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 어떤 글이 살아남는가...우치다 다쓰루의 혼을 담는 글쓰기 강의
[신간] 어떤 글이 살아남는가...우치다 다쓰루의 혼을 담는 글쓰기 강의
  • 김민성 미래한국 기자
  • 승인 2018.03.19 0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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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우치다 다쓰루內田樹는 문학, 철학, 교육, 정치, 문화 등 다양한 분야를 아우르며 비판적 지성을 보여주고 있는 일본의 대표 사상가. 도쿄대학 문학부 불문과를 졸업하고 도쿄도립대학 대학원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고베여학원대학 문학부 종합문화학과를 2011년 3월에 퇴직한 뒤 동대학 명예교수가 되었다. 

전공은 프랑스 현대사상, 영화론, 무도론, 교육론 등이다. 합기도 7단이기도 한 그는 고베시에 무도와 철학을 위한 배움터 ‘가이후칸凱風館’을 열어 새로운 학습공동체를 만들어가고 있다. 
국내에 출간된 저서로는 [푸코, 바르트, 레비스트로스, 라캉 쉽게 읽기], [청년이여, 마르크스를 읽자](공저), [스승은 있다], [하류지향], [레비나스와 사랑의 현상학], [하루키 씨를 조심하세요], [반지성주의를 말하다](엮음), [어른 없는 사회], [곤란한 성숙], [곤란한 결혼] 등이 있다. 이 책은 그의 퇴임 전 마지막 강의를 엮은 것으로, 저자 스스로가 문학과 언어에 대해 ‘이제까지 우치다 다쓰루가 이야기한 것의 종합’이라고 생각해달라고 주문하고 있다.


"수십 년에 걸쳐 현명함과 어리석음이 뒤섞인 채 신물 날 정도로 다양한 글을 읽고 또 스스로 대량의 글을 써온 결과, 나는 ‘글쓰기’의 본질이 ‘독자에 대한 경의’에 귀착한다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실천적으로 말하면 그것은 ‘마음을 다해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저자는 첫 강의에서부터 이렇게 불쑥 결론을 밝혀버린다. 그러곤 덧붙인다. “이렇게 간명하게 단언해도 여러분은 내 말이 무슨 뜻인지 곧바로 이해하지 못할 겁니다. 그렇지만 걱정할 것 없어요. 이 결론에 대해 ‘과연 그렇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일 때까지 앞으로 반년 동안 강의할 테니까요.” 실제로 저자는 끈질기고 또한 친절하게, 그렇게 마음을 다해 우리에게 이야기를 건넨다. 

두 번째 강의를 시작하며 저자는 지난 강의에서 내준 과제에 대한 감상을 전한다. 그의 평은 혹독하다. “내심 짐작은 했지만, 솔직히 말해 재미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학생들이 왜 이렇게 재미없는 글을 쓸 수밖에 없는지 이야기한다. 무엇보다도 ‘평가의 함정’에 갇혀 있는 게 문제다. ‘어떤 글을 쓸까’ 하는 것보다 ‘몇 점을 받을까’ 하는 것이 우선되다보니 ‘이 정도면 되겠지’ 하는 마음이 발동한다는 것이다. ‘합격 최저선’을 목표로 ‘평범함의 경계선’에 갇혀서는 글을 쓰는 일이 고역일 수밖에 없다며, 글을 쓴다는 것은 언제나 ‘한계에 도전하는 것’, 즉 우리 내면의 ‘평범함의 경계선’을 뚫고 나가는 것이라고 전한다. 

저자는 우리가 글을 쓸 때 ‘이미 알고 있는 것’을 ‘프린트아웃’ 하는 게 아니라고 이야기한다. 글을 쓰는 동안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무엇을 알고 있는지 발견하는 것이라고, 이는 글을 써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그는 무라카미 하루키가 ‘소설을 쓰기 위해서는 체력을 소진하고 몸을 혹사하는 시간과 수고를 들여야 한다. 작품을 쓰려고 할 때마다 새로 일일이 굴을 깊이 파야 한다.’고, 또 그렇게 ‘새로운 수맥’을 찾아내어야 한다고 이야기한 것에 열렬히 호응한다. 우치다 다쓰루 역시 창작이란 그저 머리로만 하는 게 아니라 어떠한 신체적 실감이 동반된다는 점, 그리고 그 끝에 결국 어떤 흐름과 만난다는 점에 깊이 동의한다. 

문제는 ‘흐름’을 붙잡는 것이다. 글 쓰는 사람은 그것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붙잡을’ 따름이다. 하지만 ‘흐름을 붙잡는’ 데는 기술과 인내가 필요하다. 그래서 글을 쓸 때 ‘어떤 것이 오기를 기다려야 한다는 것’과 ‘어떤 것을 붙잡으려면 기술이 필요하다는 것’을 꼭 기억해두라고 전한다. 

그것이 자기 앞으로 온 메시지라는 것을 알면, 비록 그것이 아무리 문맥이 불분명하고 의미조차 불분명하더라도 인간은 귀를 기울여 경청합니다. 경청해야만 합니다. 만약 그것을 이해할 수 없다면 이해할 수 있을 때까지 자기 자신의 이해의 틀 자체를 변화시켜야 합니다. 그것은 인간의 안에 깊이 내면화된 인류학적 명령입니다. 

갓난아기는 아직 엄마가 하는 말의 의미를 모르지만 그 말에 적절한 반응을 한다. 그 말이 자신을 향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메시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 내용보다도 ‘수신자’라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독자는 자신에게 간절히 이야기를 전하려 한다는 걸 알게 되면, 어떻게든 그 의미를 파악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본인의 전공이 된 레비나스의 저서를 처음 접했던 때를 이야기한다. 20대가 끝나갈 무렵 처음 집어든 레비나스의 [곤란한 자유]는 당시에 무슨 말인지 전혀 알 수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마치 내 멱살을 움켜쥐고, ‘제발 부탁이야, 내 말 좀 이해해줘.’ 하고 몸을 흔들어대는 느낌”만은 전해졌다. 저자가 가진 ‘전해지는 언어’에 대한 원체험인데, 전해지는 것은 언어의 내용이 아니라 언어를 전달하고 싶다는 열의라는 것, 또한 그것은 뇌가 아니라 피부로 전해진다는 것을 확신하게 된 계기라고 전한다. 

우리가 가장 생생하게 살아 있는 말을 할 때란 비록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알지 못해도 자기 안에 그 말을 듣고 제대로 이해해주는 누군가가 있다는 확신이 있을 때입니다. 자기 안에 자기와는 다른 말을 사용하며 살아가는 존재가 있어 그 사람을 향해 말을 걸 때, 언어는 가장 생기가 넘칩니다. 가장 창조적이 됩니다. 언어를 지어낸다는 것은 내적인 타자와 이루어내는 협동 작업입니다. 

우치다 다쓰루는 글짓기의 과정이 내적인 타자와의 협동이라고 이야기한다. 자기 안에 여러 유형의 독자를 갖고 있는 것이 ‘읽기 쉬운’ 글을 쓰기 위한 하나의 조건이라고도 하고, 자기 안에 있는 다양한 언어가 폭주하며 겹쳐지면서 화음을 이루는 글을 쓰라고도 권한다. 풍부한 내적 타자를 갖추고, 그들과 끊임없이 대화해나가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한편 그는 ‘어른’에 대한 이야기를 빠트리지 않는다. ‘타인의 마음을 아는’ 사람, 즉 타자와의 가상적인 동일화를 잘 할 수 있는 인간을 ‘어른’이라 부를 수 있다는 것이다. 우치다 다쓰루의 세계에서 ‘어른’이 되는 것과 ‘창조적 글쓰기’는 다른 것이 아니다. 

반년에 걸친 ‘창조적 글쓰기’를 향한 대장정은 ‘혼’이라는 키워드로 마무리된다. ‘신체의 깊은 구석에 있으면서 언제나 펄떡펄떡 맥박치고 있는 생명의 파동’이 바로 저자가 보는 혼의 이미지다. 그는 언어와 신체적 실감 사이의 불균형 상태에서 언어가 탄생한다고 이야기한다. 또한 언어는 ‘언어가 되지 못하는 것’을 모태로 생성된다고도(310쪽) 이야기한다. 여기에서의 ‘신체적 실감’이나 ‘언어가 되지 못하는 것’이 저자가 이야기하는 ‘혼’이라고 볼 수 있다. 

굳어버린 기성의 언어와 아직 언어화되지 못한 생생한 그 무엇 사이의 간극을 확인하고, 생생한 그 무엇을 기어코 전달하고 말겠다고 간절히 바라는 것. 그것이 바로 ‘마음을 다해 이야기하는 것’이고 동시에 언어가 지닌 창조성의 실질이라고 저자는 이야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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