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세의 명재상 이준경 (李浚慶)
난세의 명재상 이준경 (李浚慶)
  • 이한우 미래한국 편집위원·논어등반학교장
  • 승인 2018.03.23 2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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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명재상을 찾아서

오랜 폭정이 난무하면서 썩어 문드러진 명종(明宗) 시대를 지나면서도 인재는 남아 있었다. 영의정 이준경이 대표적인 경우다. 그는 말 그대로 진흙탕 속의 진주였다. 이준경(李浚慶 1499∼1572년)은 세조와 성종 때 크게 번성했던 광주(廣州) 이씨의 후손이었다. 증조할아버지 이극감은 형조판서를 지냈고 할아버지 이세좌도 중추부 판사를 역임했던 조정대신이었다.

그의 아버지 이수정은 홍문관 부수찬을 지냈다. 그의 나이 6살 때, 즉 연산군10년(1504년) 갑자사화가 일어났다.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이에 연루되어 유배를 갔으나 2년 뒤 중종반정이 일어나는 바람에 풀려날 수 있었다. 어려서부터 집안의 분위기가 어떠했으리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실록은 “준경은 어릴 때부터 뜻이 높고 비범하였으며 체격이 웅대하여 많은 선비들 사이에 이름이 있었다”고 평하고 있다.

다른 사람들에 비해 다소 늦은 중종26년(1531년) 문과에 급제해 주로 홍문관에서 경력을 쌓았다. 1533년에는 1519년에 일어난 을묘사화로 화를 당한 사림들의 신원(伸寃)을 주장하다가 파직되어 5년 동안 독서를 하며 지내기도 했다. 강직하기로는 그의 형 이윤경이 한 수 위였다. 두 사람 모두 관리로서 청렴과 엄중함이 뛰어나 두 봉황새라는 뜻에서 ‘이봉(二鳳)’으로 불렸다.

1537년 호조좌랑으로 복직한 후 홍문관과 사헌부 등의 요직을 두루 거쳤고 성균관 대사성에까지 올랐다. 흥미로운 점은 이런 강직한 성품에도 불구하고 문정왕후와 윤원형이 설쳐대던 명종정권 하에서도 승승장구했다는 것이다. 명종3년에는 요직 중의 요직인 병조판서에까지 올랐다. 한때 윤원형과 가까운 이기의 모함을 받아 충청도 보은으로 유배를 가기도 했지만 이듬해 풀려났고 그후 형조 병조 이조 공조 판서 등을 두루 역임한다.

명종10년 을묘왜변이 일어났을 때는 도순찰사를 맡아 성공적으로 왜적을 물리쳤다. 이 공으로 우찬성에 올랐고 이후 좌찬성, 우의정, 좌의정을 거쳐 1565년(명종20년) 마침내 영의정에까지 이른다. 여기서 의문이 든다. 이런 강직한 인물이 어떻게 윤원형의 공세를 피할 수 있었을까? 그것은 을사년(1545년) 인종이 사망한 직후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때 신하들은 문정왕후에게 알리지도 않고 윤원형의 형 윤원로를 제거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당시 한성부 우윤이던 이준경은 “대비가 위에 계시는데 어찌 품의하지도 않고 마음대로 그 동기를 주살할 수 있겠는가?”라고 반대해 논의를 중단시켰다. 이 일이 아니었으면 그도 을사사화의 희생자가 되었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이 일을 윤원형이 고맙게 생각해 평안감사로 좌천시키는 선에서 마무리했고 그후 정승에까지 오를 수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준경이 윤원형에게 아부를 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실록은 “준경은 조정에서 꼿꼿하게 집정(執政)하며 끝내 굽히는 일이 없었다”고 적고 있다. 윤원형으로서도 함부로 할 수 없는 대단한 카리스마의 소유자였던 것이다. 이준경을 기억해야 하는 첫 번째 이유는 명종이 급서(急逝)하는 바람에 왕위에 공백이 생길 뻔했으나 영의정으로도 공평무사하게 새 임금을 뽑아올린 점이다.

이런 경우 흔히 신하들은 자신들이 즉위 과정에서 세운 공로를 내세우려 하지만 이준경은 당연한 일처리라 여겨 조금도 자신을 내세우지 않았다. 그렇게 해서 명종의 뒤를 이은 인물이 문제의 선조(宣祖)다. 선조의 집권에 결정적인 공을 세운 이준경은 원상(院相)이 되어 미숙한 선조가 국왕으로서 자리잡는 데 결정적인 도움을 준다. 그는 선조1년 기묘사화로 화를 입은 조광조의 관작(官爵)을 늦게나마 추증했고 노수신, 유희춘 등 을사사화의 피해자들을 유배에서 풀어주고 관작을 회복시켜줬다.

이준경(李浚慶)초상 / 경기일보
이준경(李浚慶)초상 / 경기일보

선조를 왕으로 추대한 것 그리고 훈구세력을 내몰고 그 자리에 사림세력을 세운 것이 과연 조선 역사를 더 빛나게 했는지에 대해서는 분명 논란이 있겠지만 그것은 당시로서는 누구나 바라던 일이었고 이준경은 강한 의지와 노련함으로 그 문제를 해결했다.

선조5년 7월 영의정에서 물러나 있던 이준경도 눈을 감는다. 그리고 “이 늙은이 흙 속으로 돌아가며 전하께 4건을 당부드립니다”로 시작하는 유명한 유언을 남긴다. 거기에는 자신이 국왕으로 만든 선조에 대한 이준경의 솔직한 인식과 앞으로 예상되는 문제가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다.

선조에게 유언한 ‘제왕의 처세’

“첫째, 제왕은 무엇보다 학문하는 일이 가장 큽니다. 정자(程子)가 ‘함양 공부는 경(敬)으로 해야 하고 학문을 진취시키려면 치지(致知)해야 한다’ 했습니다. 전하의 학문은 치지의 공력 면에서는 보통 이상의 수준이라고 하겠지만 함양의 힘은 미치지 못하는 점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말을 하는 것이 매우 준엄하시고 아랫사람을 대할 때 포용하고 공순한 기상이 적으시니, 전하께서는 이 점에 더 노력하소서. 둘째, 아랫사람을 대할 때는 위의(威儀)가 있어야 합니다. 신은 듣건대, ‘천자는 목목(穆穆-단정하고 엄숙한 모습)하고 제후는 황황(皇皇-활달하고 생기가 넘치는 모습)하다’고 했으니, 위의를 차리시는 일을 삼가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신하가 진언하는 경우에는 마땅히 너그러이 포용하여 예우해 주셔야 합니다. 아무리 뜻에 거슬리는 말이 있더라도 때로 영기(英氣)를 드러내 주의를 환기시키는 일은 있으실지언정, 사사 건건 직설적으로 드러내면서 스스로 잘난 체하는 것을 아랫사람들에게 보여서는 안 됩니다. 계속 지금처럼 하신다면 백관이 맥이 풀려 수없이 터지는 잘못을 이루 다 바로잡지 못할 것입니다. 셋째, 군자와 소인을 분간하는 일입니다. 신은 듣건대 군자와 소인은 본디 정해진 명분이 있어 숨길 수 없다고 했습니다. 옛날 당 문종(唐文宗)이나 송 인종(宋仁宗)은 애당초 군자와 소인을 모르지는 않았으나 사당(私黨)에 이끌려 그들을 분간하여 쓰지 못했기 때문에, 마침내 시비에 어두워져 조정이 불안정한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참으로 군자라면 아무리 소인이 공격하는 일이 있더라도 뽑아 써 의심하지 마시고, 참으로 소인이라면 비록 사정(私情)이 있으시더라도 단호히 물리쳐 멀리하여야 합니다. 이와 같이 한다면 어찌 하북조정(河北朝廷-당파싸움이 심했던 중국의 북송)과 같은 어려움이 있겠습니까. 넷째, 사사로운 붕당을 깨뜨려야 합니다. 신이 보건대, 오늘날 사람들은 간혹 잘못된 행실이나 법에 어긋난 일이 없는 사람이 있더라도 말 한 마디가 자기 뜻에 맞지 않으면 배척하여 용납하지 않으며, 행검을 유의하지 않고 독서를 힘쓰지 않더라도 고담 대언(高談大言)으로 붕당을 맺는 자에 대해서는 고상한 풍치로 여겨 마침내 허위 풍조를 빚어내고 말았습니다. 군자는 모두 조정에서 집정(執政)하게 하여 의심하지 말고 소인은 방치하여 자기들끼리 어울리게 해야 하니, 지금은 곧 전하께서 공정하게 듣고 두루 살펴 힘써 이 폐단을 없앨 때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끝내는 반드시 국가의 구제하기 어려운 걱정거리가 될 것입니다.”

하나하나가 다 인간 선조를 꿰뚫어본 조언(助言)이었다. 어쩌면 이미 선조가 5년여의 집권기간을 통해 보여주고 있는 병폐였는지 모른다. 다른 사람이 이런 글을 올렸더라면 죽음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이한우 미래한국 편집위원·논어등반학교장 고려대 영문학과 졸업조선일보 논설위원·문화부장 역임
이한우 미래한국 편집위원·논어등반학교장
고려대 영문학과 졸업
조선일보 논설위원·문화부장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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