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를 잘못 만난 명재상 류성룡
시대를 잘못 만난 명재상 류성룡
  • 이한우 미래한국 편집위원·논어등반학교장
  • 승인 2018.04.20 1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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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명재상을 찾아서]

중종 37년(1542년) 관찰사를 지낸 중영(仲)의 아들로 태어난 성룡은 25살 때인 명종 21년(1566년) 문과에 급제해 일찍 벼슬길에 들어섰다. 그에 앞서 21살 때 도산서원의 퇴계 이황을 찾아갔다. 이 때 성룡을 만나본 이황은 “하늘이 낸 사람”이라고 그를 극찬했다.

성룡 또한 이황을 평생 스승으로 섬겼고 자연스럽게 성룡은 훗날 당쟁시대가 열리면서 동인(東人)을 거쳐 남인(南人)의 영수가 된다. 성룡은 어려서부터 조정의 달인이었다. 유명한 일화 하나가 있다.

그가 홍문관 수찬으로 있을 때인 선조 2년(1569년) 한창 제왕학 수업에 열중이던 어린 선조가 신하들에게 물었다. “나는 옛날의 군주 중에서 누구를 닮았는가?” 정이주라는 신하가 “전하의 다스림은 요순과 같습니다”라고 답하자 이를 지켜보던 강직한 성품의 김성일(金誠一)이 말했다. “전하는 요순(堯舜)도 될 수 있지만 걸주(桀紂)도 될 수 있습니다.” 성군도 될 수 있고 하나라의 마지막 임금 걸이나 은나라의 마지막 임금 주처럼 폭군도 될 수 있다는 말이었다.

명민하긴 했으나 포용력이 부족했던 선조는 낯빛이 바뀌었다. 이 때 성룡이 나섰다. “정이주가 요순과 같다고 한 것은 그런 임금을 만들겠다는 뜻이고 김성일이 그렇게 말한 것은 걸주와 같은 임금이 되지 않도록 하겠다는 뜻이니 둘 다 임금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성룡은 자기 생각을 굽혀가면서까지 조정을 하는 인물은 아니었다.

어찌 보면 율곡 이이가 서인의 입장에서 다른 당색을 어느 정도 포용하려 했다면 그 반대편에 성룡이 있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두 사람 다 마치 당색을 넘어서서 조정자의 역할을 하려 했다는 식의 기존의 설명은 실은 왜곡에 가깝다. 이는 두 사람의 문제였다기보다는 당쟁이 격화되던 시기를 살아야 했던 조선 사대부들의 운명이었는지 모른다.

지난 2015년 2월부터 8월까지 KBS 1TV에서 방영된 대하드라마‘징비록’에 등장하는 류성룡
지난 2015년 2월부터 8월까지 KBS 1TV에서 방영된 대하드라마‘징비록’에 등장하는 류성룡

선조 5년(1571년) 영의정 이준경이 세상을 떠나면서 올린 유언상소는 조정을 뒤흔들어 놓았다. 붕당의 조짐이 있다고 한 때문이었다. 이에 가장 발끈한 사람은 이이였다. 자신을 비롯한 성혼, 심의겸 등을 염두에 둔 지적이었기 때문이다.

이이는 당장 이렇게 말했다. “사람이 죽을 때면 그 말이 선하다고 했는데 이 대감은 죽으면서도 그 말이 악하기 그지 없습니다. 관직을 삭탈해야 합니다.” 이에 성룡이 나서 “부당한 말이 있으면 그 말만 바로 잡으면 되지 관직을 추탈할 것까지야 있습니까?”라고 해서 유언상소 파동은 더 이상 확대되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럼에도 3년 후에 실제로 붕당이 본격화 됐으니 이이는 사안을 제대로 보지 못했던 것이다. 두 사람의 대결은 또 하나가 있다. 소위 말하는 ‘10만 양병’을 둘러싼 논란이다. 선조 16년 병조판서 이이는 서얼허통과 ‘10만 양병’ 육성 방안을 보고한다. 원래 10만 양병은 선조가 호조판서로 있던 이이에게 “지금 우리의 국방력이 전조(前朝-고려)만도 못하다”며 군대를 강화할 수 있는 방안을 올리라 했고 이에 이이는 재주 있는 노비들의 속량(贖良)과 서얼허통 등을 통해 노력하면 10년쯤 지나 전조의 절반 정도 될 수 있다고 말했다.

고려의 절반이란 고려 말 홍건적이 쳐들어 왔을 때 이를 반격하기 위해 고려가 동원한 군사력이 20만이었다는 기록이 있었기 때문에 거기에 기반을 두고서 했던 말이다. 그러나 이는 성룡에 의해 좌절된다. 성룡은 “나라에 아무 일도 없는 평화로운 때에 군사를 양성하는 것은 화란의 단서를 만드는 것”이라는 논리로 반박했다. 그러나 10년 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성룡은 오히려 뛰어난 리더십을 발휘해 전락 극복에 큰 기여를 하게 된다.

당쟁은 격화되고 있었지만 인재를 좋아했던 선조는 한편으로는 이이를, 한편으로는 성룡을 중용하며 나름대로 당파 싸움을 조정하려고 애썼다. 당시 선조가 성룡을 얼마나 좋아했는지를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얼마 후에 예조판서로 승진 임명하고, 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 홍문관 제학(弘文館提學)을 겸하게 하니 글을 올려 힘껏 사임했다.

이에 임금은 수찰(手札) 십행(十行)을 내렸는데 그 내용은 이러했다. “옛 임금 가운데는 신하에게 신하로 대하는 자도 있었고, 벗으로 대하는 자도 있었으며, 스승으로 대하는 자도 있었다. 이 뜻은 비록 후세에 전하진 않으나 경이 10년 동안 경악(經幄-경연)에 나오면서 한결같은 덕으로 아무런 흠이 없었으니 의리로는 비록 임금과 신하라 하나 정의로는 붕우(朋友)와 같다.

그 학문을 논하면 장구(章句)에 편집(偏執)을 갖는 선비가 아니오, 그 재능을 말하면 족히 큰일을 감당할 만하다. 나만큼 경을 아는 사람이 없다.” 이런 총애에 힘입어 49살 때인 1590년 우의정에 올랐고 이듬해에는 이조판서를 겸직했다. 그가 우의정으로 있을 때 영의정은 이산해, 좌의정은 정철이었다. 이산해는 동인이었고 실권은 서인인 정철이 쥐고 있었던 것이다.

이 때 유명한 사건이 일어난다. 이른바 건저의(建儲議), 즉 세자를 세우자고 했다가 한 순간에 정철을 비롯한 서인들이 몰락하게 되는 일을 말한다.

이 때 우의정에 막 오른 성룡은 정철을 찾아가 아직 비어 있던 세자를 세울 것을 함께 임금에게 청하자고 했고 정철은 별 생각 없이 그렇게 하자고 했다. 그런데 경연 자리에서 정철이 그 문제를 꺼내자 이산해와 성룡은 입을 다물어버렸다.

선조는 분노가 폭발했다. “지금 내가 살아 있는데 경은 무엇을 하자는 짓인가?” 이 일로 서인은 몰락했다. 이 사례는 성룡이 정치술수에도 만만치 않은 능력을 갖췄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얼마 후 좌의정에 오르는데 이 때 역시 이조판서를 겸했다.

그에 대한 선조의 총애가 얼마나 컸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다.

임진왜란, 격랑의 정치 인생

그러나 정승의 자리에 오른 성룡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조선 건국 200년 만에 찾아온 최대의 위기, 임진왜란이었다. 전쟁이 발발하자 오히려 성룡의 활약은 눈부시다는 말만으로도 다 할 수 없을 만큼 국난 극복에 온 힘을 쏟았다.

물론 그것은 고난의 연속이기도 했다. 전란의 와중에도 당쟁은 멈추기는 커녕 더 격화됐기 때문이다. 전쟁 발발 직후 병조판서를 겸하고 도체찰사로 군무(軍務)를 총괄했다.

이어 영의정이 돼 왕을 호종(扈從)했으나 평양에 이르러 나라를 그르쳤다는 반대파의 탄핵을 받고 면직됐다. 다시 의주에 이르러 평안도 도체찰사가 되고, 이듬해 명나라의 장수 이여송(李如松)과 함께 평양성을 수복, 그 뒤 충청·경상·전라 3도의 도체찰사가 되어 파주까지 진격했다.

이 해에 다시 영의정에 올라 4도의 도체찰사를 겸해 군사를 총지휘했다. 그해 10월 선조를 호위하고 서울에 돌아와서 훈련도감의 설치를 요청했으며, 변응성(邊應星)을 경기좌방어사로 삼아 용진(龍津)에 주둔시켜 반적(叛賊)들의 내통을 차단시킬 것을 주장하였다. 물론 이순신의 후원자 역할을 맡아 남해 바다를 지켜낸 공 또한 빠트릴 수 없다.

전란 내내 명나라 군대를 지원하고 국방력을 강화하는 등의 힘을 쏟았으나 전쟁이 끝나가던 1598년 명나라 경략(經略) 정응태(丁應泰)가 조선이 일본과 연합해 명나라를 공격하려 한다고 본국에 무고한 사건이 일어났다.

이에 이 사건의 진상을 변명하러 가지 않는다는 북인들의 탄핵으로 관작을 삭탈당했다가 1600년에 복관되었으나 다시 벼슬을 하지 않고 은거했다. 평생을 조선, 그것도 선조(宣祖)를 위해 봉사했으나 그에게 돌아온 것은 불명예였다.

그로서는 참으로 억울했을 것이다. 지금도 그가 남긴 책 ‘징비록(懲毖錄)’을 읽어보면 그 원통함이 행간에 남아 있는 듯하다. 명재상이었으나 결코 행복했던 벼슬살이는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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