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가 출신 이명박 대통령의 리더십
기업가 출신 이명박 대통령의 리더십
  • 이주천 이승만포럼 공동대표. 전 원광대 교수
  • 승인 2018.04.05 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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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정권은 새로 재원을 투입해 보강공사를 통해 4대강의 수질 오염을 막는 장치를 하지 않고 환경단체와 야당의 공세에 발맞춰 예산 삭감으로 4대강 사업을 방치하고 말았다, 이명박 입장에서는 선전포고나 다름없었다. 100여 년 전 흥선대원군과 며느리 민비의 권력 투쟁이 일제라는 외부의 적에 둔감한 채 급기야 조선 멸망의 단초를 제공한 것처럼 두 보수 대통령 간의 갈등은 현재의 비극을 재현한 것이 아니라고 볼 수 있겠는가?

321일 이명박 전 대통령(이하 직함 생략)이 결국 구속되었다. 시민단체에서는 특별한 성명도 없었고 국민들은 무관심했다. 한국에서는 전직 대통령이 인기가 없다는 점이 새삼 확인되었다.

검찰은 다스의 실소유주가 이명박으로 보고 집요하게 추적했다. 검찰은 무려 8만 쪽의 증거 서류를 가지고 이명박 구속을 강행했다. 이것은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정국 이후 문재인 정권 초기의 예상된 수순이었다.

이것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검찰 출두-봉하마을의 투신자살사건에 대한 정치 보복의 성격이 강하다. 그 이유는 문재인 대통령이 노무현 정부 시절 비서실장을 역임했으며, 누구보다도 노 전 대통령의 자살을 애통해했기 때문이다.

문 대통령의 회고록 <문재인의 운명>이 노 전 대통령의 자살사건으로 시작하는 것을 보면 그에게 준 정신적 충격을 알 수 있다(‘만남그 날 아침).

또한 이명박의 구속은 5공의 전두환, 6공의 노태우 대통령이 차례로 구속된 것과 유사한 상황으로 이는 박근혜 이명박 두 대통령을 구속으로 적폐세력의 청산이란 구호에 걸맞게 민심의 이반을 가져오게 유도해 보수의 씨를 말리면서 좌익의 장기 집권이 가능하다는 정치적 의도가 강하게 깔려 있다.

이명박은 어떻게 성공했으며 왜 몰락했나? 이명박에 대한 첫 번째 운명의 만남은 서울이 아니라 전북 익산에서 시작되었다. 그는 200711월 원광대 경상대학 초청 강연회에서 1시간 이상 연설을 했다.

심지어 중학교 시절 배고픔에 못이겨 여고 앞에서 풀빵 장사까지 한 이야기를 솔직하게 털어 놓았다. 그는 가난 때문에 고등학교를 진학하지 못했는데, 담임선생님이 부모님에게 권유해 야간고등학교를 다니게 되었다.

려대 시절에는 청계천에서 학비를 벌기 위해 새벽 일찍 나와서 청소작업을 했다는 말을 듣고 나도 모르게 눈시울을 적시었다. 그는 청소년들에게 일자리에 대한 정책을 설명하면서 4대강 사업의 필요성에 대해 역설했다.

그 강연을 듣고 필자는 이명박과 최초의 상견례를 가졌으나 호감이 가는 인상은 아니었다. 어쨌든 강연 소감은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이명박은 이념형이 아닌 실무형 정치가의 면모를 여지없이 드러냈다.

경제 전반과 기업 실무에 대해서 해박한 지식을 과시했기에 차라리 대통령보다는 상공부 장관이나 경제기획원 장관이면 적당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둘째, 북한의 처참한 인권 문제나 한반도 통일 문제에 대한 인식의 심각성이 부족했으며 현재의 위기와 나라가 나아가야 할 총체적 비전의 제시에서는 미비했다.

2인자의 성공신화

집안이 찢어지게 가난했던 이명박은 학생운동권기업가정치인으로 변신에 거듭해 나름대로 성공한 입지전적 인물이다. 고려대 경영학과 시절 1964년 한일협정과 한일 국교에 반대하는 6.3사태 주모자의 한 명이었다.

그는 도피했다가 3개월의 형을 살았다. 그후 질병을 이유로 군 면제를 받았고, 현대건설에 입사해 사우디 등 건설 현장에서 오랫동안 근무했다.

그 과정에서 이명박은 비록 생활이 어려웠던 가정 형편으로 운동권 동지들과 행동을 함께 하지 못한 점에 대해 깊은 죄책감을 가지게 되었고 이것은 후일 민주화를 위해 투쟁한 소위 운동권에 대해 우호적 인식을 갖게 되는 토양이 된다.

눈치가 빠르고 부지런한 그는 현대그룹 사장인 정주영의 눈에 들어 발탁되었으며 고속승진을 거듭해 현대건설 사장을 역임, 현대그룹의 명실상부한 2인자가 되었다.

1990년 정주영 회장이 신당을 창당해 대선 출마를 선언하고 그의 보좌를 요청했지만, 이를 거절하고 독자적 정치의 길을 가게 되었다. 이명박은 기존 정치권의 파쟁과 비효율성에 염증을 느끼고 있었고 이를 타파하는 것이 정치 지망의 목적이라고 유권자에게 설득했다.

그 설득이 주효했는지 199615대 총선 때 종로에서 출마해 노무현, 이종찬을 제치고 당선되었다. 그의 인생에서 가장 화려했던 시절은 서울시장에 재직하면서 청계천 고가도로를 없애고 오늘날의 청계천 광장을 만들었으며, 버스전용차로를 만드는 획기적인 교통체계를 정착시킨 일이다.

여기서 서울시장 이명박은 탁월한 일꾼의 역량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시장 시절 박원순의 아름다운재단에 월급 전액을 기증하기도 했다.

이명박 시장은 서울 시민들의 높은 지지를 얻게 되자 대권 경쟁에 뛰어들었다. 그는 박근혜 후보와의 경선에서 당내 경선에서 뒤졌으나 여론조사에 앞서면서 극적으로 역전, 한나라당 대선 후보에 당선되었다.

경선 과정과 대선 출마 시절 꼬리표처럼 따라다녔던 문제가 다스와 BBK의 실소유자가 그가 아닌가에 대한 의혹이었다.

이명박은 이 위험한 고비를 용케도 잘 넘겼고, 국군의 베트남 파병에 대한 용병론과 북한에 전기 200kw를 지원할 수 있다는 공약을 발표한 야당의 정동영 후보를 48.7%의 유권자 지지와 500만 표의 차로 누르고 집권에 성공했다.

필자가 이명박으로부터 가장 큰 실망감과 배신감을 받은 계기는 그가 취임식에서 중도실용주의를 국정기조로 천명하면서부터였다. 첫 내각도 중도성향의 일꾼으로 채워졌다. 중도실용주의는 잔뜩 기대감에 부푼 보수와 뉴라이트에게는 날벼락이었고 깊은 배신감을 안겨줬다.

국정운영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한 실용주의는 그래도 이해가 되었다. 그러나 중도노선은 정치인 이명박이 해방정국 이후 치열하게 전개된 좌우익의 대결 양상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김대중-노무현 정부 등으로 인해 깊게 드리워진 한국 사회의 좌경화의 부작용을 깊이 인식했다면 중도의 천명은 신중했어야 했다. 집권 초기 부드러운 대변인출신인 홍보수석 박형준의 능변으로 중도실용주의의 불가피성을 설명하는 데 많은 시간을 들었으나 지지층은 냉담해졌다.

그 때 필자는 원광대 학생회관에서 처음 조우했던 이명박 후보를 다시 상기해내면서 분개했다. “역시 이 정도밖에 안 되는 장사꾼 정치인이었던가?”

두 번째 실망은 봄부터 몰아닥친 미국산 쇠고기 광우병 난동사건에 대한 미온적인 처리였다. 언론 매체들은 수개월 동안 야밤의 실황 방송을 통해 이명박 정권을 코너에 몰기 위해 광분했다. 대통령은 자신의 심정을 몰라주는 촛불세력들의 행동을 한탄하면서 청와대 뒷산에서 아침이슬을 불렀다고 한다.

지난 3월 23일 이명박 전 대통령이 23일 서울 강남구 논현동 자택에서 나와 서울동부구치소로 향하고 있다. / 연합
지난 3월 23일 이명박 전 대통령이 23일 서울 강남구 논현동 자택에서 나와 서울동부구치소로 향하고 있다. / 연합

이런 허약한 행동은 또한 지지세력을 분노하게 만들었다. 이미 촛불은 미군 장갑차에 의해 우발적 교통사고가 났던 효순이, 미선이 사건에서 세력을 불리고 재미를 톡톡히 봤다

그런 점에 이 대통령은 일국의 지도자로서 강력한 대응 의지가 결여되어 있었다. 당연히 정권의 눈높이에 맞춰 사법부는 징계와 면직 등 솜방망이 처벌에 그치고 말았다.

상황은 알았지만 대응은 소극적

그렇지만 집권 초기에 당한 광우병 사태로 인한 학습효과가 있었다. 이 대통령은 날로 발호하는 국내의 반체제세력에 대해 심각성을 인식했으며 북한의 천안함 폭침-연평도 포격사태에 대한 근본적인 대북정책의 마련이 필요했다.

그러나 개성공단의 폐쇄조치나 공중보복 포격을 할 수도 있었지만 일체의 보복을 피해갔다. 자신의 손에 흙이나 피를 묻히지 않으려는 영리한 처세술은 가난 속에 살아남기 위한 생존의 몸부림 속에서 싹 텄으며 현대그룹의 치열한 경쟁 속에서 습관처럼 고착되었다.

이명박은 2인자일 때 가장 성공적이라고 평가를 받았다. 현대그룹에서 성공해 2인자의 지위에 올라갔으며, 정계에 입문해서도 국회의원 시절보다는 서울 시정을 책임지는 행정가(서울시장)로서 나름대로 업적을 쌓았다.

그러나 이런 처세술은 대한민국과 같이 반체제세력이 발호하고 북한의 공산세습독재정권과 치열하게 맞서야 하는 분단국가의 국가지도자의 덕목을 높고 볼 때 치명적 결함이 된 것이다.

김대중-노무현 좌파정권 10년 동안을 거치면서 인터넷 사이버 영역에서 북한의 소행으로 의문이 가는 댓글이 엄청나게 증가하면서 우리 여론을 좌편향하는 데 일조했다.

이런 문제들의 심각성을 인지한 이 대통령은 자신은 4대강사업에 올인하는 한편, 신임 원세훈 국정원장에게 반체제.종북세력의 척결에 전권을 맡겼고, 대한민국 정체성의 회복을 위한 대책을 취했지만 시민단체와 야당의 정치 공세로 소극적 대응에 그치고 말았다.

막중한 임무를 부여 받은 원세훈 원장은 역대 국정원장 중에서 가장 부지런하고 일을 많이 한 국정원장으로 기록을 세웠지만 그 덕분에 댓글과 국내정치 개입의 국정원법 위반을 핑계로 한 야당의 공세로 구속당하게 비운을 맞게 되었다.

2008년 여름 광우병 난동이 진정되었을 무렵 필자는 뉴라이트 회원으로서 청와대에 초대를 받았다. 청와대 경내에서 노닐고 있는 꽃사슴을 처음으로 봤다. 200명이 넘는 인사들이 청와대에 가서 뷔페를 먹었고 시계 등 간단한 선물을 받았다.

식사 전에 이 대통령은 20분간의 모두 인사말이 있었는데 대부분을 광우병 사태에 대해 할애했다. 그는 광주에 사는 초등학교 학생이 보낸 편지에서 광우병 겁이 나서 소고기를 먹지 못했다고 했기에 한탄을 금치 못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 대통령은 어떻게 대한민국 체제를 능멸하는 반체제세력에 맞서 단호하게 처벌하는 점에 대해서는 언급을 회피했다. 이 점이 그의 약점이고 한계였다.

그는 사업가의 체질이 몸에 배었다. 그러므로 고객의 감정을 상하게 해서도 안 되고 기분 나쁘다고 내쳐도 안 된다. 그런 습성이 어느덧 그의 몸에 깊이 배어 있었다. 그는 스스로 타인에게 모질게 대하지 못하는 것이 천성이라고까지 말했다.

일하는 대통령, 정치가 대통령

이 대통령의 목표는 다름 아닌 열심히 일하는 일꾼 대통령이었다. 그는 마치 중도실용주의 천명에 대한 뉴라이트의 실망을 만회하려는 듯 아침 5시 기상, 7시 집무실로 향해 밤낮으로 부지런히 일했다. 주군이 너무 부지런하면 가신들이 피곤한 법이다.

불가피하게 비서들은 7시에 청와대 근무실로 와야 했고 늦게까지 근무할 수 밖에 없었다. 청와대 인근 오피스텔은 호황기를 맞이했으나 부부 생활의 사생활 침해가 심각했다.

일하는 대통령이명박의 빛나는 실적은 국내적으로는 무엇보다 4대강 사업으로 가뭄과 홍수를 예방한 성과를 부인할 수 없다. 이 점에서 국내 언론들은 그의 공적을 인정하는 데 지나치게 인색하다. 시간이 흐르면서 4대강 사업은 부실화되었다.

그 이유는 박근혜 정권부터 4대강 사업을 보강 보수하는 것이 아니라 내팽개쳤기 때문이다. 미투사건으로 사임한 안희정 전 충남지사도 가뭄과 홍수의 피해가 적어지자 4대강 사업의 유효성을 인정한 적이 있다.

또 대외적으로는 아랍에미레이트 원전 수주 등 해외세일즈 외교의 개가였고(200억 달러.21조 원) 그의 국제수지도 많이 개선되었다.

현재 보수에서 언급되는 이명박의 최대 과오를 탄핵정국 시에 보여준 전직 대통령으로서의 부적절한 처신으로 꼽고 있다. 친이계가 당론을 이탈해 국회에서 대통령 탄핵을 찬성한 것이다. 그들은 신당을 차려 보수를 분열시켰다.

그런 반란의 배후에 이명박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탄핵정국 과정에서 이명박은 기자회견에서 박 대통령을 비판했고, 이것이 결국 국회에서 친이계의 탄핵 찬성을 부추겼다고 보는 것이다.

이명박은 박을 탄핵한 뒤에 다음 차례가 자기 차례라는 점도, 내친 김에 부패세력으로 몰아 보수 궤멸을 노린다는 점도 깨닫지 못했을까? 야당이 원세훈 국정원장의 댓글 문제를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을 때 최종 칼날은 이명박을 향하고 있었던 것이다.

곰곰이 돌이켜보면 이명박과 박근혜의 관계는 대선 후보 경선 과정에서 지울 수 없는 피를 흘렸고, 이 때 두 대선 후보는 넘을 수 없는 다리를 건넜다는 것이 정계의 중론이다. 둘은 성격과 취미는 물론 출신 배경부터 물과 기름처럼 융화되기 어려웠다.

이명박은 내심으로는 박근혜를 부친 박정희 이름 덕에 권세를 누리는 공주마마로 봤고 박근혜는 이명박을 처세술에 능한 장사꾼 정치인으로 경멸했다. 경선 과정에서 이전투구식 폭로전에서 이명박은 급기야 박근혜의 아킬레스건을 건드리고 말았다.

바로 최태민 파일이다. 박의 캠프는 이명박의 승리가 최 목사 파일을 인터넷 공간에서 띄우면서 반박(反朴) 여론을 만들었기 때문이라고 믿었기에 양자 간 감정의 골은 더 깊어졌다.

아니나 다를까? 박근혜 대표는 2008년 여름 광우병 사태에서 촛불에 동정적 표현을 했고, 세종시로의 이전 찬성을 표명해 이 대통령의 심기를 건드렸으며 집권 초기 4대강에 대한 유보적 입장을 넘어서서 부정적 시각의 감사원 보고서가 제출된 점, 해외자원 투자에 대한 검찰수사 등으로 이 전 대통령을 크게 분개하게 만들었다.

그는 박근혜의 재집권을 가능하도록 한 것이 그래도 국민들이 자신의 업적을 인정했기 때문이라고 봤다. 자기의 5년간 치적을 뒤집어버리는 것은 정치적 배신행위로 봤다. 특히 4대강 사업은 그의 트레이드 마크였으니 그의 분노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하고도 남는다.

박근혜 정권은 새로 재원을 투입해 보강공사로 4대강의 수질 오염을 막는 장치를 하지 않고 환경단체와 야당의 공세에 발맞춰 예산 삭감으로 4대강 사업을 방치하고 말았다, 이명박 입장에서는 선전포고나 다름없었다.

결국 이.박의 권력 투쟁은 재현되었고 개헌 논의와 공천 문제, 탄핵 찬성으로까지 비화된 것이다.

100여 년 전 흥선대원군과 며느리 민비의 권력 투쟁이 일제라는 외부의 적에 둔감한 채 급기야 조선 멸망의 단초를 제공한 것처럼 보수 대통령 두 사람의 갈등은 역사적 비극을 재현한 것이 아니라고 볼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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