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파를 뛰어넘어 세 임금 받든 이원익(李元翼)
당파를 뛰어넘어 세 임금 받든 이원익(李元翼)
  • 미래한국이한우 미래한국 편집위원·논어등반학교장
  • 승인 2018.05.04 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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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명재상을 찾아서 ]

“강정(剛正), 청고(淸苦)했다.” 서인(西人)이 집필을 주도한 <인조실록>에서 남인(南人) 계통의 정승 이원익이 졸(卒)했을 때 그의 사람됨과 생활 모습을 표현한다. 굳세고 바른 성품에 지나칠 정도로 깨끗함을 지켰다는 말이다. 태종의 아들 익녕군(益寧君) 이치의 4세손이며, 수천군(秀泉君) 이정은(李貞恩)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청기수(靑杞守) 이표(李彪), 아버지는 함천정(咸川正) 이억재(李億載)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조상들의 직함인데 군(君), 수(守), 정(正)은 모두 왕실 사람들에게 내리는 작호다. 그리고 정(正)을 끝으로 친진(親盡)이 된다. 친진이란 왕실과의 친척 관계가 다 끝난다는 뜻이다. 그럼으로써 마침내 일반 선비들과 마찬가지로 과거에 응시할 수 있게 된다.

1547년(명종 2년)에 태어난 이원익은 23살 때인 1569년(선조 2년)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이듬해 승문원 권지 부정자로 활동했다. 사람과 번잡하게 어울리기를 좋아하지 않았고 공적인 일이 아니면 외출도 잘 하지 않는 성품이었다 한다. 류성룡(柳成龍)이 일찍부터 이원익의 비범함을 알고 있었다고 한다.

두 사람은 훗날 같은 남인으로 활동하게 된다. 그러나 젊은 시절의 이원익은 호연지기를 품은 청년이었다. 그의 비명(碑銘)은 청년 이원익의 모습을 이렇게 전한다. ‘젊었을 때에 기품이 자못 호방하였다. 집이 낙산(駱山) 아래에 있었는데 번번이 거문고를 가지고 산에 올라 스스로 타고 노래하였으며 옛사람의 악부(樂府)까지도 소리를 길게 끌며 소리 높여 읊으면 다 곡조에 맞았다.

때로는 삼각산(三角山)의 백운대(白雲臺)와 개성(開城)의 성거산(聖居山)과 영동(嶺東)의 풍악(楓岳-금강산)과 영변(寧邊)의 묘향산(妙香山) 등 기승(奇勝)이며 유명한 곳에는 모두 얽매임 없이 홀로 가서 즐겼다.’ 벼슬길에 들어서서는 중앙과 지방의 여러 요직을 두루 거치며 승승장구했다. 1차적으로 그의 관리로서 뛰어난 면모가 발휘된 때는 임진왜란 시기였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이조판서로서 평안도도순찰사의 직무를 띠고 먼저 평안도로 향했고 평양마저 위태롭자 영변으로 옮겼다. 이 때 평양 수비군이 겨우 3000여 명으로서 당시 총사령관 김명원(金命元)의 군 통솔이 잘 안되고 군기가 문란함을 보고 먼저 당하에 내려가 김명원을 원수(元帥)의 예로 대해 군의 질서를 확립했다.

그러나 평양이 함락되자 정주로 가서 군졸을 모집하고, 관찰사 겸 순찰사가 되어 왜병 토벌에 전공을 세웠다. 1593년 정월 이여송(李如松)과 합세해 평양을 탈환한 공로로 숭정대부(崇政大夫)에 가자(加資)됐고 선조가 환도한 뒤에도 평양에 남아서 군병을 관리했다. 1595년 우의정 겸 4도체찰사로 임명됐으나 주로 영남체찰사영에서 일했다.

마침내 정승의 반열에 오르긴 했으나 모든 것이 어수선할 때였다. 이 때 명나라의 정응태(丁應泰)가 경리(經理) 양호(楊鎬)를 중상모략한 사건이 발생해 조정에서 명나라에 보낼 진주변무사(陳奏辨誣使)를 인선하자 당시 영의정 유성룡에게 “내 비록 노쇠했으나 아직도 갈 수는 있다. 다만 학식이나 언변은 기대하지 말라”며 자원했다.

KBS 1TV에서 방영된 대하드라마 '징비록' 15회에서 등장하는 이조하서 이원익
KBS 1TV에서 방영된 대하드라마 '징비록' 15회에서 등장하는 이조하서 이원익

그는 이미 선조 때 좌의정 영의정에 올라 당쟁이 극심하던 상황에서 정도(正道)를 고수하며 물러나기를 여러 차례 했다. 이를 통해 그는 극소수 당파를 제외한다면 범 당파의 지지를 받는 거의 유일한 재상으로 자리 잡았다.

정쟁보다 민생 우선

이는 광해군 즉위 후 북인(北人)세력이 정권을 잡았음에도 그가 불려가 다시 영의정이 된 것에서 알 수 있다. 영의정으로서 그의 관심은 1차적으로 정쟁이 아니라 민생(民生)이었다. 전쟁 복구와 민생 안정책으로 국민의 부담을 경감하기 위해 호조참의 한백겸(韓百謙)이 건의한 대동법(大同法)을 경기도 지방에 한해 실시해 토지 1결(結)당 16두(斗)의 쌀을 공세(貢稅)로 바치도록 했다.

백성들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함이었다. 시간이 흘러 점점 광해군이 난폭해지자 신변의 위험을 무릅쓰고 대비에 대한 효도, 형제간의 우애, 여색에 대한 근신, 국가 재정의 절검 등을 극언으로 간쟁했고, 임해군(臨海君)의 처형에 극력 반대하다 실현되지 못하자 병을 이유로 고향으로 내려갔다.

그 후에 다시 이이첨 등이 모후(母后)를 폐하려 하자 원익이 광해에게 소장을 올려 자전께 효성을 다할 것을 청하니, 광해가 크게 노하여 말하기를 “내가 효성을 다하지 못한 일이 없는데 원익이 어찌 감히 근거 없는 말을 지어내 군부(君父)의 죄안(罪案)을 만들 수 있단 말인가”라고 말하고서 마침내 홍천(洪川)으로 귀양 보냈다.

그런데 실록에서는 이렇게 덧붙였다. “대체로 그의 명망을 중하게 여겨 심한 형벌을 가하지는 못했던 것이다.” 즉 광해군은 죽이고 싶어 했지만 그의 명망 때문에 그럴 수 없었다는 말이다. 결국 1623년 봄 인조반정이 일어나 광해군은 권좌에서 내려왔다. <인조실록> 3월 16일자는 거사가 성공한 직후의 한 모습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유명한 장면이다. “이원익을 영의정으로 삼았다. 원익은 충직하고 청백한 사람으로 선조(先朝)부터 정승으로 들어가 일국의 중망을 받았다. 혼조 시절 임해군의 옥사 때 맨 먼저 은혜를 온전히 하는 의리를 개진하였고, 폐모론이 한창일 때에 또 상차하여 효를 극진히 하는 도리를 극력 개진하였으므로 흉도들이 몹시 그를 미워하여 목숨을 보전하지 못할 뻔하였다.

5년 동안 홍천(洪川)에 유배되었다가 전리에 방귀되었다. 이때에 와서 다시 수규(首揆-영의정)에 제수되니 조야가 모두 서로 경하하였다. 상이 승지를 보내 재촉해 불러왔는데, 그가 도성으로 들어오는 날 도성 백성들은 모두 머리를 조아리며 맞이하였다.” 광해군 초에는 북인 정권이었음에도 영의정으로 부름을 받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인조 초에는 서인 정권이었음에도 다시 영의정으로 부름을 받은 것이다.

이로써 이원익은 선조 광해군 인조 세 조정에 걸쳐 정승을 지내는 특이한 이력을 갖게 됐다. 비명이 전하는 그의 처신에는 조금의 과장도 없다. ‘공은 금도(襟度)가 정명(精明)하고 표리(表裡)가 순일(純一)하며 평소에 사기(辭氣)가 온화하고 부드러운 낯빛으로 웃으며 말하는 것이 사랑스러웠으나, 일에 임하면 독립하여 산처럼 동요하지 않았다.

관직에 있어 일을 처리하면 순전히    <시경(詩經)> <서경(書經)>을 인용하고 고사(古事)를 참고하여 절로 이치에 맞았으므로 어떤 재신(宰臣)이 남에게 말하기를, “누가 금세에는 성인(聖人)이 없다 하던가? 완평은 참으로 성인이다”라고 했다.

이때는 일이 많았는데 묘당에 큰 논의가 있으면 반드시 공이 한 마디 말하기를 기다려서 결정하였으므로, 오성(鰲城-이항복(李恒福))이 일찍이 말하기를 “나는 일마다 행수(行首)의 재처(裁處)를 따른다”라고 했고, 신흠(申欽)공도 그렇게 말하였으며 공도 오성을 언급하면서 반드시 말하기를 “위인(偉人)이다”라고 하였고 일찍이 말하기를, “정치는 반드시 만물에 미쳐야 하고 지론(持論)은 되도록 두터워야 한다”라고 했다.’

그가 글을 지으면 조리를 중요하게 여기고 꾸미는 것을 일삼지 않지만 체재는 갖추어서 보기에는 간단하고 담박한 듯하나 의미가 심장했다고 한다. 그는 문장의 화려한 것을 자기 일로 삼은 적이 없으므로 지은 글을 짓는 대로 곧 버려서 집에 감춘 사고(私稿-문집)가 없었다. 이런 재상이 있었기에 혼란한 시기를 지나면서도 조선이 그나마 지탱할 수 있었는지 모른다. 1634년(인조 12년) 정월 29일에 서거하니 향년 88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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