은 자신의 의지에 반해 자화상을 그리기도 했다. 푸생은 친구의 끈질긴 요청에 마지못해 붓을 들었고, 미켈란젤로는 순교한 성인의 벗겨진 살가죽으로 자화상을 그림으로써 ‘살을 벗고 다시 태어나기를 바라는’ 면죄에 대한 소망을 나타냈다. 그런가 하면 연인의 초상화를 그리면서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그렸다가 그런 사적인 내밀함이 대중에 공개될 것을 두려워해 지워버린 쇠라의 경우도 소개된다. 

5장. 렘브란트 

지은이가 “자화상의 영혼, 자화상을 이끄는 빛”이라고 묘사한 렘브란트에게 온전히 할애된 장이다. 80점이 넘는 렘브란트의 자화상은 가장 오랫동안 그려진 자화상들이며 예술사에서 다시 볼 수 없는 변화와 쇠퇴의 기록이다. 젊고 자신만만한 화가의 자화상에서부터 늙고 파산해 주위에 아무도 남지 않은 화가의 내면이 절절하게 드러나는 깊이 있고 진실한 만년의 자화상까지, 렘브란트 자화상의 세계, 그리하여 그의 생애와 예술을 살펴본다. 

6장. 무대 뒤편 

‘그림을 그리고 있는’ 화가의 모습이 담긴 자화상이 이 장의 중심 모티프다. 혼신의 힘을 다해 거대한 그림을 그리고 있는 여성화가 젠틸레스키는 그림을 그리는 데 몰두해 있다. 그녀에게 그림을 그리고 있는 자신을 그린다는 것은 자신이 여성이자 뛰어난 재주를 지닌 화가임을 보여주는 증거를 제시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림을 그리고 있는 모습을 담은 자화상은 자기를 밝히는 가장 단순한 형태이자 스스로를 화가라고 선언하는 가장 쉬운 방법이었다. 하지만 이제 조직적인 작업실 환경과 더 이상 신비롭지도 않은 억대의 사업이 돼가는 현대미술의 성격 때문에 작업 중의 화가를 그리는 전통은 점차 사라지고 있다. 가장 최근에 그려진 ‘작업 중의 화가’라고 할 필립 거스턴의 「작업실」은 “화가는 예술과 분리될 수 없는, 계속 진행되는 전통의 한 부분”이라는 것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7장. 벨라스케스 

이 책에서 온전히 한 사람의 화가에게 할애된 장은 뒤러, 렘브란트 그리고 마지막으로 벨라스케스뿐이다. 여기서 다루는 벨라스케스의 자화상은 심지어 단독 자화상도 아니다. 벨라스케스는 그의 최고의 걸작 「시녀들」에서 왼쪽 화포 뒤에 등장한다. 이 그림은 갤러리에 들어서는 순간 마치 그림 속 세상에 초대된 듯한 느낌을 갖게 한다. 더욱 신비로운 것은 마치 관람자가 존재함으로써만 그림 또한 살아나는 것처럼 느껴진다는 점이다. 이 생생한 세계의 창조자로서 벨라스케스는 그림 속에 서 있다. 그리고 그가 그림 속에 존재하기 때문에 공주와 시종, 펠리페 4세의 가족과 우리의 세계가 만나는 것 같은 환영이 완성된다. 이 장은 벨라스케스의 걸작 「시녀들」과 화가에게 지은이가 바치는 찬사다. 

8장. 거울 

거울의 존재는 자화상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사진이 등장하기 전까지 화가들은 거울에 의존해 자화상을 그렸다. 초상화에서 화가는 넓은 세상의 다른 사람을 내다보지만, 자화상에서는 거울이 세상을 좁혀 거울 속에 가둔다. 그리고 화가는 그 거울 속에 갇힌 풍경에 집중한다. 그것이 자화상의 세계다. 그럼에도 거울이 자화상에 함께 그려진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렘브란트는 거울을 한 번도 그린 적이 없고 반 고흐는 방 안의 모든 물건을 그리면서도 거울만큼은 그리지 않았다. 한편 미국의 화가 노먼 로크웰의 「세 명이 있는 자화상」은 거울에 비친 모습과 화면에 그려진 자화상의 거리를 재치 있게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다. 

9장. 연행 

하나의 연극무대로서 자화상을 바라보는 장이다. 여기서 자화상은 화가가 치밀히 계산하여 ‘관객’에게 드러내고자 한 무대와 연기를 보여주는 장치가 된다. 실제로는 유쾌하고 떠들썩한 인물이었던 살바토르 로사는 ‘침묵하는 금욕주의 철학자’로서 자신을 그렸고, 모리스 켕탱 드 라 투르는 어마어마한 작업량에 시달리고 있으면서도 노동 따위와는 아무 관계가 없는 듯한 행복하고 산뜻한 미소를 띠고 관객을 바라본다. 엘리자베트 르브룅은 수줍고 아리따운, 친밀한 여인으로서 자신을 그려 고객들을 초대했다. 이 장에서는 일종의 ‘쇼’로서 기획된 자화상들을 만날 수 있다. 

10장. 무대 공포증 

모든 화가들이 기꺼이 자화상을 그렸던 것은 아니다. 헨리 레이번 경은 로열 아카데미에 들어가기 위해 고군분투하며 자화상을 출품했다. 이상한 점은 뛰어난 초상화가였던 그가 자신을 그리면서는 더듬거렸고 결국 자연스럽고 설득력 있는 모습을 그리는 데 실패하고 말았다는 점이다. 자화상을 그리는 데 있어 무의식적인 불안을 드러냈던 화가들, 혹은 자신의 본모습을 애써 감추려 했던 화가들의 경우를 살펴본다. 

11장. 외로운 영혼들 

자크루이 다비드의 유명한 자화상은 실은 그가 감방에 갇혀 있을 때 그려진 것이다. 프랑스혁명에서 로베스피에르의 추종자로서 자코뱅 당 일원으로 활약한 다비드가 로베스피에르의 권력이 무너지고서 갈 길을 잃었을 때 그려진 자화상인 것이다. 그 사실을 알고 나면 그의 눈빛에서 당황함과 흔들림을 읽을 수 있다. 이 장에서는 세상에 홀로인 존재로서 자신을 그린 자화상들을 살피며 추방당한 천재로서 고립된 자라는 화가에 대한 낭만주의적 관념과 낭만주의적 자화상에 대해서도 알아본다. 

12장. 자기애 

자화상에서 나르시시즘에 대해 다룬다. 그 중심인물은 쿠르베이다. 부상당한 남자, 첼로를 켜는 남자, 부자에게 존경받는 천재 등 언제나 이야기의 중심인물로서 자신을 등장시켰던 다양한 쿠르베 자화상들을 살펴보고, 자화상을 그리는 주요 모티프 중 하나였던 허영, 자기애에 대해 논한다. 

13장. 피해자 


연인과 헤어지고 지옥 불 속에 서 있는 모습으로 자신을 재현한 뭉크, 역시 연인에게 버림받고 자신의 잘린 목을 들고 있는 연인의 모습을 그린 알로리, 자신이 저지른 범죄에 대한 속죄의 의미로 잘린 골리앗의 머리로 자신을 그린 카라바조, 전쟁에서 입은 내면의 상처를 잘린 팔로 표현한 키르히너 등 ‘피해자’로서 자신을 재현한 화가들의 경우를 살핀다. 어쩌면 피해자로서 자신을 그린 화가들은 자기애라는 측면에서 보면 나르시시즘에 빠진 화가들과 별반 다를 바 없는지도 모른다. 반면 피해자로서 자신을 그린 것이 일종의 저항이자 고단한 현실을 견디는 힘이었던 프리다 칼로나 트레이시 에민 등의 경우도 소개된다. 이런 자화상들은 관람객들에게 용기를 내라고 부추기는 힘마저 갖고 있다. 

14장. 선구자 

가장 비극적인 화가라고 알려져 있는 빈센트 반 고흐는 자화상을 그릴 때 실은 티끌만큼의 자기연민도 넣지 않았다. 그의 자화상은 그에 관해 많은 것을 말해주긴 하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이 추구하고자 하는 스타일을 밀어붙인 결과였다. 모더니즘의 등장, 혹은 자연주의적 구상주의의 종말과 함께 자신을 어떻게 그릴 것인가는 화가들에게 하나의 문제가 되었다. 색면 추상으로 유명한 몬드리안 같은 화가는 자화상을 그릴 때만큼은 구상미술에 의존했지만 피카소나 잭슨 폴록은 적어도 그들이 입체파로서, 추상표현주의 화가로서 자신의 스타일을 완성한 후에는 자화상을 그리지 않았다. 이 장에서는 이처럼 자신의 양식을 추구하면서도 자화상을 남기고자 하는 문제에 관한 딜레마에 대해 이야기한다. 

15장. 무너뜨리기 

그리고 드디어 자화상의 도구로서 사진이 등장한다. 신디 셔먼이 대표적인데, 재미있는 것은 이 사진들이 바로 신디 셔먼의 자화상이면서 동시에 ‘기성복처럼 갈아입을 수 있는 자아’를 보여준다는 점이다. 이 장에서는 사진이 가진 객관성을 이용해 흔들리는 자아에 대한 자화상을 제작한 여러 작가들을 소개한다. 멀리 19세기의 카스틸리오네 백작부인부터 앤디 워홀, 제프 월에 이르기까지 자화상으로 자신과 자아에 대해 “우리는 절대 고정된 존재가 아니며, 끊임없이 변화하며, 하루하루 달라지는 자아의 총체일 뿐”이라며 문제를 제기한 작가들을 만난다. 

16장. 작별 

다시 시계를 돌려 1604년경 그려진 안니발레 카라치의 「작업실 이젤 위의 자화상」을 만난다. 이 그림에서 화가는 보이지 않는다. 그저 이젤 위에 올려진 화가의 자화상만이 존재할 뿐이다. 카라바조에 필적할 만한 화가였으며 파르네세 궁의 천장화를 완성한 화가가 그린 자화상치고는 무척 초라하다. 이것은 화가의 ‘부재’에 대해 말하는 자화상이다. 현대의 작가들이 사진으로 하나로 고정되지 않는 자아에 대해 말했던 것처럼, 몇 백 년 전의 화가 또한 미완성의, (그림으로) 존재하지만 (화가 자신은) 존재하지 않는 자화상을 남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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