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명적 환각제, ‘평화·자주·민족’
치명적 환각제, ‘평화·자주·민족’
  • 허화평 전 국회의원
  • 승인 2018.05.25 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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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대국가 간 교섭에서나 사상 투쟁이 벌어지고 있는 사회에서 언어에 대한 정확한 이해는 매우 중요하다. 경우에 따라서는 한 개의 단어, 한 줄의 글이 국면 전체를 좌우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상은 추상적인 의미가 강한 언어를 사용할 때일수록 생겨나기 쉽다.

2005년부터 통일부 주관 하에 남북 언어통일 사업을 진행하고 있는 ‘겨레말 큰사전 남북공동편찬사업회’가 확인한 바에 의하면 남한 국민과 북한 인민이 사용하고 있는 일상용어의 34%, 학술 및 전문 용어 64%가 다르다고 한다. 이것은 분단 73년이 초래한 자연 현상이다. 언어란 시간의 경과와 함께 의미가 바뀌거나 장소와 사람에 따라 해석이 달라질 수도 있다.

남한의 정상과 북한의 최고 권력자가 만날 때마다 주문(呪文)을 읽듯이 강조하는 단어가 ‘평화, 자주, 민족’이다. 2018년 4월 27일 판문점에서 이뤄진 남북정상 회동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나 정치사회적인 면에서 이들 단어만큼 추상적인 것도 드물다.

평화라는 말에 담긴 비극

평화(平和)는 인류가 추구하는 궁극적 소망이 담긴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언어이지만 적대국가 간 이뤄진 평화를 위한 약속은 유리 그릇처럼 깨지기 쉽다는 것이 지난날의 경험이다. 1970년대 이래 남과 북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한반도 평화를 합창해왔으나 갈등과 충돌은 오히려 늘어났다.

평화라는 단어가 인류에게 얼마나 큰 환상과 좌절과 비극을 안겨줬는가를 말해주는 20세기 최대 사기극은 1938년 9월 영국 총리 체임벌린 영국 총리와 히틀러 독일 나치스 총통 간에 있었던 뮌헨 회담이다. 히틀러가 유럽 지배를 꿈꾸며 군비 증강과 전쟁 준비에 박차를 가하면서 체임벌린에 의한 평화의 손짓을 받아들였을 때, 체임벌린은 체코슬로바키아의 동의 없이 독일에 의한 슈데텐 지방 합병을 동의해준 대가로 유럽 평화라는 종잇조각 약속을 받아들고 런던으로 돌아와 의기양양했을 때 영국 국민은 환호했고, 유럽국가 국민들은 안도했으나 1년 후 히틀러는 폴란드 침공을 시작으로 유럽과 세계를 전쟁 속으로 몰아넣었다.

뮌헨에서 체임벌린이 ‘전쟁 없는 평화’를 말했고 히틀러가 ‘전쟁을 위한 평화’를 약속했다는 것이 명백해졌을 때 체임벌린은 머리를 숙이고 정치무대에서 퇴장해야 했고, 히틀러는 파멸의 길로 나아가야만 했다. 그들은 평화라는 똑같은 단어를 사용했으나 각자가 생각한 평화의 의미는 완전히 상반된 것이었다. 일반적으로 진정한 평화를 바라는 자유주의자는 만인을 위한 선의의 입장에서 평화를 말하지만 혁명이나 전쟁을 염두에 둔 전체주의자는 자신과 자신을 정점으로 하는 지배집단을 위한 악의에 입각해 평화를 내세우는 경향이 강하다.  맑시스트들, 사회주의자들이 대표적이다.

우리는 1938년 뮌헨 회담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북한의 최고 권력자가 말하는 평화, 남한의 최고 지도자가 말하는 평화가 같은 의미를 지닌 평화인가 하는 것은 한반도 미래 운명을 좌우하는 지극히 중요한 문제다. 평화가 전쟁이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면 지금 현재 남에도, 북에도, 남북 간에도 평화가 유지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북한에는 자유가 없고 남한에는 자유가 있다.

따라서 북한에서의 평화는 자유가 없는 평화이고 남한에서의 평화는 자유가 있는 평화이다. 사용되는 단어는 같지만 본질은 정반대다. 따라서 북한이 남한과 평화를 약속하려면 북한 인민에게 자유가 허용된 상태에서 거론해야만 합리적이다. 당연히 남한의 최고 지도자가 북한의 최고 권력자와 만나 평화를 약속할 경우 자유 유무 확인이 전제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지 않고 내정간섭이니, 내재적 접근이니 하는 구실을 내세우거나 남북 화해를 위해서 따지지 말자고 하게 되면 북한의 위장평화 공세에 속아 넘어가게 되고 남한 국민을 기만하게 된다.

김정은이 말하는 평화는 자유가 없는 평화다. 주체 사회주의 깃발 아래 민족해방, 대남 적화통일을 최고 목표로 하고 있는 전체주의 체제에서 평화란 최고 권력자 한 사람만의 평화를 뜻하고 억압과 맹종이 전체 인민을 지배하는 침묵의 평화를 뜻한다. 최고 권력자 옆에서 졸거나, 건성건성 박수만 쳐도 끌려가서 총살형을 당하는 북한 사회의 최고 권력자가 말하는 평화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자유대한민국 국민은 평화를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 없는 평화를 반대하고 자유 있는 평화를 옹호할 뿐이다. 대다수 국민이 평화에 환호하지만 북이 말하는 평화와 우리가 바라는 평화를 구분하지 않는 우를 범하는 경향이 있고, 친북좌파 인사들과 민족 정서가 강한 국민들은 평화 구분 자체를 잘못된 것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정체가 확실하지 않은 사람들이 거리에서 평화 서명을 받으러 다니고 있다. 서명을 거부하면서 위험을 지적하면 “그러면, 전쟁을 하자는 거냐!”라고 반문한다고 한다.

북한 권력자들이, 북한 사람들이 평화를 말할 때 우리가 명심해야 할 점은 그들이 자유가 있는 평화를 말하는 것인지, 자유가 없는 평화를 말하는 것인지를 구분해야 한다. 남한의 최고 지도자는 북한의 최고 권력자를 만날 때마다 자유가 있는 평화를 강조해야 한다. 이 경우 대한민국 대통령은 헌법적 책무를 다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북한은 김일성 이래 민족해방 대남적화통일이라는 당과 국가의 최고 목표를 위해 위장평화 공세를 멈춘 적이 없다. 그들이 자유대한민국을 향해 말하는 평화는 적화통일을 위한 투쟁술책이자 대외선전용 위장 슬로건에 불과했다.

1938년 9월 30일 영국의 헤스턴 공항에서 네임 체임벌린 영국 총리가 히틀러와 맺은 평화협정 '뭔헨협정' 조인문을 흔들며 "이것이 우리시대의 평화"라고 자랑스럽게 선언했다. 그리고 정확히 1년 뒤인 1939년 9월 히틀러의 폴란드 침공으로 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1938년 9월 30일 영국의 헤스턴 공항에서 네임 체임벌린 영국 총리가 히틀러와 맺은 평화협정 '뭔헨협정' 조인문을 흔들며 "이것이 우리시대의 평화"라고 자랑스럽게 선언했다. 그리고 정확히 1년 뒤인 1939년 9월 히틀러의 폴란드 침공으로 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자주보다, 주권이 우선되어야

북에는 주체(主體)와 자주(自主)가 있고 남에는 오직 종속과 예속이 있을 뿐이다. 남한은 미 제국주의자들의 점령 하에 있고 남한 인민은 그들의 꼭두각시들이다. 이것은 북과 남한 내 친북좌파들이 일관되게 주장하고 있는 상투적 선전 내용이다. ‘주체’란 북한에서만 사용되는 언어다. 북한식으로 한다, 우리식으로 한다는 의미지만 ‘김일성식으로 한다’는 의미가 강하다.

구소련제국이 붕괴하고 맑스레닌주의 실험이 실패로 끝났을 때 김일성은 활로를 모색하기 위해 김일성주의, 즉 주체사회주의라는 사이비 사상을 공식화함으로써 등장한 단어다.  북한의 김일성 수령체제와 김씨 일가 세습체제, 시대를 역행하는 도그마적 사회주의 체제 등 모든 것이 주체라는 미명 하에 정당화되었다. 주체가 지닌 결정적 한계는 고립적이고 배타적인 속성으로 인해 북한을 벗어나면 쓸모가 없게 되는 점이다. 따라서 그들은 남한에 대해서 주체가 아닌 자주(自主)를 내세우고 있다.

자주란 식민지 지배를 받는 경우, 강대국 지배하에 놓여 있는 경우에 사용되는 단어일 뿐 주권국가에서는 사용하지 않는 단어다. 일제 식민지 지배 하에서 우리의 동포들은 자주독립을 외쳤고, 오늘날 중국의 지배하에 놓여 있는 티베트 민족이 자주를 요구하고 있는 것은 국가가 없었고, 국가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 모든 독립 국가는 예외 없이 주권국가다. 독립국가에서는 자주란 무의미하고 오직 주권(sovereignty)만이 의미가 있다.

근대 주권국가란 유럽에서 있었던 30년 종교전쟁(1618-1648) 결과 생겨난 웨스트팔리아 시스템에서 비롯된 것으로 국가 간 상호 주권 존중, 상호 불간섭, 상호 협력이라는 기본 원칙을 전제로 한 개념이다. 19세기 이후 자유주의 국제 질서가 신장되면서 각국의 주권 행사는 당연하고 신성한 것이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2차 세계대전 후 냉전을 거치면서 미구(未久)의 전쟁을 방지하기 위해 유지되고 있는 군사동맹들은 모두가 동맹국가들 간의 상호 주권 존중을 기본 원칙으로 하고 있다.

NATO, 미일동맹, 한미동맹이 대표적 사례들이다. NATO 사령관이 미군 장성이라고 해서 가맹국들의 주권이 침해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은 공동의 목표와 이익을 위해 주권국가 간 합의에 따라 이뤄진 동맹 관계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국제사회에서 강대국이라고 해서 약소국의 주권을 침범할 수 없다. 글로벌 시대 일국주의(一國主義)는 유일 초강대국인 미국이라 해도 불가능하다. 지금은 다자주의(多者主義, multilateralism), 즉 다국주의(多國主義) 시대이므로 자유와 평화와 번영을 위한 상호 의존적 협력은 불가피할 뿐 아니라 필수적이다.

주한미군은 한반도 자유 평화를 지키기 위한 군사동맹군이며 인류 보편 가치를 추구하기 위한 동반자, 즉 보편적 가치 추구를 위한 파트너이다. 주한미군의 존재는 북한의 무력 남침의 결과로서 북한이 초청장을 보냈다고 할 수 있다. 주한미군이 현존하는 것도 북의 대남적화통일 노선과 대남 군사 위협이 상존하기 때문이다.

주한미군이 행사하고 있는 전시작전통제권을 두고 북과 친북좌파세력들이 종속이니, 예속이니 하는 시비를 하고 있지만 대한민국 정부가 북한 남침으로 누란의 위기에 처했을 때 자청해 일시 위임한 주권적 조치였고, 휴전협정이 유효한 상태에서 북한의 군사적 위협에 효율적으로 대처하기 위해 유지되고 있다. 민족해방 대남적화통일 목표를 포기하지 않고 있는 북한이 주한미군의 존재, 주한미군에 의한 작전통제권 행사를 두고 종속이며 예속이라고 시비하는 것은 적반하장(賊反荷杖)에 가까운 궤변이라고 할 수 있다.

자유대한민국은 어떤 경우에도 미국의 종속국이거나 예속된 국가가 아닌 독립주권국가로서 주권을 침해당한 바가 없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남한의 최고 지도자가 북한의 최고 지도자가 집요하게 요구하는 자주를 맞장구치면서 수용하게 되면 자유대한민국은 여전히 미국의 지배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종속국가임을 스스로 인정하게 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음을 경계하지 않으면 안 된다.

민족이 아니라 시민의 개념을 가지자

남과 북을 통틀어 우리는 단일민족임을 자랑스러워하고 ‘민족(民族)’이라는 단어를 무척이나 강조하는 성향이 있다. 민족이란 일반적으로 동일한 지역에서 장기간에 걸쳐 공동생활을 함으로써 언어, 풍습, 문화, 역사, 정치, 경제 등을 공유하게 된 인간 집단을 뜻하지만 한마디로 정의하기 어려운 지극히 추상적인 단어이다. 종족(tribe), 인종 집단(ethnos)과도 중첩되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2차 세계대전 이후 구미 국가에서는 민족이라는 단어 사용은 금기시되고 있다. 제국주의 시대 인종주의 냄새, 나치스 시대 피 냄새가 진하게 배어 있는 단어이기 때문이다. 지구상 순수한 단일종족은 있어도 순수한 단일민족은 존재한 바가 없다. 국내 인류학 교수 중 한 분은 우리 몸속에는 36개 종족의 흔적이 있다는 글을 쓴 적이 있다.

북한은 순혈(純血)주의를 강조하고 있다. 민족이라는 단어는 일제 식민지 지배 하에서 민족해방을 부르짖으며 ‘민족정신’, ‘민족정기’, ‘민족문화’를 강조한 것과 깊은 관계가 있다. 그러나 이것은 과거에 속하는 것일 뿐 지금과 같은 글로벌 시대, 다민족 사회로 변모해가고 있는 환경에서 더 이상 쓸모가 없게 된 단어이고, 고립을 자초하는 단어다.

20세기 히틀러가 게르만 민족의 우월성을 내세워 유대 종족을 말살하고 유럽을 지배하기 위한 환각제로 악용한 것이 민족이었으나 이러한 위험을 내다봤던 영국의 디즈레일리는 민족이라는 단어 사용을 경계하라고 했던 지도자였다. 그는 1874년 총선에서 휘그(Whig)당을 물리쳤고 토리(Tory)당 내각을 출범시켜 1880년까지 빈사 상태까지 갔던 당을 구원하고 빅토리아 황금시대를 열었던 인물이다.

그가 제국주의적 대외정책을 추진하면서도 대영제국의 결속을 위해 ‘하나의 민족’이라는 표현 대신에 ‘하나의 국민’이라는 표현을 쓰라고 강조한 것은 민족이라는 단어는 실체가 애매한 추상적 언어이기 때문에 국가공동체, 대영제국이라는 거대 공동체 구성원으로서의 정체성을 애매하게 만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맑시즘 출현과 레닌 혁명 성공으로 국제정치 무대에 등장한 공산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은 ‘민족’ 대신에 ‘계급’을 앞세워 “세계 노동자들이여 단결하라!,” “국제 무산계급자들이여, 단결하라!”는 깃발을 내걸었다. 당연히 민족주의자들은 설 자리를 잃게 되고 경계와 제거의 대상으로 전락했으나 식민지 민족해방을 고무하고 지원하기 위해 한때의 투쟁전략으로 민족이라는 단어를 일시적으로 사용했다.

그러나 그들이 말하는 민족해방이란 무산계급사회주의 국가로 나아가기 위한 전(前)단계였을 뿐이다. 역사적으로 사회주의자들에게 민족은 경계의 대상이었다. 북한 역시 같은 입장에 서 있으면서 ‘민족,’ ‘우리 민족끼리’ 운운하는 것은 남남갈등을 심화시키고 반미투쟁으로 주한미군을 몰아내기 위한 투쟁 방식의 하나다. 그들이 말하는 민족이란 반일, 반미하는 노동자, 농민, 군인, 무산 지식인을 중심으로 하는 무산계급집단, 프롤레타리아 집단을 의미한다. 그들이 ‘우리 민족끼리 놀자’는 것은 ‘같은 계급끼리 놀자’는 것을 뜻한다.

글로벌 시대, 보편 가치 공유시대, 자유주의 사회, 다민족 사회에서는 오직 국민과 시민이 존재할 뿐이다. 지금은 ‘민족 정기 함양’이나 ‘민족 정신 함양’ 시대가 아니라 보편 가치 공유시대, 다원주의 시대, 다양화 시대이고, 계급 윤리와 이익이 아니라 국민 윤리와 이익이 강조되는 시대이다. 민족을 들먹이는 북한이 2018년 5월 10일 대한민국 국민 6명을 잡아두고 있으면서 북한에 억류중인 동족이 아닌 미국인 3명을 풀어주는 것이 북한이 말하는 소위 ‘우리 민족끼리’의 행태다.

북한과 남한 내 친북좌파 인사들이 금과옥조(金科玉條)처럼 떠들어대는 ‘평화, 자주, 민족’이라는 언어는 치명적 환각제다. 그들이 나팔처럼 불어대는 이들 단어 속에는 깊은 함정이 숨겨져 있고 착각과 오해를 초래할 수 있는 위험성이 내포되어 있다. 또한 이들 단어 속에는 국민의 이성을 마비시킬 수 있는 강한 환각 요소가 있기 때문에 경계하고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자신들의 정치 허영심과 감춰진 정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국민으로 하여금 헛된 환상과 망상을 갖게 하는 언어 사용 만큼 위험하고 나쁜 것도 없다. 국민을, 시민을 환각제의 희생자로 만들고 국가를 위험에 빠뜨리기 때문이다.

허화평 전 국회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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