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아는 박종철·이한열은 없었다
우리가 아는 박종철·이한열은 없었다
  • 한정석 미래한국 편집위원
  • 승인 2018.03.07 13:22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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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6월은 대한민국에 민주화 항쟁의 역사로 기억되고 있다. 그러한 기억은 집단적이고, 정치적이다. 이 기억은 얼마나 정확한 것일까. 1960년 4·19로부터 1987년 6월의 87체제를 겪기까지, 민주화 운동에 뛰어들었던 이들과 학자들은 민주화 운동의 정치적 성격이 80년 광주 5·18을 기점으로 변화했다는 점을 모두 인정한다.

하지만 그 변화가 어디에서 어디로 나아간 것인가에 대해서는 기억과 해석이 판이하게 다르다. 영화 ‘1987’에서 대학생이었던 고 박종철 군과 이한열 군은 순수한 대학생으로만 묘사되고 있지만, 이 시기에 대학 운동권은 80년 이전의 민주화 운동과는 그 성격과 주체가 전혀 달랐다는 것이 민주화 운동에 참여했던 많은 이들의 증언이다.

당시 캠퍼스의 운동권은 전대협(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이라는 조직에 장악되어 있었고, 전대협은 북의 김일성 주체사상에 따라 친북반미(親北反美)의 노선을 지도이념으로 삼고 있었기 때문. 이들은 2002년 노무현 정부의 주인공이었고, 다시 2017년 문재인 정부의 핵심세력으로 집권했다. 따라서 이들이 누구이고, 어떤 사상의 자식들인지를 정확히 이해하는 것은 앞으로 전개될 대한민국의 정치적, 외교적 향방을 가늠하게 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류근일 - ‘87 민주화’는 극좌적 해석의 오류이자 한 시대의 허위의식

80년대를 관통하는 시기의 민주화 운동에 대해 이를 ‘허위의식’이라고 날카롭게 규명하는 이는 조선일보 기자와 논설위원을 역임한 류근일 자유주의 연대 상임고문이다. 그는 1938년 서울에서 출생해 보성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 정치학과에 입학했지만 중퇴하고 다시 서울대 대학원 정치학과에서 석사와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이승만 정권 말기, 1958년 서울대 필화사건으로 첫 옥고를 치른 후, 5·16 직후 1961년 민통학련 사건으로 투옥되어 1961~1968년까지 감옥에서 보냈고, 1974년 유신 직후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되어 김지하, 이현배 등과 함께 세 번째 투옥되었다. 노태우 정부 시절에는 주요 사찰 대상에 이름이 올랐다. 그런 류근일 고문이 기억하는 80년대 민주화운동은 어떤 것일까.

“4·19에서 1970년대 중반, 그리고 1980년대 초까지만 해도 ‘전두환 물러가고 김일성은 오판 말라’는 구호가 반영했듯이, ‘비(非) 극좌파’가 운동의 주류적 담론과 리더십을 유지한 기간이었고, 1980년대 중반 이후로는 극좌파(주사파와 마르크스-레닌파)가 운동의 사령탑을 횡취(橫取)해간 시기였다. ‘비 극좌파’란 자유주의의 흐름뿐만 아니라 서구 민주주의 스펙트럼상의 ‘민주적 진보’ 성향이나 민족주의적 성향을 포함해, 기본적으로 대한민국 헌법정신이 표방하는 민주적 기본질서 자체만은 부정하지 않은, 그래서 김일성·김정일 모델과 소비에트 모델만은 수용하지 않은 여러 이념적 범주들을 말하는 것이다.”  - 한국 민주화운동에 대한 극좌적 해석의 오류 시대정신 32호(가을) -

류근일 고문의 요지는 1960년대 초에 시작된 한국의 민주화운동이 1980년대 중반에 이르러서는 ‘주사파’ 등 극좌파에 의해 변질, 왜곡당한 데 대한 비판이다. 류 고문은 80년대 운동권이 추동한 변혁운동을 ‘민주화’로 평가하는 것은 심각한 ‘오류’ ‘왜곡’ ‘적실성 없음’을 동반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런 점에서 두 가지를 주장하고 있다. “하나는 1960년의 4·19 혁명에서 1980년대 초까지의 운동까지도 ‘민중변혁운동론’이라는 ‘단순 투박한’ 이론 틀로 포장하고 조작하려는 시각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그 이후의 운동을 극좌 헤게모니가 추동한 사회주의 변혁운동이 아니라, 단순한 ‘민주화운동’이었다고 주장하는 시각이다.”  - 시대정신 32호(가을) -

물론 1960년대 초부터도 일부 극단적인 체제변혁 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류근일 고문도 이 점은 인정한다. 마르크스의 이름으로, 또는 ‘민족’의 이름으로, 운동을 끊임없이 자기들 쪽으로 견인해가려 했던 운동권 주변부의 극좌 성향이 바로 그 흐름이었으며, 이 흐름은 이른바 ‘통일혁명당 사건’을 비롯한 몇몇 극좌 공안사건으로 불거지기도 했다.

류 고문은 이러한 점에 대해 “그러나 역대 권위주의 정권들이 야기했던 여러 정치적, 도덕적 논란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 헌법정신의 문화적 헤게모니가 확고하게 확립돼 있는 한에는, 그러한 극좌 흐름이 운동의 다수파와 사령탑을 장악하거나, 운동의 공식적인 대표담론으로 터 잡을 수는 없었다”라고 말한다.

학생운동은 순수한 자유민주주의 특징은 아니었다. 캠퍼스를 장악한 NL 주사파는 사회 각 계층과 분야와 통일 전술을 통해 좌경화 되었다.
학생운동은 순수한 자유민주주의 특징은 아니었다. 캠퍼스를 장악한 NL 주사파는 사회 각 계층과 분야의 통일 전술을 통해 좌경화 되었다.

이러한 류 고문의 주장은 민중당 출신의 이재오 전 늘푸른한국당 대표의 주장과 그 맥을 같이 한다. 이재오 의원은 70년 당시의 민주화 운동에 대해 “당시에는 자유주의와 같은 이념의 바탕이 부족했기에 권위주의 독재에 항거하는 이념의 채널이 매우 좁았다”고 회상한다.

다시 말해 권위주의 개발 독재에 저항하는 이념의 길항적 주류로서 냉전기에 한국의 양심적 지식인들이 선택할 수 있는 민주화 운동 이념은 마르크스 레닌주의를 비판 내지는 변용적으로 수용하는 길 외에 달리 없었다는 점이다.

즉 마르크시즘의 분석은 받아들이되, 그 실천의 방법으로서 ‘프롤레타리아 폭력혁명’이 아니라, 제도권 정당을 통한 사회민주주의적 변혁운동에 가깝다는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이재오 대표는 “민중당에서 활동하기는 했으나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다”고 말한다.      

강길모·이동호 - 참회로 돌아본 80년대 주사파의 체제변혁 운동

류 고문이 80년 이전과 이후에 달라진 민주화 운동의 성격을 규명하고 있다면 80년대 민주화운동의 주류가 어떤 이들이었느냐는 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가 된다. 이 점에 있어 1988년 전대협 연대사무국장으로 활동했던 이동호 여의도연구원 부원장의 참회적 고백과 전대협 결성을 주도한 반미청년회 출신 강길모 전 인터넷미디어협회 회장의 증언은 결정적이다.

강 회장은 연세대 신학과 82학번으로 전대협 결성을 주도한 반미청년회 출신이다. 전대협은 80년대 학생운동의 지도부를 형성한 그룹이니 이를 결성한 반미청년회 일원이라면 운동권 386 지도부 중에서도 핵심인 셈이다. 그는 미 문화원 점거투쟁과 KAL기 조작사건을 주도하기도 했으나 90년대 초 사회주의가 무너진 뒤 서서히 혁명이론을 접고 전향했다.

반미청년회 활동 당시 강 회장이 지도했던 대상들은 이름만 들어도 알 만한 사람이 많다. 노무현 정권 때 통일부 장관 후보로까지 거론된 오영식 전 민주당 의원, 노 대통령의 수행비서를 오래했던 여택수 전 대통령 제1부속실 행정관 등이 반미청년회의 지도 대상이었다. 문용욱 전 청와대 제1부속실장, 이은희 전 제2부속실장 등도 반미청년회에서 지도했던 인물들이다.

당시 반미청년회는 각 캠퍼스별로 지도를 했는데, 안희정 현 충남지사 역시 반미청년회의 조직국장이었다. 강 회장은 정치학교를 개설해 핵심적인 활동을 할 수 있는 학생들을 뽑아서 주체사상 교육을 시켰다. 대상은 85학번까지였다.

이외에도 김만수 전 청와대 대변인, 김○○ 전 청와대 부대변인 겸 행정관, 신○○ 전 청와대 행정관 등이 반미청년회의 간접 관리를 받았다. 반미청년회는 서대협(서울지역대학생대표자협의회)을 조직하고 그것을 기반으로 전대협을 만든 후 서총련·한총련으로 조직을 확대해 갔다.

1983년 전대협의 대구문화원 폭파사건
1983년 전대협의 대구문화원 폭파사건

그는 이렇게 증언한다. “1980년대 중반 이후 대한민국의 대학 사회는 자연스럽게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를 외치는 주체 빨갱이들을 양산할 수 있는 구조와 문화가 만들어져 있었다. 처음에 의식화 교육을 받을 때 주로 선배들이 유혹하는 첫 미끼는 역사 문제였다. ‘김일성은 나쁜 놈, 우리나라는 좋은 나라’로 알고 대학에 갔는데, 운동권 선배가 다가와 ‘네가 지금까지 알고 있던 대한민국의 역사는 거짓의 역사다. 너는 비주체적으로 남들이 주는 역사관을 주입받지 말아야 하며, 역사적 진실이 무엇인지 제대로 봐야 한다’면서 대한민국은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나라, 친일파들과 친미파들의 매국세력이 만든 나라, 통일을 막고 분단을 선도했던 매국·반민족 정부이고, 북한은 일제의 극한 탄압 속에서도 끝까지 항일 투쟁을 했던 영웅들이 만든 정권이다. 나이 10살도 안 돼서 ‘타도제국주의동맹’을 결성하신 위대한 김일성 장군님을 남한에서는 건달 김성주라고 왜곡 선전하고 있지만 실제 독립운동사에서 이름을 날리는 장군이었다고 교육한다.” - 2006 한국발전연구원 강연 中-

강 회장의 증언은 80년대 주사파 운동권의 캠퍼스 포섭 방식을 알려준다.그는 “꿈에 부푼 대학 1년생을 지적으로 오만하게 만들어 주는 것”이 핵심이라고 말하는데, ‘진짜 역사가 이런 것이었구나.

그동안 나는 대한민국의 민주화를 가로막는 군사독재 세력에 의해서 눈이 가려지고 귀가 막혀 있었구나’라고 자조하면서 동시에 이를 모르는 이들에 대해서는 ‘저것들은 미제의 꼭두각시가 되어 있으면서도 자신들이 꼭두각시인지도 모르는 한심한 인간들. 그러나 나는 역사의 진실을 바라보며 자주성, 주체성을 가진 인간으로 비로소 거듭난 것이다’는 지적 프라이드를 갖게 만들었다고 증언한다.

그 진실성을 담보하는 증거는 반미 제국주의론을 주장하는 외국인들의 책이다. 냉전기에 이들 지식인들은 소련의 후원과 지원 하에 있었다.

주사파의 캠퍼스 장악

강 회장의 증언에 의하면 이렇게 종북 주체사상으로 물든 주사파 운동권 학생들의 수는 80년대 중반 전국적으로 1000여 명이 넘었다.

전체적인 수로 보자면 대다수라고 할 수는 없지만, 이들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인 PD계열 운동권과 헤게모니투쟁을 통해 대학가를 점령했다. 총학생회를 장악하는 방식이었다. 그렇게 해서 전대협이 탄생하고 전대협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 투쟁사업인 노동운동, 농민운동, 빈민운동, 청년운동, 정치권 등과 연대활동을 전개했던 연대사업국장 이동호가 등장하게 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NL의 혁명론은 북한의 혁명론을 그대로 직수입한 것이다. 그 증거는 NLPDR의 주요 논거인 사회에 대한 이론과 ‘식민지 반(半)자본주의론’, 혁명의 본질과 임무, 대상과 동력 등에서 그대로 일치한다. 북한의 인민민주주의 혁명론인 민족해방인민민주주의 혁명론은 코민테른 강령에서 제시된 후진국형 공산혁명 전략을 원용한 것이다. 이 전략은 먼저 노동자 계급, 농민, 청년학생, 진보적 지식인을 주력군으로 하고 반동 관료 및 매판 자본가를 제외한 각계각층을 보조역량으로 하여 통일전선을 형성한다. 그 후 미 제국주의를 축출하고 파쇼 정권을 타도한 다음 용공(容共)정권인 민족자주정권을 세운다. 이어 북한과의 연방제 통일을 한 다음 사적(私的) 소유와 프롤레타리아 독재 권력 수립을 내용으로 하는 본격적인 사회주의 혁명을 진행하는 전략이다. 이 혁명에 있어 노동자 전위당의 지도를 전제로 하기 때문에 1단계에서 사회주의로의 이행은 폭력이 아닌 평화적인 방법으로 진행된다는 것이다. 주사파가 제기하는 남북한 간의 평화적 통일은 남쪽에 용공정권의 수립을 전제로 할 때만 가능하다.“ - 이동호의 시대추적/ 미래한국 2015.10

이 부원장의 증언은 ‘87민주화체제’의 성격이 어떠한 것인지, 날 것 그대로의 모습으로 보여주고 있다. 다시 말해 80년대 학생 운동권이 설정한 민주화 운동의 성격은 북한의 공산화 전략인 통일전선전술이었던 것. 그러한 전략 하에서 주사파 운동권은 노조를 비롯해 농민단체, 학계, 교육계, 종교계, 여성계, 언론계 심지어 정치권과도 반미 공산주의 혁명 연대를 구축해 나갔다.

이들의 전략은 80년대 양심적 지식인들과 종교인, 언론인, 교수 등 리버럴한 성향들의 사람들을 배제하지 않고 대중적 연대로 포섭해 운동 세력을 만들고 이후 자신들의 노선과 갈등이 생기면 치열한 사상투쟁을 통해 헤게모니를 확보하는 것이었다. 당시 우파 보수진영에는 이들과 투쟁할 만한 이론적 토대를 갖춘 지식인 그룹이 없었던 것이 사실이다.

1987년 민주화 체제는 주사파 운동권들에게는미완의 부르주아 혁명단계였다.
1987년 민주화 체제는 주사파 운동권들에게는미완의 부르주아 혁명단계였다.

있다면 6·25 경험을 토대로 한 국가주의 성향의 반공애국이었으나, 정치적 투쟁에서 자신들의 논리를 대중들에게 소구력 있게 펴기에는 80년대 경제발전과 중산층의 등장으로 자유와 민주를 열망하는 사회적 모럴의 변화가 이미 깊숙이 진행된 상황이었다. 그 요구는 87년 ‘대통령 직선 개헌’으로 터져 나왔다.        

안병직·이문열 - 87체제 그후,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딜레마

 1987년 ‘6·10 항쟁’이라 불리는 대규모 대중적 시위는 결국 노태우 정부로 하여금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이끌어 냈다. 그렇게 해서 대한민국은 소위 ‘87체제’에 들어서게 된다.당시 ‘넥타이부대’라고 불렸던 대도시의 시위 군중들은 박종철, 이한열 군의 사망에 크게 영향을 받기는 했으나, 그들이 가졌을 사회주의 혁명의 노선에 찬성했던 것은 아니었다.

대부분의 시민들은 권위주의 통치의 종식을 열망했고 자유와 소유에 기반한 자유민주주의체제로 대한민국의 정치가 한 단계 도약하기를 원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대중적 열망은 당시 운동권의 궁극적 체제 변혁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으며 그들은 이를 ‘쁘띠 부르주아 혁명단계’로 규정하는 논의가 내부에 있었다.

따라서 87체제 이후 공산주의 지도이념을 가진 합법적 정당의 대두가 중요한 과제로 떠올랐다.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단계로 나아가야 했기 때문.하지만 그러한 노력들은 1989년 베를린 장벽의 붕괴와 동유럽의 탈공산화 그리고 소련의 붕괴로 일대 혼란을 초래하게 됐다.

1992년 대선에서 김대중을 통일전술 차원에서 지지했던 주사파 운동권 그룹과 그 지도하에 있던 민주화 세력들은 그해 대선에서 노태우 정권과 손을 잡고 문민정부를 탄생시킨 김영삼 의 민주계로 인해 극도의 좌절감에 빠지게 된다.

김영삼은 국내 정치에서 민주화를 4·19 정신에 입각해 추진했으나, 안보 문제에 대해서는 반공의 이념을 고수했다. 이는 80년대 운동권을 주도했던 친북 주사파 운동권으로서는 새로운 장벽을 만난 것이 된다.

이로써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라는 문제가 제기되기에 이르고 여기에 안병직 교수가 중심에 서게 된다. 한국 사회 성격을 ‘식민지 반봉건사회’로 인식하고 ‘식민지 반봉건사회론’를 저술해 민족해방(NL) 운동권에 큰 영향을 줬던 안병직 서울대 교수(경제사)는 이후 한국 경제의 몰락이 아니라 발전 과정을 체험하면서 자신의 이론을 수정하게 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민주화를 갈망해서 87년에 민주화의 변혁이 일어났는데, 이후 민주주의가 왜 순조롭게 발전하지 못하고 혼란 속으로 빠져 들어갔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우리가 현재 누리고 있는 자유민주주의는 여러 사상의 결합(hybrid)이라고 할 수 있지요. 자유민주주의를 구성하는 사상으로서는 자유주의, 인권사상, 개인주의, 공화주의 및 민주주의 등 여러 사상들이 복합되어 있습니다. 단순한 민주주의 사상만으로는 자유민주주의체제가 성립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민주주의만 하더라도 직접민주주의, 참여민주주의, 심의민주주의 및 대의민주주의 등 여러 층위(層位)가 있습니다. 따라서 자유민주주의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근대문명의 성립을 전제로 해야 하는데, 단순히 참여민주주의나 민중민주주의만으로 민주주의를 이해하고 있으니, 자유민주주의는 성립하기 어렵지요.” - 안병직-복거일 대담, ‘시대와 삶을 논한다’ 시대정신

안 교수의 주장은 비록 주사파가 아니었다하더라도 80년대 진보를 내세운 민주화 운동 세력이 가진 정치철학의 편협성과 척박함을 지적한 것이다. 여기에 맞서던 보수의 정치철학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의 이야기를 더 들어보자.

“이렇게 이야기하면 망언이라고 지탄받겠지만, 현재 진보진영에서 주장하는 민주주의는 인민민주주의에 가깝습니다. 그들은 기본적으로 민주화운동 시절의 학생, 노동자 및 농민을 대변하는 세력이니 저항적 민족주의세력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반미를 주장한다거나 경제민주화를 주장한다거나 하는 친북·종북적 경향이 강하지요. 그래서 한국의 진보세력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체제를 기초로 하는 사회민주주의로 발전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아직도 보수진영은 자유민주주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고, 진보진영은 민중민주주의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한국의 선진적 정치지형을 형성하려면, 대한민국의 국가적 정통성과 자유주의를 전제로 하는 보수와 진보의 국민적 대통합이 절실하다고 봅니다.”

안 교수는 87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문제로 4·19와 같이 ‘국가적 정통성과 자유주의’를 기반으로 하는 민주주의 정신으로 돌아가야 함을 역설하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우리는 소설가 이문열이 보고 느낀 80년대 민주화에 대한 단상을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1980년대에 우리 모두가 하나의 목소리로 민주화만을 제창했던 것처럼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1980년대라는 것이 오직 그 목소리 하나였는지는 의문입니다. 산업화라는 목소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새 소설에선 시대정신이나 특징을 하나로 못 박고 시작하지 않으려고 해요. 사람들이 시대정신이라고 해서 주류 목소리 하나만을 상정해서 가는데, 사실 그런 경우는 별로 없고 대부분 여러 가락들이 공존합니다. 이 대목에서 YS(김영삼 대통령)의 가치가 있다고 봅니다. 1980년대 초반 전두환 정부가 어떤 형태로든 피를 흘리고 시작했는데, YS가 나중에 산업화와 민주화의 가치가 공존하도록 무대를 만들어줬어요. 그런 맥락에서 저는 YS를 민주화의 목소리에 가두는 것도 반대합니다. 그는 전두환, 노태우 다음에 그 당의 대통령 후보로 나서 대통령에 당선된 사람입니다. YS를 다른 것은 다 빼고 민주화의 가치 위에만 올려놓는 것은 역사의 변조입니다.”  - 2016.1. 미래한국 인터뷰 中 -

결국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1980년대는 ‘묻지마 민주화’가 아니라, 복잡 다단한 시대였다는 이야기다. 그 새로운 해석이 이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 한정석 미래한국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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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ㅇ 2018-03-25 09:57:03
좋네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