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령영생론자`가 통일애국지사?
`수령영생론자`가 통일애국지사?
  • 미래한국
  • 승인 2006.01.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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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식에 `통일애국지사` 묘비세우고 1주기 추모행사
▲ 가족들의 분향모습. 뒤로 오종렬, 강정구의 모습이 보인다.
운동권이 말하는 애국(愛國)의 대상은 무엇인가?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상임의장 오종렬) 등 운동권 단체들이 ‘수령영생(永生)론’등 주체사상(主體急惻)을 확산시켜 온 김남식(金南植. 2004년 1월 死亡)에 대해 경기도 마석 모란공원 내 ‘통일애국지사’라는 묘비를 세우고 지난 7일‘통일애국지사 김남식 선생 추모1주기’행사를 가졌다.
▲ 김남식
추모연대라는 단체 박중기 상임의장은 “반역자이자 사대주의자들이 私學을 명분으로 반란을 일으키는 오늘 같은 현실에 선생이 계셨다면 더 큰 가르침을 주셨을 것이다”고 말했고, 사월혁명회라는 단체 노중선 상임의장은 “선생이 한반도의 모순구조에 대해 ‘남북한 우리민족 대 외세’라고 명료하게 규정한 명제를 받들어 열심히 말하고 행동하겠다”고 말했다.이날 행사에는 전국연합 오종렬, 동국대 강정구, 통일연대 권오헌 등도 참석해 추모의 변(辨)을 읊었다.
▲ 오종렬의 모습.
▲ 추모행사 모습
김남식은 6·25 당시 越北했다 1963년 간첩으로 남파된 후 당시 방첩부대(琅 기무사)에 검거됐던 인물이다. 그는 이후 對共수사에 협조하는 조건으로 기소유예처분을 받고 풀려났으나, 1980년대 후반 들어 親北的 주장을 펼치기 시작했다. 그의 주장 중 일부를 인용해보자. “金日成 수령을 영원한 수령으로 모시는 조건에서 선군(先軍)정치는 영원히 지속될 것이다(2004년 7월9일 통일뉴스 ‘북한의 영생(永生) 10년의 이해를 위하여’).”“(북한) 주체(主體)의 사회주의는 무엇보다도 사람을 귀중히 여긴다(2004년 「우리민족이야기」.)”“선군(先軍)정치는 金正日 국방위원장이 ‘영원한 수령’金日成 주석이 개척하고 전진시킨 주체(主體)혁명위업의 완성을 목표로 하는 정치방식이다(2004년 12월30일).”
▲ 통일애국지사?
▲ 통일애국지사라고 새겨진 비석이 보인다.
師事한 이종석 “김남식은 최고의 북한전문가”김남식은 이종석(李鍾?) 통일부장관 내정자가 대학원 재학시절부터 사사(師事)해 온 인물이기도 하다. 李내정자는 대학원 재학 당시 김남식의 자택 등지를 오가며 金씨와 함께 소위 북한 原典 공부를 해왔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李내정자와 교류했던 O씨는 “이종석씨는 80년 대 후반 북한학을 공부하는 대학원 석*박사들을 김남식씨에게 소개하고 연결시켜주는 역할을 할 정도로 李씨와 金씨는 서로 친분이 두터웠다”고 말했다. 월간조선 2004년 6월 보도한 정부기관이 작성한 소위‘이종석 파일’은 이렇게 적고 있다.“이종석은 1989년 3월 ‘독립문 연구실’이란 비밀 아지트를 개설하고 親北인물 金南植 등을 통해 북한 原典을 입수, 주체사상*남한혁명론*金日成의 抗日무장투쟁 등에 관해 집중 연구하여 親北이념을 전파*확산했다”김남식에 대해 이종석 내정자는 자신의 저서 「새로 쓴 현대북한의 이해」 등에서 “당대 최고의 북한전문가”로 격찬하고 있다.
▲ 마석 모란공원은 소위 `열사`들의 묘지이다.
▲ 공원 입구에 새겨진 비석의 모습
▲ 모란공원 안내도
글`사진 김성욱 기자<<김남식은 전향했나?>>김남식은 본명이 김동만(金東滿)으로 63년 철원 지역으로 침투됐다 같은 해 검거됐다. 그는 검거 후 남로당 서울시당 선전부장 출신 L씨, 북한 농업성 수석비서관 출신 Y씨, 북한 로동신문 기자 출신 L씨와 팀을 이뤄 ‘逆공작(검거된 간첩을 통해 간첩을 역으로 검거하는 작업)’에 투입됐고 이를 조건으로 기소유예처분을 받게됐다. 김남식을 검거시부터 담당했던 전직 기무사 간부 D씨는 “金씨는 다른 간첩출신자들과 달리 공작 성과가 없는 상태에서 기소유예처분을 받았고, 이후에도 그를 통해 검거한 간첩은 전혀 없었다. 金씨는 다른 전향자들과 다른 케이스였다. 북한 입장에서 보면 ‘배신’을 하지 않았고, 같은 맥락에서 북한에 남은 가족들도 무사했을 것이다”고 말했다. 김남식은 이후 정부의 도움으로 여러 기관에서 연구원으로서 일하며 反共강연 연사 등으로 활동했으나, 80년대 이후 정부의 관리가 소홀해지자 親北的 주장을 펴게 됐다.D씨는 “기무사 내부에서 김남식의 위장전향 내지 再접선의 의혹이 제기됐지만, 시간이 지나 담당자가 교체되고 정권이 바뀌면서 흐지부지됐다. 나 역시 80년대 기무사를 떠나면서 추정만 해왔을 뿐 손을 쓸 수 없었다”고 말했다.북한공작원으로 수 차 남파됐다 70년대 후반 자수한 E씨는 김남식에 대해 이렇게 술회한다.“공안분실을 나와 처음 만나 본 남한 사람이 당시 국책기관 연구위원으로 있던 김남식씨였다. 대화를 할수록 모호한 對北觀을 드러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이상하게 느껴졌다. 그가 간첩 출신이라는 사실은 나중에 알게됐다. 그 사실을 알고난 후 ‘완전히 돌아선 것이 아니구나’싶었다.”E씨는 또 이렇게 말했다. “김남식은 80년대 모 기관 연구위원을 그만두고 친북적 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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