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은 대왕의 자격이 있었나
세종은 대왕의 자격이 있었나
  • 이주천 이승만포럼 공동대표·전 원광대 교수
  • 승인 2018.05.15 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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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리뷰 / 이영훈 교수의 '세종은 과연 성군인가' 를 읽고

필자의 뇌리에 세종은 한국 제1의 위인으로서 훈민정음 창제, 최현덕과 김종서 두 장군의 四郡(사군)·六鎭(육진) 정벌을 지시, 집현전 학자의 양성을 통한 학문 융성 등 중세조선을 명실상부하게 ‘군사문화강국’으로 만든 현군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세종은 한국사에서 최고의 군주인 성군, 무장으로는 성웅 이순신과 더불어 양대 영웅으로 추앙되었다.

서울 광화문광장에 가면 세종의 동상이 있으며 1만 원권 지폐에 세종이 그려져 있으니 한국인의 마음 속에는 영원한 불멸의 대왕이 되었다. 그런데 이영훈 교수(67·낙성대경제연구소 이사장)의 도발적 저서 <세종은 과연 성군인가?>를 읽어보니 세종에 대한 지도력에 일말의 의구심이 재발되었다.

이 교수는 노비와 기생제도, 그리고 중국 명나라에 대한 사대주의의 정착에 세종의 정치적 책임이 크다고 비판하면서 세종은 당대에 지배층인 양반계급에서는 성군으로 칭송된 점은 인정하지만 인권과 자유과 확대된 현대의 기준에서 본다면 성군으로 볼 수 없다는 것이 그 핵심 논지이다.

이 교수는 ‘뉴라이트교과서포럼’을 주도하였으며 匹馬單騎(필마단기)로 ‘식민지근대화론’을 강조했으니 용기와 소신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한 지식인이다. 이것은 국민정서로부터 일탈을 원치 않는 한국근현대사 전공자들의 역사 인식과 정면으로 충돌했으며, 급기야 ‘친일파’라는 등 현대판 ‘斯文亂賊(사문난적)’으로 몰리기도 했다.

세종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제공한 학자로는 이 교수가 첫 번째 학자는 아니다. 필자의 대학시절(고려대 사학과)에 은사 강만길 교수는 고려대 학내신문에 ‘훈민정음 창제에 대한 세종의 동기’라는 글에서 세종의 훈민정음 창제의 정치적 의도는 백성들이 조부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과 조선 건국의 정당성을 잘 이해하지 못했기에 이것을 백성들에게 널리 알리기 위해서 무지한 백성들이 쉽게 읽을 수 있는 글자를 발명한 것이 그 본래 목적이라고 주장했다.

그래서 세종이 가장 먼저 한글로 만든 것이 용비어천가이고, 이는 조선 왕실의 건국을 정당화하기 위해 한글이 활용되었다는 논지였다. 강 교수의 이 칼럼은 대학생이었던 필자에게 지적 충격을 줬으며 이후 신문이나 책에서 기록된 사건과 인물들을 그냥 건성으로 이해해서는 안 되며 기록한 자의 숨은 의도가 무엇인지를 간파해야 한다는 교훈을 안겨줬다.

강만길 교수의 훈민정음 창제에 대한 문제 제기가 일시적이고 단편적 의문에 불과했다면, 이영훈 교수의 문제 제기는 세종의 통치력과 인간관에 대한 근본적이고 종합적인 의문에 속한다. 그는 세종에 대한 모든 기성의 고정관념을 부숴 버리고 말았다. 그는 한국근현대사 전공자들이 가지고 있는 관념이라고 할까, 편견을 맹공격하고 있다.

그들의 아래와 같은 강박관념이 역사 인식의 근저에 강하게 흐르고 있다는 것이다. “조선이 망한 것은 따지고 보면 다 일본 탓이다. 그냥 망했으면 괜찮은데 하필이면 일본에게 망하는 바람에 기분이 나쁘고 자존심이 상한다. 그래서 조선은 일단 무조건 좋고 훌륭한 나라여야 한다. 자존심 살리는 역사교육을 해야 국제사회에서 체통도 서고 나라가 바로 선다.”

이영훈 교수는 한국근현대사 전공자들의 이런 강박관념이 일종의 지적 기만이나 허위의식이며, 동시에 결국 조선을 실체가 아닌 ‘환상의 나라’로 만들었다고 개탄한다.

세종은 당대 지배층인 양반계급에서는 성군으로 칭송되었지만 백성의 자유와 인권면에서는 오히려 패도적 통치를 했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세종은 당대 지배층인 양반계급에서는 성군으로 칭송되었지만 백성의 자유와 인권면에서는 오히려 패도적 통치를 했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이 교수는 경제학을 전공하면서 한문공부를 하여 한국경제사 분야를 연구하게 되었기에, 자신의 학문 경력에서 정치, 외교, 문화사를 전공한 기존의 사학자들에 비해 실증연구에서 경쟁력이 있다는 점과 한국사 특유의 집단 연고에서 해방되어 은사나 선배의 학설에 눈치를 보지 않고 보다 자유롭게 연구를 해왔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이 교수는 10여 년 이상을 고문서를 통해 조선의 노비제도를 연구했으니 경제학과 수치에 어두운 한국사 전공자들이 반박하기는 커녕 ‘노비제도를 통해 본 조선역사’라는 이 교수의 학문적 업적을 학계에 어떻게 접목시킬 것인가가 지대한 과제로 등장하고 말았다.

노비제 세습이 망친 조선

이 책에서 세종은 조선을 노비와 기생의 나라로 만들어 양반의 이해관계에 가장 충실한 왕이 되었고, ‘성군’이란 호칭은 자신들의 입장을 대변한 왕에 대한 양반들의 답례로 받은 찬사라고 주장한다. 그는 조선의 노비세습제도는 세계 노예제 역사에서 유래가 없을 정도로 가혹한 것이었다고 비판한다.

이 교수에 의하면 노비제도는 고려시대부터 발생했으나 조선시대 초기 태종과 세종조에 오면서 정착되었는데 1405년 태종은 “노비는 영원히 해방될 수 없다”는 법을 발표했고, 세종은 從母法(종모법)을 통해서 노비는 어머니의 신분에 따라 노비로 삼는다고 제정했으며 경국대전을 통해 노비의 세습을 통해 노비제 확대를 가져왔다. 이 교수는 노비제의 또 다른 형태인 기생제도에 대해서도 그 제도의 존재 자체를 비판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기생제도의 세습은 중국에서도 하지 않기에 다른 나라에서 유례를 찾기 어렵다고 비판한다는 점이다. 고려시대에도 기생은 존재했지만, 조선의 기생제도의 확대 과정에 세종이 중심에 서 있다는 것을 세종실록 등 1차 사료를 통해 밝히고 있다. 더 주목되는 연구는 군대와 기생과의 관계이다.

필자는 세종 시절 4군 육진을 개척한 조선병사들이 장기 주둔하지 못하고 왜 철수했으며 장기적으로 조선 군사력이 왜 약했는가에 대해 오랜 시절에 걸친 의문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 교수의 책을 읽고 이 의문점이 풀렸다.

조선 초기 최윤덕 장군의 4군과 김종서 장군의 6진 개척시에 북방으로 동원된 기생제도는 점령지 군졸들의 성적 욕망이란 스트레스를 풀게 했지만 항구적인 ‘우리 땅’의 항구적 건설에는 실패했다. 이것은 건전한 가족의 형성에서 창출한 정착지 건설이었다기보다는 편의적이고 일시적 방편에 불과했다.

“세종이 의도한 대로 과연 군사의 사기가 진작되었는지는 의심스럽다. 그 얼마 전에 벌어진 청과의 두 차례 전쟁에서 조선 왕조의 군대는 별다른 전투력을 보여주지 못하였다.”(쪽 119). 고대 서양의 경우 조선과 다르다. 마케도니아 알렉산더 대왕은 현지 여성과의 결혼을 적극적으로 권장해 집단적으로 국제결혼식을 추진했고 자신도 박트리아 출신(지금의 아프가니스탄 지방) 록세나와 결혼했다.

또 장거리 인도 원정길에서조차 창녀도 대열에 합류하도록 조치했다. 그런데 또 로마제국 시절 로마 병사들은 게르마니아 지역과 같은 변경에서 현지 여성과 결혼하는 경우도 있었으며 태어난 자식 2세는 로마 시민권을 부여받았다. 그리하여 로마군이 점령.주둔한 곳에서는 도처에 도시가 만들어지고 시장이 형성되었다.

중세 유럽의 도시의 기원이 여기에 해당된다. 그렇게 한 이유는 군인들의 안정된 삶을 통해서 로마의 정복지 영토를 확고히 지키기 위해서였다. 중국의 경우도 조선과는 다르다. 누르하치가 거병한 만주족(여진족의 후신)도 중원으로 영토를 확장해 나갈 때 가족 식솔과 함께 진군해 점령지를 충실히 확보한 점과 크게 비교가 된다.

이와 대비해 조선 정부는 북방 변경에 사는 여진족 여인들과의 교류를 묵인·방조했지만, 그녀들은 성적 노리개에 불과했으며 더 나아가 아내나 첩으로 삼아서 귀국하는 식의 국제결혼을 권장하지 않았다. 거란, 여진족 등 주변 북방 야만족을 멸시하고 ‘피의 淸濁(청탁)’을 중시한 유교국가의 사회적 분위기는 야만족과의 혼혈 결혼을 멸시했다.

이로 인해 북방 점령지에 대한 점령 통제력은 장기적으로 볼 때, 깊은 뿌리를 내리지 못했고 원주민과의 결속이 결여된 채 결국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고구려의 멸망 이후 한국사에서 군사적 북방정책이 모두 실패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국사학계가 외면한 세종의 사대주의

가장 충격적인 내용은 세종이야말로 명에 대해 지극 정성의 사대를 한 장본인이라는 점이다. 하늘에 지내는 제사를 폐했고, 斧鉞(부월)의 의식을 폐지해 군국의 의지가 뿌리째 뽑히고 말았다는 것이다. 세종은 제후국인 조선이 천자(명나라)를 성심껏 섬기면 국가안보는 자동적으로 보장되기에 독자적 군국 의지는 불필요하다는 것이다.

세종에 대한 객관적 평가는 한국사의 올바른 인식을 위해서도 필요하다.
세종에 대한 객관적 평가는 한국사의 올바른 인식을 위해서도 필요하다.

심지어 세종은 <朱子家禮(주자가례)>에 따라 부친상을 당했을 경우 3年喪(년상)의 솔선모범을 보이면서 조선의 國禮(국례)로 정착했으며 私家(사가)의 가례로 널리 확산시키는 데 공헌했다. 일반적으로 <주자가례>는 趙光祖(조광조)에 의해 널리 확대·보급되었다고 알려졌지만, 조선 중기 이전에 이미 세종조 시절에 확산된 것을 이 책을 통해 재확인했다.

한심스럽게도 3년상의 확산으로 중앙군제가 약화된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렇다면 이미 조선 왕조 초기에 조선사회는 성리학이라는 마약에 단단히 중독된 사회가 되어 국법을 초월해 凶禮(흉례)가 지배하는 사회로 접어들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에 반해 고려 왕실은 국례를 유교의 형식을 빌렸지만, 내용은 그에 구애되지 않았다.

유교의 본산 중국에서도 송과 명에서는 왕실과 귀족계급의 일부가 3년상을 했지만 그 부작용의 심각함을 인정했기에 국민들에게 강요하지는 못했다. 이 교수는 세종이 훈민정음을 창제한 이유로 올바른 중국식 표기법을 개발해 양반들에게 정확한 중국식 발음을 표현하도록 하는 과정의 부산물로서 결과적으로 엉뚱하게 한글이 만들어졌다고 밝히고 있다.

즉 애민정치의 소산이 아니고 그 근거를 정광 교수의 <한글>에서 밝히고 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한글이 창제되어 그 덕을 보고 있으니 무턱대고 후손들이 비판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이 책은 여러 가지 연구 과제를 안겨줬다. 우선 성리학과 노비제와의 관계이다. 송의 성리학이 고려말과 조선초에 수입되면서 조선의 지배계급과 지적 풍토에 어떻게 천착, 왜곡, 강화되었는지가 구체적으로 연구되어야 한다.

중국의 성리학은 압록강을 건너면서 더 근본주의적이고 교조주의화되었다고 볼 수 있는데, 왜 그런 현상이 벌어졌는지가 사회문화적으로 설명이 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송의 성리학이 인간관계를 五倫(오륜)으로 규정했는데, 조선은 주인과 노비의 관계를 첨가하여 6륜으로 확대되었다는 주장이 그런 것이다.

여기에 집현전 학자들이 성리학의 인륜사상을 왜곡하고 더 나아가 기자조선을 핑계로 노비제 확대의 논리제공에 참가 공헌했다고 해석한다. 중세조선 지식인들의 인간관이 봉건성에서 한 발자국도 진일보하지 못한 것으로 평가한다면 노비제 폐지를 주장한 1894년 갑오경장이 근대의 시작이라고 볼 수 있는가?

더 나아가 “영정조 시절은 한국판 르네상스의 화려한 시대를 열었다”고 이구동성으로 찬양·미화하는 주장도 환상이 아니었던가? ‘인간성에 대한 성찰’과 ‘세계에 대한 재발견’ 등의 의미가 있는 르네상스의 정의에 놓고 볼 때, 우리 역사를 아름답게 만들려는 분칠이 아닌가? “이익을 포함하여 19세기 말까지 어느 정치가나 지식인도 인간은 본시 자유롭고 평등한 존재라는 정치철학에 도달하지 못하였다.”(쪽 78-79).

역사적 진실에 해악은 없다

이 교수의 글에는 경제사의 학문적 성과에 냉담한 한국사학계에 대한 절제된 분노가 구절구절 담겨 있지만 정중한 격식을 잃지 않고 있다. 한국사 서술에서 ‘개인의 존엄’과 ‘자유의 확대’에 대한 몰이해 등을 질타하고 있기에, 이영훈 교수야말로 한국사에서 보기 드문 ‘실증주의와 자유주의 사학의 선구자’라고 칭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기에 이 교수에게는 노비제의 해체에 가장 공헌한 27대왕 영조가 바로 성군이다. 그의 모친은 궁중의 비천한 무수리였다. 그의 책은 한국사에 대한 전반적인 의구심을 가중시키고 있다.

무엇보다 이 책은 조선에 대한 시야를 넓혀준다는 점에서는 일독할 만한 가치가 있다. 가뜩이나 영웅과 위인이 부족한 이 시점에서 세종마저 흠집을 내면 한국사는 이제 위인이 없는 역사시대로 접어드는 것이 아닌가 걱정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기우에 불과하다. 역사적 인물이나 사건은 시대적 환경에 따라서 얼마든지 다양하게 해석될 소지가 있기에 그런 과정을 통해서 과거를 더 여유를 가지고 깊게 관조할 수 있다.

안타깝게도 한국사 학계는 이 교수의 세종연구를 통한 도발적 비판에 대해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다. 이 교수는 학계가 ‘집단연고’의 무리에 불과하기에 새로운 학설을 공정하게 평가하는데 매우 인식하다고 주장하는 바, 아무쪼록 학계는 서평을 통해서라도 적절한 응답을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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