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 자화상의 비밀... 예술가가 세상에 내놓은 얼굴
[신간] 자화상의 비밀... 예술가가 세상에 내놓은 얼굴
  • 김민성 미래한국 기자
  • 승인 2018.05.21 0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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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로라 커밍은 미술평론가. 『리스너』 『뉴스테이츠먼』 『리터러리 리뷰』의 편집자, BBC 라디오3의 간판 격 예술문화 프로그램 「나이트웨이브스」의 진행자로 일했다. 1999년부터 영국의 시사주간지 『옵서버』의 미술평론가로 활약 중이다. 커밍의 첫 책인 『자화상의 비밀』은 출간된 그해 영국 유수 언론에서 뽑은 ‘올해의 책’에 선정되는 등 호평을 받았다. 2016년에는 분실된 벨라스케스 초상화의 행방을 추적하는 『사라진 남자―벨라스케스를 찾아서(The Vanishing Man: In pursuit of Velazquez)』를 펴내 역시 호평을 받았다.

1905년 어느 겨울, 뮌헨 알테피나코테크 미술관 경비는 순찰하다가 이상한 점을 발견한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자화상인 알브레히트 뒤러의 1500년 작 「자화상」의 양쪽 눈이 날카로운 도구로 손상돼 있었던 것이다. 그 결과 형형한 빛을 내뿜던 뒤러의 오른쪽 눈은 흐릿해졌고 왼쪽 눈은 생기를 잃었다(현재는 복원돼 있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여전히 흠집을 발견할 수 있다). 뒤러의 눈에 손상을 가한, 잡히지 않은 이 범인은 왜 이런 일을 벌인 것일까? 

뒤러의 이 자화상은 오랜 시간 동안 숭배의 대상이자 반감의 대상이었다. 무엇보다 이 자화상이 엄청나게 강렬한 존재감으로 관람자의 시선을 잡아끌기 때문일 것이다. 뒤러 자화상의 훼손은 다소 극단적인 예이긴 하지만, 모든 자화상은 분명 관람자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초상화와 달리 자화상이 현실에 존재했던 화가 자신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초상화가 실제 인물의 모습을 반영하고 있는 것에서 더 나아가, 자화상은 화가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 일어나는 일까지 (화가가 의도했든 그렇지 않았든 간에) 드러낸다. 

자화상은 화가와 그림의 결합이다. 아무리 못 그렸어도, 아무리 간략하고 서투르게 그려졌어도, 모든 초상화는 이미지로 전환되기 전의 실제 인물과 마주하는 것 같은 느낌을 담고 있다. 자화상은 거기서 더 나아가 그 둘, 즉 인물과 이미지가 하나이며 동일하다고 천명한다. 자화상을 두고는 ‘작품과 그것을 낳은 작가는 별개’라는 말을 쉽게 할 수가 없다. 자기 자신을 그리면서 예술가들은 그들의 외양보다 훨씬 깊은 무언가를 드러낸다. 세상이 자신을 바라봐주기를 바라는 방법, 그들 스스로 드러내고자 했던 자신의 모습에 관한 진실을 말이다. 지은이는 학계의 딱딱한 이론 틀이나 전문용어에 빠지지 않고, 문학·시·영화 등 다양한 이야기를 끌어와 쉽고 문학적으로 자화상의 비밀을 풀어내고 있다. 

화가는 왜 자화상을 그렸을까? 

풍성한 도판으로 채워졌을 뿐 아니라 유려하게 쓰인 이 책에서, 『옵서버』의 미술비평가 로라 커밍은 뒤러부터 렘브란트까지, 또 벨라스케스에서 반 고흐와 뭉크, 워홀 그리고 신디 셔먼 등 현재에 이르기까지 자화상에서 펼쳐지는 드라마를 탐색한다. 지은이는 왜 자화상이 시선을 끄는지 그리고 화가들이 자신에 대해 생각하는 가장 내밀한 모습을 자화상이 어떻게 드러내는지, 거기에 더해 자화상이 실제 삶에서 우리의 행동을 어떻게 모방하는지에 대해서 숙고한다. 

화가들은 왜 자화상을 그렸을까. 이유는 다양하다. 때로는 자신의 실력을 후원자나 잠재 고객에게 알리기 위한 광고의 용도로, 때로는 고백이나 러브레터로, 때로는 분노와 항의를 표출하기 위한 수단으로, 심지어 때로는 ‘자살 노트’의 목적으로 제작되기도 했다. 독일 태생의 펠릭스 누스바움은 가슴에 유대인임을 뜻하는 노란별을 달고 있는 자화상을 그렸는데, 이 그림을 그렸을 무렵 그는 유대인임을 숨기고 도망 중이었기에 그는 실제로 별을 달았던 적은 없었다.

따라서 이 그림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일종의 고백이었던 셈이다. 또 초상화가로 이름 높은 조슈아 레이놀즈는 화가로서 자부심을 드러내거나 스스로를 홍보하려는 목적으로 많은 자화상을 제작했다. 그런가 하면 17세기 이탈리아 화가 크리스토파노 알로리는 연인에게 버림받자 성경의 이야기를 가져와 연인을 비난했다. 적장 홀로페르네스의 머리를 자른 여인 유디트를 연인의 얼굴로, 그녀가 들고 있는 잘린 머리는 바로 알로리 자신의 얼굴로 그린 것이다. 사랑과 감사의 뜻으로 자화상을 그린 경우도 찾을 수 있다. 17세기 스페인의 화가 무리요는 아버지의 모습을 영원히 간직하고 싶다는 아이들의 요청에 따라 자화상을 그렸고, 고야는 자신을 살려준 의사 아리에타에게 감사하는 뜻에서 자신의 몸을 받치고 컵을 입에 대주고 있는 의사의 모습을 그렸다. 

이 모든 제작의도를 지은이는 한마디로 정리한다. 화가가 자신에 대해 숙고하고 그것을 세상에 이야기하고자 할 때, 즉 세상을 향해 화가가 무언가 얘기할 필요나 요구가 있을 때 제작된다는 것이다. 이 책의 원제인 ‘세상을 향한 얼굴(A Face to the World)’은 바로 그런 뜻을 담은 것이다. 

세상을 향해 매번 변화하는 ‘얼굴’을 만들어내야 하는 것은 자화상을 그린 화가들에게만 해당되는 일은 아니다. 실은 이것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매일매일 하는 일이다. 회사에서의 얼굴, 애인을 대할 때의 얼굴, 가족을 대할 때의 얼굴, 혼자 있을 때의 좀 더 편안한 얼굴이 모두 다를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우리는 자화상을 보면서 그것을 그렸을 때 화가가 처했던 상황을 상상하며 자신의 경우에 대입해볼 수 있고, 자화상을 보면서 마치 화가 그 자신을 마주하고 있는 것처럼 느낄 수 있다. 

사람들의 얼굴 구경하려고 합승마차 타는 것을 즐겼다는 인상파 화가 에드가르 드가는 “서로를 바라보기 위해 태어난 것, 그것이 인간 아닌가?”라고 했다. 다른 이의 얼굴을 보고 싶어하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다. 다른 사람이라는 존재는 본질적으로 타인이자 동시에 나를 비추는 거울이기 때문이다. 이 책에 실린 자화상들을 보면서 독자들은 화가가 세상에 보이고자 선택했던 그들의 얼굴을 볼 수 있고, 거기서 또 다시 자신의 얼굴을 비춰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럼으로써 그림과, 더 나아가 화가와 내밀한 대화를 나누는 경험을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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