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 백년을 그리다... 102살 현역 화가 김병기의 문화예술 비사
[신간] 백년을 그리다... 102살 현역 화가 김병기의 문화예술 비사
  • 김민성 미래한국 기자
  • 승인 2018.04.23 0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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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윤범모는 충남 천안 출생. 뉴욕대 대학원 예술행정학과에서 수학하고 동국대 미술사학과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가천대학교 미술대 교수, 사우스플로리다대학교 연구교수를 지냈다. 198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미술평론으로 등단해 이후 다수의 글을 발표했다. 호암갤러리(삼성미술관 리움 전신), 서울 예술의전당 미술관, 이응노미술관, 경주솔거미술관 등의 개관과 운영에 참여했다.

광주비엔날레 책임 큐레이터, 문화재청 문화재위원, 고암미술문화재단 이사, 수원시 인문학자문위원장,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 운영위원장, 사단법인 한국큐레이터협회 회장, 박수근미술상운영위원장, 재단법인 가나문화재단 상임이사, 경주세계문화엑스포 예술감독, 사단법인 한국민화센터 이사장 등을 지냈다. 현재 동국대학교 미술사학과 석좌교수로 있으며, 창원 조각비엔날레 총감독을 맡고 있다. 저서로 《미술과 함께, 사회와 함께》 《평양미술기행》 《한국미술에 삼가 고함》 《화가 나혜석》 《김복진 연구》 《한국미술론》 등이 있다.

“이중섭과 나는 6년 동안 같은 반이었다. 어느 날 이중섭이 다 모지라진 붓을 들고 이런 말을 했다. ‘병기야. 이거 뭔지 알아?’ 나는 ‘다 모지라진 붓이지’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그는 ‘이건 대단히 중요한 물건’이라고 했다. 수채화 붓이라서 중요하다는 것이었다. 수채화는 물이 많이 들어가는데 그 붓을 대면 물을 빨아먹는다는 것이었다. 이중섭은 어려서부터 미술 기법을 이해하고, 실제 그림 그릴 때 활용할 수 있는 아이였다.”(25~26쪽) 

“김동인의 자서전 《여인》에 등장하는 부잣집 난봉꾼 ‘K’가 바로 나의 아버지 김찬영이다.”(96쪽) 

“김환기는 키가 매우 컸다. 그래서 연구소에서는 우리 ‘쌍김(雙金)’을 구별하기 위해 꺽다리 김환기는 ‘놋포킨 상’, 어린 나는 ‘킨보(야)’라고 불렀다.”(134쪽) 

“‘빗소리 때문에 잠을 잘 수 없었다.’ 이상 시인의 제일성였다. 주인이 양보한 침대에서 일어나 아침 인사로 건넨 첫마디….”(181쪽) 

“‘장군님께서 만나자고 하십니다.’ 뭐, 장군님! 1945년 찬바람 불던 어느 날 밤이었다. (…) 그는 예술인들에게 요구했다. ‘나는 잘 알려져 있지 않으니, 예술인 여러분께서 나를 선전해주시오.’”(228~229쪽) 

“해주 생활에서 잊을 수 없는 친구는 화가 이쾌대다. 해주에서 이쾌대의 활약은 빛났다. 그는 내가 이사할 때나 평양에 출입할 때면 방패 구실을 했다. 이른바 ‘반동분자’인 나를 보살펴주었다.”(252쪽) 

“원래 나는 간송(전형필)과 가깝게 지낸 사이였다. 고미술 수집가로서 부친과 인연이 남달라서 특히 그랬다. 이마동은 간송이 운영하던 보성고등학교의 교감을 지냈다. 그래서 우리 3인은 자주 어울렸다.”(292쪽) 

예술의 경계가 모호하던 시절, 문화계 인사들과 두루 교유가 있었지만 그래도 김병기 화백을 통해 가장 밀도 있게 들을 수 있는 건 당연히 미술계 관련 이야기들이다. 

김병기 화백은 1916년 평양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김찬영은 고희동, 김관호 등과 함께 서양미술의 선구자로 불리는 인물이다. 도쿄미술학교 유학을 다녀와 최초로 미술학교 설립을 도모하기도 했던 이들을 통해 비로소 우리는 서화의 시대에서 미술로 시대로 건너올 수 있었다. 물려받은 재능과 동시에 아버지의 부재로 인한 그리움과 미움이 본인 예술의 출발점이라고 김 화백은 고백한다. 

1933년 만 17세에 떠난 일본 유학길에서 김병기는 아방가르드 미술을 접하고, 마침내 자신의 길을 찾게 된다. 일본 아방가르드 양화연구소 시절을 함께한 김환기, 삼총사로 불리며 문화학원을 주름잡던 이중섭·문학수와의 추억을 통해 식민지 시절 젊은 예술가들의 치열한 고민과 작품 세계를 만날 수 있다. 

이 책에는 문학, 연극 등 당시 일본 유학생들의 활동을 담은 사진이나 잡지·그림의 도판이 많이 실려 있어 보는 재미를 더한다. 김환기 화백의 [해협을 그리다] 도판을 소개하며, 1936년 제1회 ‘백만전’에 출품한 작품이라는 증언과 함께 김환기의 초기 시절을 연구하는 중요한 자료로 쓰여야 한다고 덧붙인다. 

평양으로 돌아와 맞은 해방 공간과 6·25전쟁은 누구에게나 그렇듯 김 화백에게도 인생의 가장 큰 변곡점으로 남는다. 해방 후 김병기는 고고하게 화실로 들어가는 대신 조선미술동맹 서기장을 맡아 ‘현장의 예술인’으로 남았다. 이 과정에서 새로운 정치세력으로 등장한 김일성은 김병기를 찾아 예술인으로서 본인을 지원해줄 것을 요청하기도 했다. 좌우 분열은 미술계도 비켜가지 못했고, 서울과 평양을 오가며 남북의 화해를 모색했던 김병기는 어느새 ‘반동분자’가 되어 있었다. 점점 반예술적으로 돌아가는 시국에 환멸을 느끼던 김병기는 친구인 화가 이쾌대의 도움을 받아 1948년 극적으로 평양 탈출에 성공한다. 

서울로 내려온 김병기는 1949년 가을께부터 50년미술협회를 조직하기 시작했다. 남과 북, 좌와 우를 통합해보려는 또 한 번의 노력이었다. 가까스로 창립전 준비를 마치고, 개막식만을 남겨두었으나 끝내 전시회는 불발되고 말았다. 개막 1주일을 앞두고, 6·25전쟁이 발발한 것이다. 1951년 결성된 종군화가단에서도 김병기는 부단장을 맡아 화가들에게 전쟁기록화를 그리도록 독려한다. 누구도 피할 수 없는 비극적인 시간, 김병기는 이때를 회고하며, “종군화가라는 명칭부터 비예술적”이라면서 “예술과 전쟁은 상극의 개념”이라고 강조한다. 

김병기의 증언과, 함께 실린 도판 자료들을 통해 서양미술의 도입 과정, 일제강점기 화가들의 동향, 해방 전후 미술계의 좌우 대립 등 근대미술사의 굵직한 줄기들을 파악해볼 수 있다. 

김병기 화백은 전쟁 이후 1965년 도미 때까지 서울대 교수, 한국미술협회 이사장 등을 거치며, 작가로서보다는 예술 행정 일선에서 한국현대미술의 외연을 넓히는 일에 전념한다. 덕분에 1958년에는 뉴욕에서 ‘한국현대미술전’이 처음으로 열렸으며, 1965년 상파울루 비엔날레에서는 커미셔너 및 한국인 최초로 국제전 심사위원을 맡아 변방의 한국현대미술의 위상을 높이는 데 기여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미술계 내에 만연한 서울대파와 홍대파의 갈등, 주도권을 둘러싼 미술단체의 분열과 국전 분규 등의 내홍을 겪으며 미술계를 혁신해보려던 노력에 회의를 느끼게 된다. 책에는 당시 미술단체의 이합집산과 ‘냉면 대접 투척 사건’ 등 미술계를 둘러싼 다양한 사건들의 전말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김 화백은 1965년 미국 미술계를 둘러본 후 뉴욕 새러토가에 정착해 1986년 귀국 때까지 20여 년간 작품 활동에 몰두했다. 김 화백은 이때의 선택에 대해 “20년 봉사했으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면서 “현대미술의 현장인 뉴욕에서 작가의 길을 가보고 싶었다”고 회고했다. 

뉴욕에 먼저 정착해 있던 김환기, 김창열, 김보현 등이 생계를 위해 도배나 넥타이공장에 다녔으며, 그때의 경험이 훗날 그들의 작품 스타일에 영향을 주었을 거라는 이야기, ‘제1회 한국미술대상전’에 나란히 출품했던 김환기 화백이 대표작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로 대상을 받으며 금의환향했던 뒷이야기는 50여 년을 건너 우리에게 미술사의 한 장면으로 생생하게 다가온다. 

1985년 미국 방문 중 우연히 김 화백을 만난 이 책의 저자 윤범모 교수는 20년 칩거를 끝내고 1986년 귀국전을 개최하도록 지원하면서 가나아트센터 이호재 회장과 함께 지금까지 김 화백의 든든한 후원자 역할을 하고 있다. 

고국으로 돌아온 김 화백은 그동안의 그리움을 한꺼번에 풀기라도 하듯 설악산, 경주, 제주 등을 여행하며 조국의 풍경을 화폭에 담았다. 겸재의 [인왕제색도]를 염두에 둔 [인왕제색](1988), 분단된 조국을 생각하면서 그린 [산하재] 연작, [분단 풍경](1988) 등이 모두 이 시기의 작품들이다. 

이후 김병기 화백은 파리 레지던시 프로그램에 참여해 3년 정도 유럽에 체류하며, 작품 세계에 깊이를 더했다. 특히 세잔의 흔적을 따라 많은 작품을 그렸는데, [커다란 소나무와 생트빅투아르 산](1887), [생트빅투아르 산에서의 독백](1995) 등 추상과 구상, 동양과 서양의 절묘한 만남을 담은 작품들이 이 시기에 탄생했다. 
1989년 뉴욕으로 돌아갔던 김병기는 2014년 국립현대미술관의 원로 작가 초대전을 계기로 영구 귀국했다. 그의 나이 98세, 한국을 떠난 지 49년 만이었다. 회고전의 제목은 ‘감각의 분할’. 자연과 정신이 서로 얽히고 더듬으며 교차하고 관통하는 그 감각의 과정을 회화적으로 구현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으며, 북한산을 소재로 그린 [세한도](2000) 계열의 작품들이 대표적이다. 

2016년 100살 기념 개인전을 열었던 김 화백은 2017년 101살의 나이로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이 되었으며, 만 102살인 오늘도 여전히 개인전 준비에 여념이 없는, 역사의 산증인이자 영원한 현역 화가로 우리 곁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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