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영세의 독일 통일 이야기 - 이중결정(서독판 사드논쟁) "크레펠트 호소문"
권영세의 독일 통일 이야기 - 이중결정(서독판 사드논쟁) "크레펠트 호소문"
  • 미래한국
  • 승인 2018.04.10 0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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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초 서독 경제는 여전히 1978-9년의 유가파동의 여파를 회복하지 못하고 침체에 빠져 있었습니다. 실업률은 증가하고 물가는 오르고 도산하는 기업들의 숫자는 늘어만 갔습니다. 이런 경제 침체에 대한 서독주민들의 위기감은 좌,우파에 따라 다른 양상으로 표출됩니다. 우선, 우파의 반응은 외국인 혐오증(Xenophobia)였습니다. 서독거주 외국인의 1/3 가량을 차지하는 터키인이 주 대상이었지만 아시아, 아프리카인들도 예외가 아니었지요. 좌파의 대응이 특히 주목할만 했습니다. 
 

전 국회의원, 전 주중대사 권영세
전 국회의원, 전 주중대사 권영세

이들은 반핵, 반전 평화운동, 반미운동이나 새로운 개발프로젝트에 대한 거부 등 다양한 모습을 보였는데, Brokdorf의 원전건립 현장이나 Frankfurt 공항의 신활주로 건설현장, Berlin, Hamburg, Freiburg등의 불법점거시설 단속 현장, 심지어 Bremen의 신임장교 선서식에 이르기까지 사회의 이목을 끄는 곳 중에 좌파시위대들이 나타나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베트남전 이후 본격적으로 시작된 반미운동은 보수적인 반공주의자 레이건이 대통령에 새롭게 취임이후 점차 심해지게 되었고, 따라서 미국의 신무기를 도입하려는 NATO의 이중결정은 여러 면에서 좌파들의 좋은 타겟이 됩니다. 레이건이 1983년 3월에 발표한 전략적 방어구상(SDI; 일명 'Star Wars')은 미국민들만을 위한, 즉 서유럽 국가들에게는 제공되지않는 내용이라 이중결정을 비판하는 평화주의자들에게 또 하나의 구실을 제공하지요. 

중구난방으로 행해지던 서독의 평화운동을 하나로 묶어내는 데에는 1980년 11월 소위 '크레펠트 호소, 또는 선언(Krefeld Appeal, Krefeld Appell)이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됩니다.  이 호소 또는 선언은 일군의 평화운동가들이 Nordrhein-Westfalen주 서부의 유서깊은 공업도시 Krefeld에 모여 논의한 결과를 정리한 것으로서 NATO국가들이 이중결정을 취소하고 먼저 일방적으로 군비축소할 것, 미국의 핵무기를 유럽지역으로부터 철수할 것 등이 주요 내용이었는데 동유럽 내 소련의 핵무기에는 아무런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 편향적인 것이었음에도 1983년 가을 무렵까지 녹색당의 창립자 중 한명인 Petra Kelly, 연방군 예비역 장성으로 '평화를 위한 장성모임' 창립자인 Gert Bastian - 이 둘은 동지이자 애인이었는데 1992년 10월 동반자살로 의심되는 의문사로 생을 마감하지요 - 을 포함하여 500만 가까운 인원이 서명에 참여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당시에는 이 호소문의 실제 저자가 누구인지를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통일 이후 공개된 독일비밀경찰 Stasi의 문서에 따르면 Markus Wolf가 이끄는 Stasi 내 소위 '계몽국(enlightenment department)'은  서독 내 동독공산당의 위장정당인 '독일평화연합(German Peace Union), 독일 공산당(German Communist Party)등을 내세워 이 평화운동을 전개시켰고 비공산주의자 포섭을 주목적으로 삼아 위 크레펠트 호소문도 일반 서독주민들에게 호소력있는 말투로 쓰도록 시켰다고 합니다(Heinrich A. Winkler, Germany: Long Road West vol. 2 kindle edition, Loc 7779 이하 참조)

당시 여당인 사민당 내 사정도 복잡하였습니다. 1980년 12월 사민당 의원 150여명이 NATO의 이중결정을 '위험한 결정'이라고 비판하는 '빌레펠트 선언(Bielefeld declaration)에 서명자로 참여합니다. 당시 총리로서 여론의 높은 지지를 받고 있던 헬무트 슈미트는 사민당이 NATO의 이중결정을 지지하지 않을 경우 총리직을 사임하겠다고 으름장을 놓는데, 그 주 대상은 사민당 정치인들 중에서도 특히 좌파계열인 Erhard Eppler - 이 사람은 사실 보수당 CDU에서 정치를 시작하였지요 - 와, Oskar Lafontaine - 이 분은 결국 사민당에서도 나와 '좌파당(The Left; Die Linke)'를 창당하지요 - 그리고 빌리 브란트 전 총리였습니다.

슈미트 총리가 사민당이 평화운동측과 지나치게 가까와지는 것을 경계한 반면, 브란트 전 총리는 동구 전역에 걸쳐 배치된 소련의 SS-20 미사일의 위험성보다도 오히려 국내정치적으로 평화운동의 주도권을 녹색당에게 빼앗기는 부분을 더 우려했다고 합니다. 슈미트 총리는 위 Eppler에게 1981년 10월 Bonn에서 열릴 예정인 대규모 반핵, 평화 집회에서 발언하지 말아달라고 요청하지만, 그는 직전 총리 브란트의 '권유'에 따라 50여명의 동료 사민당 의원들과 함께 참석하여 발언을 하지요

사민당의 이와 같은 좌경화는 연정 파트너인 자민당의 이탈을 초래하여 결국 또 다른 헬무트, 기민당의 헬무트 콜에게 정권을 넘겨주게 되지요.  NATO의 이중결정을 둘러싼 서독내 상황을 쭉 따라가다 보면 아직도 분단상황을 겪고 있는 우리로서는 곳곳에서 어떤 데자뷰를 느끼게 되지요... 제가 서독 분단사에 관심을 가지게 된 이유이기도 합니다.       

전 국회의원, 전 주중대사 권영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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