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Too  대한민국을 흔들다
#MeToo  대한민국을 흔들다
  • 남정욱 문화평론가·대한민국 문화예술인 공동대표
  • 승인 2018.03.23 2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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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영화마다 그 영화를 대표하는 대사가 있다. ‘스타워즈’의 “내가 니 애비다”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뜬다”같은. 우리 영화 ‘살인의 추억’은 송강호가 뜬금없이 던지는 “밥은 먹고 다니냐?”였다. 이제 그 자리를 “여기가 강간의 왕국이냐?”에 내줘야 할 것 같다. 창피하게도, 부끄럽게도, 어이없게도 대한민국은 정말로 강간의 왕국이었기 때문이다. 한 달여 새 벌어진 미투(Me Too) 운동으로 대한민국은 쑥대밭이 되었다. 아는 사람만 아는 이윤택과 누구나 이름은 들어보았을 고은에 이어 얼굴과 이름을 일치시키는 데 어려움이 없는 정치인 안희정까지 기어이 성폭력 가해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전 분야, 전 방위에서 대한민국은 음란마귀의 천국이었다.

신부가 자기 몸을 주체할 수 없다며 여신도를 폭행하고 교수가 공부를 하러 들어온 학생들을 노리개로 삼았다. 정말이지 정의가 강물 대신이 아니라 욕정과 정액이 강물처럼 흐르는 그런 나라였다.

동시에 그것은 피해자들의 숨죽인 한숨과 눈물이 강물처럼 흐르는 처절한 풍경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번 미투 운동이 처음은 아니었다. 예전에도 있었다. 다만 인터넷이 지금처럼 훌륭하지 못해 정보가 폭발적으로 확산되지 않았을 뿐이다.

우리의 음란을 외부에 발설하지 말라

18년 전인 2000년 ‘운동사회 성폭력 뽑기 100인 위원회’가 발족됐다. 체육인들 혹은 체대 학생들 중심의 성폭력 위원회가 아니다. 이른바 진보를 표방하는, 운동권 내부에 만연한 성폭력을 뿌리 뽑겠다는 취지의 위원회였다.

이들은 두 차례에 걸쳐 가해자 10여 명의 명단을 공개했다. 거기에는 유력 방송사의 노조 위원장도 포함되어 있었다. 소문으로만 돌던 운동권 남성들의 성적 자유(!)가 만천하에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사건의 추이보다 관심을 끌었던 것은 100인 위원회가 밝힌 성폭행 가해자와 그 동조자들의 논리였다.

‘적’의 공격으로부터 조직을 보위하기 위해서는 성폭력 사건이 조직 밖으로 불거져 나가서는 안 된다는 운동 논리에 갇혀 그 동안 여성들은 자신의 끔찍한 경험을 어쩔 수 없는 운동의 과정으로 받아들여야 했다. 100인 위원회는 이 말 같지도 않은 논리를 정면으로 들이받았던 것이다.

가해자 중 한 명은 명예훼손으로 피해자와 위원회를 고소하는 것으로 맞받아쳤고 주변의 남성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일제히 그를 감쌌다. 이후 벌어진 일들은 얼마 전 김어준이 제기한 음모론과 성폭력 피해자 문제에 진보ㆍ보수가 뭔 상관이냐는 비판으로 진영 내부의 비난에 시달린 금태섭 사태의 원판이었다.

‘적의 공격’이라는 의미는 100인 위원회 발족으로부터 또 14년을 거슬러 올라간다. 1986년 운동권은 기막힌 이슈를 손에 넣었다. 경찰서 형사들이 위장 취업한 여학생을 취조하는 과정에서 성폭행을 했다는 것이었다. 그것도 무려 ‘서울대’ 여학생을. 이른바 ‘부천경찰서성고문사건’이다.

사건은 전두환 정권의 가뜩이나 없었던 도덕성을 아예 시궁창에 처박았다(가뜩이나 없었다는 것은 소생의 의견이 아니라 당시의 여론을 말한다). 사실 피해 당사자의 증언 외에는 아무 것도 없는 사건이었다.

이 사실은 변호인들 스스로 밝히고 있다. “우리는 권양의 진술 태도나 기타 모든 정황으로 보아 고발장의 내용이 진실인 것으로 확신한다...(중략) 최고 학부까지 다닌 한 처녀가 입에 담기조차 수치스러울 저 끔찍한 강제추행을 당한 사실을 스스로 밝힌 이상 그 밖에 또 무슨 증거가 필요해서 수사를 한다는 말인가.”( 고발장 중에서)

그러니까 ‘적의 공격’이라는 것은 자기들이 그렇게 공격한 선례가 있었던 만큼 반대로 자기들도 당할 수도 있다는 의미의 표현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사건의 진짜 중요한 포인트는 진짜 가해자가 누구였는가 하는 것이다. 고발장의 내용이 전부 사실이라고 할 경우 피해자의 인권을 손톱만큼이라도 생각했다면 절대 그 문건을 외부로 내보내서는 안 되는 거였다.

그러나 고발장은 복사된 유인물 형태로 전국에 뿌려졌다. 아마 50대 초반 이상이라면 그 유인물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읽어봐. 재미있어.” 시종일관 음란하고 선정적인 내용으로 가득 찬 유인물을 소생에게 건네 준 선배 역시 알 듯 모를 듯 웃음을 지었던 기억이다.

증거도 필요 없는 사건의 고발장을 유포하여 여론전을 펼치는 동안 권양은 전 국민의 성적 판타지의 대상이 되어야 했다. 진짜 가해자는 고문 경찰이 아니라 ‘남성’ 운동권이었다는 얘기다.

양아치에서 괴물까지

어느 순간 미투 운동은 진영을 넘어섰다. 이른바 진보라는 진영은 이미 깨버렸고 ‘예술’이라는 ‘특별한 환경’을 빙자한 변명의 틀도 깨버렸다. 기행을 재능 발휘의 한 형태라고 주장하는(혹은 믿고 싶어 하는) 한 시인은 손가락질을 면치 못했다.

그렇다면 미투 운동은 개인의 문제인가. 그건 아닌 것 같다. 물론 어느 집단이나 ‘양아치’는 있다. 그러나 이 양아치가 ‘괴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그 집단이 ‘폐쇄성’을 가져야 하며 ‘완결성’을 갖춰야 한다. 이윤택 사건은 그 대표적인 경우다. 여자 단원들은 예술하시느라 피곤한 이윤택을 만져드려야 했고 연기 훈련이라는 미명 아래 옷을 벗었다. 살아남기 위해서, 그리고 무대에 서기 위해서 여성들은 매춘부나 하는 행동을 감수했다.

연희단거리패는 사설 왕국이었다. 이윤택은 교주였고 그의 왕국은 완벽히 폐쇄된 공간의 완결판이었다. 명지대 연극영화과 사건은 또 어떤가. 교수가 주관하는 술자리에 참석하지 않으면 해당 학번 학생들은 실습에서 배제됐다.

동기들을 생각해서 학생들은 선생(이라는 괴물)의 성적 모욕과 육체 침탈을 감내해야 했다. 안 하면 그만 아니냐고? 싫다고 하면 그만 아니냐고? 연극영화과는 졸업만 한다고 끝나는 게 아니다. 그들은 무대에, 카메라 앞에서 서야 한다. 원래 뭐가 되게 해주는 건 어려워도 뭐가 안 되게 하는 것은 쉽다.

졸업 후 연기 활동을 가로막는 것은 그 선생(이라는 악마)에게 일도 아니었다. 입학부터 졸업 후까지 이어지는 ‘완결성’이다. 겨우 스무 살 넘은 학생들에게 불의에 맞서 강렬하게 저항했어야 한다고 말한다면 그 사람은, 그렇다면 당신은 운동 열심히 해서 왜 효도르와 한 판 붙지 않느냐는 질문에 답을 해야 한다.

문단도 마찬가지다. 문제를 촉발시킨 최영미의 시를 실은 ‘황해 문화’의 김명인 주간은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문학적 역량은 엄청난 성취를 이루고 누구에게나 인정받는 압도적 작가가 아니라면 늘 논란이 있기 마련이다. 문학 외적인 걸로 소외당하고 저평가 받는 것인지는 모호하다.

다만 이런 점은 있다. 고분고분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기회를 주지 않는다. 그 정도 수준의 작가가 많다면 다른 작가로 채우면 되니까. 문학지 섭외 리스트를 놓고 한 편집위원이 반대하면 굳이 다른 편집위원이 싸우면서까지 원고 청탁을 고집할 이유가 없다.

그게 쌓이다보면 결국 불러주지 않는 작가가 된다.” 이 역시 폐쇄성과 완결성이 결합된 형태다. 혹시라도 노력과 재능으로 이 문제를 헤쳐 나가면 되지 않느냐고 묻는 사람이 있다면 그 분은 헤밍웨이의 문체와 조지 오웰의 풍자와 톨킨의 상상력을 타고 나는 것이 별로 어렵지 않다고 믿는 사람일 것이다.

결국 문제는 남녀가 아니다

그렇다면 남성과 여성의 문제일까. 그건 더더욱 아닌 것 같다. 처음의 유명인 중심의 미투 고발은 슬슬 사회 전반으로 확산되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이주 여성, 장애인 여성, 비정규직 여성 근로자는 미투 운동의 사각지대다.

주변에 보험 설계 하는 여성이 있다면 한번 물어보시라. 남성 고객이라는 인간들이 시도 때도 없이 얼마나 식욕 넘치는 발언들을 해대시는지. 보험 일을 하는 한 여성은 소생에게 이런 한탄을 한 적이 있다. “밖에서 일할 때 음란문자 받는 것까지는 참을 수 있는데 집에서는 좀 안 받았으면 좋겠다.” 분노가 치밀어 올라 그 계약 당장 해지하라고, 내가 다 대신 들어주겠다는 소리를 할 뻔했다.

성(性)의 사각지대 역시 마찬가지다. 아직은 남성의 미투 고발이 흔치 않다. 연극배우 박성원 씨가 여자 선배에게 당한 성희롱을 페이스북에 올린 정도가 알려진 사례다. 여성에 의한 남성 추행에 이어 또 나올 만한 것이 남성에 대한 남성 혹은 여성에 대한 여성의 성폭력이다.

물론 한 여성 감독의 여배우 추행은 보도가 되긴 했지만 아직도 음지의 피해자는 많이 있을 것이다. 결국 문제는 개인도 아니고 남성, 여성도 아니고 그 본질은 결국 권력이다. 권력의 갑질이 미투 운동의 본질이란 얘기다. 폭로를 당한 가해자들이 꼭 하는 말들이 있다.

이들의 어록은 항상 비슷한 내러티브로 진행된다는 특징이 있다. ① 기억이 안 난다. ② (시간이 좀 지나고) 성관계는 있었지만 합의에 의한 것이었다. 안희정을 고발한 여성은 TV 인터뷰에서 “그 분과 제가 합의를 할 수 있는 관계인가요?” 라고 되물었다.

권력을 쥐고 있는 측은 절대 ‘합의’ 같은 단어를 쓰면 안 된다. 합의는 상어와 새우 사이에는 불가능한 콘셉트이다. 해서 그런 단어를 구사하면서 진짜로 스스로 그것을 믿는다면 그건 바보다. 알고 했다면 악질이다. 바보가 되거나 악질 소리를 듣지 않으려면 절대 ‘합의에 의한’ 따위의 발언을 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 이 문제가 권력의 문제라는 얘기다. 좀 더 확실하게 거부 의사를 밝혔으면 하는 분들도 있다. 이건 남성과 여성의 언어를 몰라서 하시는 말씀이다. 남성이 구사하는 언어와 여성이 구사하는 언어는 다른 게 아니라 아예 틀리다.

가령 구혼 하러 갔다가 여성의 “노”라는 대답을 듣고 바로 돌아서는 남성이라면 절대 결혼 못하고 평생 혼자 살아야 한다. 그래서 남성들은 여성의 언어가 어렵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도 실은 개소리다. 안 배워서 어렵지 배우면 반은 알아듣는다.

별로 재론하고 싶지는 않지만 안희정 사건을 다시 예로 들어보자. 안희정을 고발한 정무비서 김 씨는 아니라고, 모르겠다고 그의 면전에서 이야기 했다고 한다. 그게 자신의 위치에서 할 수 있는 최대한의 거부 표시였을 것이다. 그러니까 “모르겠어요(절대 하고 싶지 않아요)”라는 얘기다.

반면 안희정은 여성의 언어를 이해하고 수용하는 대신 남성의 언어로 듣고 이야기 했다. “내가 그게 너한테 상처가 된 것을 알게 됐다. 미안하다(그래도 할 거야).” 이 언어의 차이를 남성들은 이제껏 왜곡하고 스스로 믿어왔다.

포르노로 성교육을 받으면 이게 문제다. ‘여성은 처음에는 싫다고 하다가 결국은 흥분하여 남성의 목을 감싸 안는다’는 확신을 가지게 된다. 모두에게 불행한 일이다.

열린 XX와 그 적들

실제 행동으로 옳기지 않았으면 성추행이 아닐까. 이번 미투 운동을 보면서 이 분 이름이 나올 때가 됐는데? 했던 사람이 있다. 알고 보니 돌아가셨단다. 시인이다. 제법 알려진 이 사건은 지방지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한 신인 여성시인이 인근대학 교수, 후배 등과 가진 술자리에서 중견 남성 시인 박모 씨로부터 심한 모욕과 폭행을 당하고 성폭력 직전까지 갔던  사건이다.

다음 상황은 엉뚱하게 전개됐다. 피해자가 박 씨를 고소하고 여성신문 특집대담에서 박 씨에게 성폭행당할 뻔했다는 다른 여성문인들의 폭로가 잇따르자 박 씨는 ‘창작과 비평’ 게시판에 다른 중견여성시인 김모 교수에 대한 폭력적인 시를 게재했다. ‘오늘 외출했다가’라는 시의 부제목은 ‘開褓池와 眞-똥개’였다.

그러고도 직성이 안 풀렸는지 부부제목을 또 달았다. 부부제목은 ‘열린 褓池와 그 敵들’이었다. 부제목과 제목이 이 정도면 내용은 뭐, 말씀드리지 않아도 충분히 짐작이 가실 것이다. 이것은 성추행일까 아닐까. 소생은 성추행이라고 생각한다. 아니, 생각하는 정도가 아니라 확신한다.

더 악랄하고 더 비열하고 더 노골적인 성추행이 말로 하고 글로 쓰는 성추행이다. 얼마 전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유엔 여성 차별철폐위원회 회의에서 로스 헬퍼린 카나리 부의장은 “한국은 강간을 엄격하게 정의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느슨하다는 얘기다. 반드시 ‘폭행’이나 ‘협박’을 동반해야 강간죄가 성립되는데 그렇다면 데이트 강간은 전부 무죄라는 결론이 나온다.

이때 사용되는 법률 용어가 ‘비동의 간음’인데 반드시 없어져야 할 단어다. ‘매우 동의’ 혹은 ‘미친 듯 환호하며’ 같은 수식어가 붙지 않은 성관계는 뭐라고 변명을 해도 강간이다.

죄다 식상한 보도, 지겨운 진단이었지만 나름 신선한 시각도 있었다. 문화인류학자인 김은희는 이번 경우처럼 내부에서 쉬쉬하는 행태를 보고 루스 베네딕트가 분석한 ‘수치 문화’의 전형이라고 진단했다. 인간이 인간으로 태어나 필요한 만큼의 수치심을 느끼고 살겠다는데 그게 무슨 문제냐고? 문제다.

수치의 문화는 우리 것이 아니라 일본의 것이기 때문이다. 아시다시피 루스 베네딕트는 미국 군사 당국의 용역으로 일본인 연구를 한 사람이다.

그녀가 쓴 ‘국화와 칼’은 문화를 ‘죄의 문화’와 ‘부끄러움의 문화’로 구분하고 있다. 베네딕트는 도덕의 절대적인 기준이 정해지고 양심에 따라 유지되는 사회를 죄의 문화라고 정의했다.

그녀는 죄의 문화에서는 사람들이 윤리규범을 내면화하여(나름 기준이 있다는 얘기다) 윤리적 행동을 하는 데 반해 일본인들은 외면적인 강제가 없을 경우에는 윤리적 행동을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연구를 통해 추론했다.

그녀가 본 일본인은 죄의 중대함보다는 부끄러움의 중대함에 더 큰 무게를 두고 있었다(일본에는 가보지도 않았는데 참 대단한 통찰이다).

다시 말해 아무리 비도덕적인 짓을 하더라도 사람들 앞에 드러나지 않는 한 신경 쓸 필요가 없는 것이다. 들키지만 않으면이라는 가정 하에. 이게 수치의 문화다.

아직도 부끄러움을 모른다

한국 사회에는 익숙하지 않은 진단이었지만 우리는 알고 보니 수치문화 계열이었다. 미워하면서 닮는다더니 참 민망하다. 그래서 연극연출가인 윤호진은 ‘이유여하를 막론하고’라는 표현을 썼는지도 모르겠다.

왜 그래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상황이 수치스러우므로. 그래도 사과문 끝에 자기는 미투운동을 지지한다고 한 박재동 보다는 정신의학적으로 낫다. 그런데 갑자기 궁금해지네. 이 지경으로 사태가 확산되는데 청와대 탁 씨는 왜 안 나가는 거지? 혹은 왜 안 내 보내는 거지? 답은 간단하다. 그게 대한민국의 수준이라 그렇다. 그게 죄인지 몰라서 그렇다.

문제가 심각해지면 대충 사과하고 유야무야 끝내면 된다고 생각해서 그렇다. 고등학생 시절 여중생을 ‘따 먹고’ 친구들과 ‘공유’했다는 그의 발언은 심각하다(언어가 이렇게 무섭다. 윤간을 해 놓고 공유라니요) 또 사과할 일이 생기면 ‘합의’하에 따 먹고 ‘합의’하에 공유했다고 주장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강간은 단순히 여성의 성기에 남성의 성기로 가하는 물리적 폭력이 아니다. 그것은 여성의 영혼을 면도칼로 찢는 인간성 말살 범죄다. 

남정욱 문화평론가·대한민국 문화예술인 공동대표
남정욱 문화평론가·대한민국 문화예술인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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