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편전쟁은 문명 충돌이었다
아편전쟁은 문명 충돌이었다
  • 한정석 미래한국 편집위원
  • 승인 2018.04.16 1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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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비평] 전근대적 중국의 낡은 질서가 영국의 법치라는 근대 합리주의와 부딪히면서 벌어져

1840년 영국과 청제국 간에 벌어진 아편전쟁은 근대 중국이 서구 열강에 무릎 꿇는 수모를 당했던 대표적인 사건으로 우리에게 알려져 있다.

동시에 아편전쟁은 근대 제국주의 영국이 중국인들에게 더러운 무역으로 치부하려 했던 이기적인 상거래였으며 이는 서구 열강의 부도덕함을 드러내는 사건으로도 인식되어 왔다.

그러한 아편전쟁의 이야기는 진실일까. 하버드대 유럽연구센터 방문교수인 호주의 헤리 겔버(Harry G. Gelber) 박사의 주장은 우리의 기존 인식을 뒤엎는다.

2004년 <아편, 군대 그리고 선교사들 : Opium, Soldiers and Evangelicals>이라는 책에서 그는 아편전쟁이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적 사실과 상당히 다르다는 점을 면밀히 추적해 냈다.

결론부터 말한다면 영국이 청제국에 대해 전쟁을 결심하게 된 것은 청의 당국과 군인들이 영국의 아편들을 압수해 불 질렀기 때문이 아니라 광동에 거주하고 있던 영국 시민들, 특히 부녀자들과 아이들마저 총칼로 위협하고 고립시켜 식량 조달마저 끊었다는 점,

그리고 재판 없이 상인들을 처벌하는 행위에 영국 의회가 ‘왕권에 대한 도발’로 간주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점에서 겔버 교수는 우리에게 분명히 인식해야 할 팩트를 제시한다.

무엇보다 청제국이 금지했던 것은 아편무역이지, 아편 그 자체가 아니라는 것이 중요한 역사적 팩트다. 실제로 아편은 영국과 청이 전쟁을 시작한 1940년 이전과 그 이후에도 사용 금지가 아니었다.

다시 말해 청제국은 중국인들에게 아편 사용을 금지한 것이 아니라 아편 수입을 금지했던 것이다. 이 점은 의문을 낳는다. 당시 청제국은 만연한 아편으로 인해 노동력 상실과 사회 기강의 문란을 겪고 있었다.

특히 아편을 판매하는 중국인들은 영국 상인들로부터만 아편을 조달받은 것이 아니라 중국내 여러 지역에서 아편을 조달했다.

아편 재배는 허용하고 아편 수입은 금지했던 황제

당시 청제국은 민간에서 아편을 재배하거나 사용하는 것을 불법화하지 않았는데  이러한 까닭에 내륙의 아편 재배와 오늘날 ‘황금의 삼각지대’라 불리는 중국, 태국, 라오스, 미얀마에 국경을 접한 고원지대로부터도 막대한 아편이 중국으로 흘러들어왔다.

이러한 점은 이 지역 해안 국경을 담당하던 관리들이 막대한 부를 축적했던 사실들로부터 추론된다. 그러한 곳에서 영국 상인들은 무역거래를 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왜 청제국은 영국의 아편 거래만을 특정하여 제재를 가하려 했던 것일까. 여기에는 중요한 이유가 있다.

청제국은 중국인들의 아편 중독이 문제여서가 아니라 막대한 은이 아편무역으로 유출되면서 심각한 무역적자와 세수 부족을 우려했다. 청제국이 정작 아편의 내수와 재배를 허용하면서도 영국과의 아편 거래를 금지시키려 했던 이유는 아편 수입에 대한 결제로 막대한 은이 유출되고 있는 점을 우려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그렇다면 청 황실의 그러한 판단은 옳은 것이었을까. 겔버 교수는 청 황실의 판단이 틀렸다고 주장한다. 그 이유는 영국 아편상들이 아편을 팔아 얻은 은을 가지고 다시 중국의 차를 수입해서 영국에 실어 보냈기 때문이다. 영국 무역상들이 청에 판 아편 대금은 다시 차 수입 대금으로 청의 상인들에게 들어간 것이다.

그렇다면 왜 청 황실은 은의 부족을 심각하게 여겼던 것일까. 이 점에 대해 겔버 교수는 당시 청제국의 상황이 정치적으로 혼란했고 부패한 관리들로부터 재산을 감추기 위해 중국 상인들이나 민중들이 화폐 역할을 하던 은괴를 많이 감췄던 것으로 봤다.

이렇듯 은을 매개로 한 영국과 청의 상인들 간에 아편-차의 교역량은 엄청나게 늘어났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자 청의 황제 도광제는 임칙서를 특사(흠차대신)로 파견해 광주의 아편 거래를 막게 했다.

1839년 정월 광주에 도착한 임칙서는 외국인에게 남은 아편을 관청에 넘기고 다시는 아편을 판매하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제출하도록 고시했다.

이에 영국 무역상들은 당시 통상 감독 엘리어트의 권유에 따라 아편 2만80상자를 내놓았다. 엘리어트는 예고 없던 이러한 청의 압수에 대한 보상을 영국 정부로부터 받을 수 있다고 판단했지만 영국 의회는 사(私)무역에 보상을 할 수 없다는 결정을 내렸다.

결국 엘리어트는 청으로부터 일정한 보상을 바라야 했다. 하지만 임칙서는 호문에서 아편을 불태웠다. 분노한 영국 상인들은 임칙서에게 강력하게 항의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청은 광동에 정박한 영국의 무역선에 있던 아편마저 압수해서 바다에 뿌려 버렸던 것.

19세기 청제국은 깊어가는 모순으로 아편이 성행했다. 사진은 광동지역의 아편을 피우고 있는 중국인들.
19세기 청제국은 깊어가는 모순으로 아편이 성행했다. 사진은 광동지역의 아편을 피우고 있는 중국인들.

겔버 교수는 당시 광동의 무역상들은 동인도에서 실은 아편을 청에만 판매한 것이 아니라 화주들의 요청으로 아편이 약제로서 합법이었던 영국이나 터키, 독일에 운반해 주는 일도 했다는 점을 발견했다.

즉 광동의 영국 무역선들에 실린 많은 아편은 무역상들의 것이 아니라 화주들의 위탁품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일들이 벌어지면서 영국 무역상들은 청의 임칙서에게 강력한 적대감을 보였다.

그러자 임칙서가 한 행동은 광동에 있는 영국 상인들과 심지어 부인, 아이들까지 군대로 위협하고 그들이 거주하는 곳의 우물을 폐쇄하거나 식량 조달을 막았다. 상인들은 체포되어 재판 없이 투옥됐다.

청의 낡은 시대정신, 영국의 근대성에 굴복하다

이러한 소식을 접한 영국 의회는 처음에 가졌던 청에 대한 수용적인 입장을 변경했다. 영국 여론도 청에 영국 상인들이 아편을 대량으로 판매하는 것에 부정적이었다. 영국 의회는 청에 아편을 팔지 않는 대신 보다 많은 무역항을 열어줄 것을 요청했다.

하지만 청은 그러한 요구를 수용하지 않았다. 결국 영국 남은 것은 청제국의 무모하고 불법적인 그리고 비인도적인 자국 국민에 대한 신변 위협과 구금, 폭력 행위였다. 겔버 교수는 이를 “영국 왕권(Crown)에 대한 침해”로 의회가 받아들였다고 썼다.

마침내 전권대사 엘리어트(조지)는 1840년 6월 육해군 4000여 명의 원정군을 이끌고 광동 앞바다에 도착했다. 인도 정부가 영국을 대표해 청에 선전포고를 하면서 전쟁은 시작되었다. 대포와 강한 해군을 갖춘 영국군 앞에 중국의 군대는 무력하기 짝이 없었다. 재래식 범선이 대부분이었고 군사 장비는 240여 년 전에 주조된 낡은 것이었다.

상대가 되지 않는 전투를 치르면서도 임칙서와 청의 관료들은 황제에게 ‘승리하고 있다’고 거짓으로 보고했고 황제는 이를 진실로 믿었다. 이들의 계산은 영국에 적당히 뇌물을 주고 타협하는 것이었다. 그러한 사실을 알게 된 황제는 크게 분노했지만 이미 청의 실력으로는 영국을 막아낼 수 없었다.

결국 1842년 8월 영국함대의 갑판에서 영국과 청나라 사이에 역사적인 ‘남경조약’이 체결되었다. 조약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홍콩을 영국에 넘겨준다. 2. 광동, 하문, 복주, 영파, 상해 등 5개 항구를 개항한다. 3. 개항장에 영사를 주재시킨다. 4. 중국은 전쟁 배상금 1200만 달러, 몰수된 아편 배상금 600만 달러 등을 3년 안에 영국에 지불한다. 5. 공행의 독점무역을 폐지한다. 6. 수출입의 관세를 정한다. 7. 동등한 지위에 있는 양국 간의 문서 교환은 동등한 형식을 사용한다.

이후 관세에 관한 내용, 영사 재판권, 최혜국 대우, 5개 항에서의 군사 정박권 등을 추가시키게 된다. 아편 무역이 문제가 되어 시작된 전쟁이었지만 조약에는 아편에 관한 아무런 내용이 없었다. 당연히 아편 무역은 영국의 권리로 인정된 것이다.

남경조약은 중국이 외국과 맺은 최초의 근대적인 조약이며 불평등 조약이라는 평가를 남겼다. 이 조약으로 중국이 오랫동안 유지해오던 중화사상은 여지없이 깨졌으며 중국 사회는 커다란 충격에 빠졌다. 광동에만 제한시켰던 외국 상인들의 활동은 확대되었다.

이후 중국은 미국, 프랑스 등 다른 서양 여러 나라들과도 영국과 맺은 조약의 내용과 비슷한 불평등 조약을 맺을 수밖에 없었다. 1844년에는 미국과 망하조약, 프랑스와는 황포조약을 맺게 되고 중국 대륙은 서구 열강에 의해 서서히 잠식되어가기 시작했다.

아편전쟁은 전근대적 중국의 낡은 질서가 영국의 법치라는 근대 합리주의와 부딪히면서 벌어진 문명의 충돌에 가까웠다. 이 전쟁으로 중국은 서구 사회에 대한 오랜 불신과 콤플렉스를 지녀왔다.

그렇다면 이제 미국과 지적재산권 그리고 불공정 무역을 놓고 벌어지는 무역전쟁에서 중국은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지 궁금하다. 1인체제 시진핑 주석은 아편전쟁의 진실을 알고 있을까. 그렇다면 다행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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