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의 리더십, 박근혜의 리더십
고종의 리더십, 박근혜의 리더십
  • 이주천 원광대 사학과 교수
  • 승인 2018.03.16 13:2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하 존칭 생략) 탄핵 이후 보수우익이 지리멸렬하는 가운데 문재인 정권이 헌법 개정을 추진하면서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 체제는 심각한 위기에 직면해 있다. 이 시점에서 냉정하게 재조명해야 할 점은 박근혜의 리더십에 대한 성찰이다.

이를 위해 과거의 군주로서 조선 망국을 체험한 고종과 비교할 필요가 있다. 고종과 박근혜는 100년간의 시차가 있지만 역사적 배경에서 망국의 위기와 체제의 위기라는 점에서 비교될 수 있다.

고종은 개화파와 위정척사파의 갈등 속에서 망국을 막으려고 몸부림쳤지만 실패한 비운의 군주이며, 박근혜는 촛불을 든 민중주의의 파상 공세에 의해 탄핵을 당한 실패한 대통령이다.

그래서 박근혜는 역사가들에 의해 자칫하면 자유민주주의 체제 붕괴에 원인과 빌미를 제공한 통치자로 낙인이 찍힐 가능성이 크다. 가계와 정치적 멘토, 업적, 국내외의 정적, 인사문제, 외교정책, 종교관 등 여섯 가지 점을 비교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고종이 11살에 궁궐에 들어갔고, 박근혜가 12살에 청와대에 들어가면서 세상과 격리되어 엄한 부친의 훈육하에 정치를 배워간 점이 유사하다. 고종은 성품이 완고하고 개혁 의지가 투철했던 대원군에게 궁궐정치와 제왕학을 배웠고, 사부로 박규수가 있다.

우의정까지 오른 박규수는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등 개화파 인물들을 양성해 고종에게 천거했으며 개혁 개방의 필요성을 누구보다도 절실하게 인식해 고종의 대외인식에 도움을 줬다.

박규수의 실각 후 고종의 보좌관들은 외국인 선교사나 한양에 거주한 외국인 공사급 외교관들로 해외에 대한 정보를 전달해 준다. 그런 점에서 고종은 귀가 막히거나 소통이 안 되는 암울한 군주는 아니었다.

난세에서 차이 드러난 리더십

이에 반해 박근혜 대통령의 사부나 멘토는 누구였나? 박근혜는 부친 박정희 대통령의 주변에서 어깨너머식 정치를 배웠지만 정식으로 부친으로부터 정치의 요체에 대해서 강론이나 훈육을 듣고 자라지는 못했다.

그 이유는 유신체제 속에서 부친 박정희 대통령이 월남전에서의 철수문제, 북한의 무력도발 대처 문제, 남북공동선언, 핵무장을 추진하면서 생긴 긴장과 갈등의 한미관계 등으로 바빴기에 자식의 훈육에 신경 쓸 겨를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박근혜는 서강대 전자공학과 출신으로 프랑스에 유학을 가서 공대 교수나 엔지니어가 되는 것이 꿈이었다. 결국 박의 정치권력에 대한 욕망과 동기부여는 육영수 여사 사망 이후 만난 최태민 목사로부터 받게 된다.

주로 최의 역할은 제왕학을 강론하는 학자의 몫이 아니라 구국봉사단 총재 박근혜의 행사에 함께 하면서 연설문 작성이나 대중에 대한 이미지 제고를 위해 조언을 했을 것이다.

최 목사와의 만남은 부모를 모두 잃은 박근혜에게 강력한 권력 의지를 충동질하고 새로운 인생의 목적 있는 삶을 안겨줬던 긍정적 측면이 있지만, 인간 불신의 충격에서 헤매고 있는 박근혜를 더욱 더 비밀스럽고 세상과 담을 쌓게 되는 성향을 고착시키게 된다는 점에서 악재였다.

집권 이전 박근혜의 멘토가 최태민 목사였다면, 집권 이후에는 박 대통령의 정치적 조언자나 멘토는 잘 보이지 않는다. 집권 초기 인사 기용에서 보수 지지층으로부터 신랄한 비판을 받은 점도 멘토 부재로 인해서 발생한 박의 소통 부재에 그 원인이 있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고종은 부친 대원군으로부터 받은 제왕학을 훈육 받은 정통파 스타일이라면, 박은 최태민으로부터 강한 권력 의지에 대한 동기를 부여받고 비밀리에 비공식적으로 코치를 받은 변칙 스타일이라고 볼 수 있다.

둘째, 국제관계에서 고종은 러시아의 니콜라이 2세의 지원에 의존했는데 이는 지는 쪽에 붙은 것이고, 박근혜는 집권 초기에는 중국과의 협력을 강조했지만 결국 한미동맹을 강조하면서 대세를 잘 파악했다.

고종황제의 국장화첩 /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고종황제의 국장화첩 /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고종은 국권 수호를 위해 조미통상우호조약체결 이후 미국에 의지하는데 청일전쟁 이후 중립화를 선언했으나 실제적으로 러시아에게 호감을 가졌으며 명성황후가 시해된 이후 러시아 공사관으로 몸을 피신하는 아관파천을 단행했다.

고종은 니콜라이 2세와의 친근 관계를 통해서 러시아가 조선을 지원할 것이라는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그런데 러시아는 러일전쟁에서 신흥 강국 일본에 패했고 고종의 짝사랑을 버렸으며 1차 세계대전에서도 또 독일에 패하고 강화조약을 체결했다.

불행하게도 고종은 지는 쪽에 붙은 것이다. 이에 반해 박근혜는 한때 북한을 방문하여 김정일과 단독 면담하기도 했지만 집권 후 북한의 핵무장 의도를 올바로 간파한다.

북한 핵문제 해결을 위해 집권 초기에는 중국과 미국과의 관계 개선을 노력하다가 후반기에는 개성공단을 폐쇄하는 대북강경책을 구사해 한미동맹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돌아선다.

러시아를 믿었던 망국의 군주 고종과 한미동맹의 강화를 인식한 박근혜의 대외관계는 남북한 특사를 들락날락하게 위험한 불장난을 하는 문재인 정권의 대북정책에 귀감으로 남을 것이다.

셋째, 인사 문제에서 고종과 박근혜 양자는 자신이 원하는 인물들을 적재적소에 기용하지 못했다. 고종은 기독교를 수용하고 젊은 신진사대부를 중심으로 한 개화파를 포용하는 개혁개방정책을 추진했지만 김옥균 등 개혁파의 무리한 갑신정변으로 중대한 시련을 맞게 되었다.

갑신정변의 와중에서 청일 양군이 조선에 진주하면서 후일 청일전쟁의 도화선이 된다. 또 처음부터 개혁 개방에 결사적으로 반대한 유림에 좋은 명분을 제공하게 되었고 궁궐에서 명성황후를 중심으로 한 수구친청파의 입장을 강화시켰으며 고종의 정치적 입지가 약화된다.

이에 반해 박근혜는 황교안 법무장관, 남재준 국정원장의 임명 등으로 보수진영의 환영을 받았지만 총리 인선과 비서실 수석 기용과정에서 먼지털이식 국회청문회와 야당의 집요한 언론플레이로 인해 자신의 원하는 인물을 기용하지 못했다.

그런 와중에서도 법무장관은 이석기 통진당에 대한 고발로 헌재를 통해 불법정당 판결을 받아서 해산명령을 내리도록 했고, 북의 핵 도발에 맞서 개성공단의 폐쇄를 결정했으며, 검인정 교과서의 문제점을 시정해 국정 교과서의 집필을 지시하도록 하는 업적을 쌓았다.

넷째, 고종과 박근혜 모두 국제 정세에 아둔한 민족주의 자주세력이 국정 운영의 최대 걸림돌이었다. 고종의 개혁개방정책을 끊임없이 가로막은 세력은 최익현을 비롯한 위정척사를 부르짖는 전국의 유림세력이었다.

이들은 성리학으로 무장하여 중국의 천자사상을 강조하면서 개방 개혁 시책에 반발, 수염을 깎거나 머리를 단정하게 하는 단발령도 결사반대했다. 그러나 그들은 노골적으로 군주권을 위협하지는 못했다.

박근혜의 경우 국내 개혁의 걸림돌은 대북 퍼주기의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친북세력과 사회 변혁을 주도하는 촛불로 위장한 민중주의세력이었다.

이들은 조금만 약점만 있으면 ‘진돗개처럼’ 물고 늘어져서 ‘대통령 퇴진’을 요구할 참이었다. 2002년 효순, 미선 양의 미군장갑차사고사건을 반미 운동의 명분으로 삼고, 2008년 광우병사태를 촉발시킨 관록의 후예들로서 반미를 외치고 통일 문제에서 자주권을 주장했다.

외세의 개입을 반대하는 민족주의 관점에서 조선 말기의 척사위정파와 유사하지만 수법에서는 위정척사파에 비해 훨씬 음흉하고 비열하다.

그들은 세월호와 같은 대형교통사고를 기회로 삼아 매일 언론방송매체를 통해 세월호 유가족의 통곡소리를 극대화, 선전선동하면서 국민감정에 기름을 퍼부었고 사망자가 확대된 원인을 박근혜의 무능과 지도력 부재로 몰아갔고, 결국 최순실가 와의 은밀한 유착관계를 포착, 정보 수집을 가공, 악용하여 탄핵으로 이끌어 냈다.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에서 “군주에게 가장 경계해야할 대목은 대중들에게 경멸을 받는 것”이라고 충고했던 우려가 현실로 나타나고 말았다. 박근혜의 몰락은 최장집(고려대 명예교수)으로 하여금 대권 출마를 선언한 자신의 제자 안희정 충남지사에게 <군주론>을 증정하는 계기가 되었다.

다섯째, 고종과 박근혜 양자는 신체적 부자유를 겪고 있었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전자는 일본군으로부터 평생 강제연금생활을 당했고, 박은 탄핵 이후 검찰로부터 고발되어 감옥에 있다.

고종은 러일전쟁이 발발하기 한달 전에 중립론을 제창했다. 그러나 일본군 2천명은 한양을 무단으로 점령해 고종의 중립화 선언을 무력화시켰다. 러일전쟁 이후에도 고종은 대화재로 소실된 경운궁의 한 건물(수옥헌)에 연금되어 일본군의 엄중한 경비와 감시 하에 있었다.

그런데 고종의 군주로서의 권위와 지도력은 오히려 감금상태 이후 더 찬란한 빛을 발하게 된다. 고종은 은밀하고도 부지런하게 충신들과 외국고문단을 접견했으며, 자신의 밀서-밀사 외교를 실천하게 된다.

사라진 박근혜의 옥중 정치

이에 반해 검찰에 의해 국정농단 및 뇌물죄로 고발된 박근혜의 경우 옥중정치는 행방불명이다. 출석 거부한 상태에서 1심 구형에서 무려 징역 30년 1185억원 벌금이 부과되었다. 외부 인사와의 접촉을 스스로 차단하고 있다.

YTN 뉴스 영상
YTN 뉴스 영상

신체가 구속된 정치인들의 옥중정치의 형태는 동서양에 걸쳐 다양했다. 히틀러는 감옥소에서 <나의 투쟁>이란 책을 저술했고, 인도 독립을 위해 헌신한 간디의 단식투쟁을 위시해 국내에서는 신군부에 의해 강제 연금 상태에 있던 김영삼의 단식투쟁, 아들에게 보내는 김대중의 애절한 서신을 통한 옥중정치 등은 대중들에게 자신들의 억울함과 대의명분을 알리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여섯째, 국가 수호신에 대한 의문이다. 고종과 박근혜는 과연 어떤 신을 믿었는가? 고종에게는 조선을 지키는 수호신은 이미 사망한 명나라 황제들이었다.

지금의 시각에서는 어처구니없는 일이지만, 임진왜란 이후 중후반기 조선에서는 명나라 황제들을 모시는 ‘대보단(大報壇)’을 설치 운영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대보단이란 명나라 황제로부터 받은 ‘큰 은혜를 갚는다’는 뜻이다. 1705년 숙종은 임진왜란에 병력을 파병한 황제 만력제의 은혜를 잊지 않기 위해서 그를 추모하는 제사를 해마다 기일(忌日)에 실시했다.

영조 때는 홍무제와 숭정제가 추가되었다. 명을 세운 홍무제는 조선의 창업을 승인하고 국호를 정해준 대조(大造)의 은혜를 베풀었고, 숭정제는 조선 조정이 남한산성에서 위기에 처했을 때 원군을 보내줬기 때문이다.

이렇게 고종의 뇌리에는 숭명사대의식이 깊이 자리 잡고 있었다. 대보단은 단기적으로 왕조 통치 질서를 유지하는 데 기여했지만, 장기적으로는 주변국들의 국력·정세 변화를 조선이 따라잡지 못하게 하는 원인이 됐다.

이에 반해, 박근혜가 섬기는 신은 어떤 신이었나? 모친으로부터 불교, 중고교 시절에는 미션스쿨의 교육으로 인해 가톨릭의 영향을 받았고, 성년이 된 이후에는 최태민 목사와의 만남을 통해 영세교(永世敎)에 접하게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영세교는 최태민에 의해 1970년대 초 불교·기독교·천도교를 종합하여 만들어졌으며, ‘나무자비 조화불’을 외우면서 본래의 신체를 회복하여 신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박근혜의 사생활이 오랫동안 워낙 비밀스러웠기 때문에 신앙 생활에 대해 정확하게 알려진 바가  없다.

언론은 논외로 하더라도 정통 기독교계에서조차도 박근혜의 신앙 문제를 정식으로 거론한 바가 없다. 박근혜가 한나라당(후신 새누리당)에서 국회의원일 때 이단 종교와의 유착이 어느 정도 있는지도 더 심도 있게 연구해야 할 사안이다.

아래의 한정석의 칼럼, ‘신천지의 정종유착 심화되나?’는 중대한 의미가 있다. “신천지와 정치권과의 유착 의혹은 꾸준히 제기되어 왔다. 특히 보수 여당에 신천지의 포섭 전략은 치열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2004년 박근혜 전 대통령의 대선 후보 캠프의 이경재 기독교대책본부장은 신천지 행사에 참석해 축사했으며, 박 전 대통령은 2006년 국회의원 시절 이만희 교주(86)와 한자리에 앉은 모습이 카메라에 포착됐다. 2012년 한나라당 당명을 새누리당으로 변경할 때도 신천지 관련 의혹이 제기됐다.”(2017.9.20. 미래한국)

고종은 독립운동의 구심점으로서 계속 살아 남았다. 측근들은 망명을 건의해 추진하려 했으나 일제의 감시를 벗어나지는 못했다. 고종은 1919년 정월에 68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이 때에 각지에서 그가 일본인에게 독살 당했다는 소문이 퍼져 민족적 의분을 자아냈으며, 국상이 거행될 때 3·1만세운동이 일어났다. 3·1만세운동은 독립운동의 기폭제가 되었다.

고종의 사망으로 비로

소 독립운동가들이 군주제를 정리하는 계기가 되었고, 독립운동가들이 자신의 의지대로 활동하게 되었다. 박근혜의 감옥 생활은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의 경우와 비교해 볼 때 2, 3심으로 진행되면 형량은 단축될 것으로 추정된다.

분명한 점은 박근혜가 감옥에 있든 풀려나든, 탄핵이 부당하든 아니든, 또 태블릿 PC가 조작이든 아니든 간에 ‘박근혜의 시대’는 역사의 뒤안길로 가버렸다는 점이다.

역사가 미래를 향해 끊임없이 진행되듯이 낡은 물레방아로 새로운 물길을 끌어올릴 수는 없는 것이다. 체제 변형의 벼랑 끝 위기에서 민중주의라는 괴물에 맞선 새로운 전사(戰士)의 등장이 불가피한 것이 아닌가?

이주천 원광대 사학과 교수
이주천 원광대 사학과 교수, 미래한국 10기 편집위원
본 기사는 시사주간지 <미래한국>의 고유 콘텐츠입니다.
외부게재시 개인은 출처와 링크를 밝혀주시고, 언론사는 전문게재의 경우 본사와 협의 바랍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