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 이명박-박근혜 정부의 외교안보 실책에 대한 반성
[논단] 이명박-박근혜 정부의 외교안보 실책에 대한 반성
  • 고성혁 역사안보포럼 대표
  • 승인 2018.05.28 1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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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는 6월 12일 싱가포르에서 트럼프-김정은 회담을 앞두고 있는 가운데 14일 주요 일간지 1면 톱기사 제목은 ‘미국의 북한판 마샬플랜’이 장식했다. 북한이 완전한 핵폐기를 할 경우 미국은 북한에 대규모 투자를 한다는 이야기다. 기존의 대북경제지원과 대규모 투자는 성격 자체가 다르다. 전자는 미 정부 차원의 경제지원인 반면에 후자는 민간 차원의 경제투자 및 교류를 의미한다. 트럼프의 ‘북폭’이 곧 임박했다고 믿었던 우파의 입장에서는 ‘도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거야!’라는 생각이 들만큼 현 상황은 혼란스럽다.

청와대는 ‘평화의 시대 봄이 온다’면서 온갖 매체에 광고를 하면서 애드벌룬을 띄우고 있다. 트럼프-김정은 회담을 앞두고 6·13 지방선거는 뒷전에 밀려난 지 오래다. 우파의 목소리는 너무 작아 들리지도 않는다. 5월 11일 조선일보에는 ‘보수는 늙은 사람들의 전유물인가’라는 최보식 칼럼이 올라왔다. 욕먹을 작정을 하고 이 글을 쓴다면서 최보식 선임기자는 ‘지난 좌파 정부 시절 어떤 보수단체는 소위 나라를 지키기 위해 아스팔트에서 열심히 싸워왔다. 그 단체를 결성한 분은 15년이 지난 지금까지 회장직을 맡고 있다. 그 자리가 벼슬처럼 되고 만 것이다’라는 뼈아픈 비판을 했다. 그리고 칼럼의 끝 부분에는 ‘보수 집회에 성조기나 트럼프 사진을 제발 흔들지 않았으면 한다. 한미동맹을 위해서 그런 것이지만 젊은 세대에게 보수는 마치 주권 의식이 없는 사대주의자처럼 비친다’고 충고까지 했다.

국내외 모든 여건은 보수우파와는 정반대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 보수우파가 어쩌다가 이 지경이 되었는지 이제는 냉철하게 자아 비판을 할 때가 되었다. 특히 지난 이명박-박근혜 정부는 외교안보 부문에서 무엇을 잘했고 또 무엇을 잘못했는지 되짚어 보고자 한다.

군의 명령체계를 몰랐던 이명박 정부의 안보

이명박 대통령은 500만 표차라는 압도적인 지지로 당선되었지만 국내정치 부문에서 과단성 있게 정치를 펼치지 못했다. 광우병 사태 당시 청와대 뒷산에 올라가서 눈물 흘리며 ‘아침이슬’을 불렀다는 것은 두고두고 웃음거리로 남게 되었다. 그러나 외교 부문에서는 뚜렷한 성과를 냈다. ▶노무현 정부 시절 손상된 한미관계 복원 ▶미·일·중과 통화 스와프 체결을 통한 리먼-브러더스사태의 국제 금융위기 극복 ▶G20 정상회담 성공적 개최를 통한 한국의 국제 발언권 강화 ▶대량살상무기 확산방지구상(PSI) 참여 등을 꼽을 수 있다. 그러나 안보 쪽으로 도저히 좋은 점수를 줄 수 없다. 이명박 대통령의 가장 큰 실책은 연평도 포격 당시 제대로 응징을 못했다는 것이다. 이명박 대통령은 국군통수권자로서는 매우 잘못된 선례 두 가지를 남겼다. 천안함 침몰과 연평도 포격에 대해 두 가지 중 한가지만이라도 국군통수권자로서 응징을 했어야 했다. 그러나 이명박 대통령은 두 번 모두 기회를 놓쳤다. 그의 자서전을 통해 당시 상황을 되돌려 보자.

 2010년 3월 26일 오후 11시 42분 청와대 벙커

“승조원 45명 구조 완료, 나머지 인원 구조 중”  상황판에 구조 상황이 떴다. 천안함에는 104명이 타고 있었다. 나머지 인원은 침몰하는 배의 선실에 갇혀 있는 상황이었다. 안타까웠다. “일단 인명을 구조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인명 구조에 최선을 다하고 국방부에서는 원인을 조속히 규명하도록 하세요.”

상황실에서 지시를 하고 TV로 눈을 돌렸다. TV에서는 ‘해군 초계함 북한 공격으로 침몰,’ ‘해군초계함 북 설치 어뢰에 부딪혀’ 등의 내용이 보도되고 있었다. “언론은 대체 어디서 듣고 저런 보도를 내고 있는 거지? 부정확한 얘기가 흘러나가서는 안 됩니다. 무엇보다도 신뢰가 중요합니다. 국제사회에서도...(이명박 전 대통령 자서전 338p)

…북한의 소행임이 밝혀지자 나는 응징 조치를 생각했다. 군 수뇌부도 천안함 폭침의 몇 배에 해당하는 응징을 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고 보고했다. 그러나 북한의 소행을 밝히는 증거를 찾는 데 50일이라는 시간이 소모됐다. 무력 보복 조치를 하기에는 많은 시간이 흐른 것이었다. 어쩔 수 없이 무력 조치는 포기해야 했다...(이명박 전 대통령 자서전 342-343p)

연평도 포격직 후 청와대 상황

…상황실로 가면서 머릿속이 복잡했다. 6·25 직후 그때까지 남한 본토가 공격받은 전례가 없었다. ‘북한이 전면전을 일으키는 것인가’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북한 정권이 무너질 각오를 하고 전면전을 일으킬 용기는 없다고 생각했다. 중국조차 그런 상황을 수용하지 않을 것이다. 결국 기습 공격이라고 생각하고 대응 방안을 고민하며 상황실에 도착했다… 중략…

연평도 포격에 대한 대응을 논의하던 중, 김두우 기획관리실장이 뛰어들어오더니 임태희 대통령실장에게 귀엣말을 하는 게 들렸다. “지금 TV 보도에서 연평도 포격에 대한 대통령의 메시지로 ‘확전 자제’ 보도가 나오고 있습니다. 우리 영토가 침공 당하는데, 대통령의 첫 메시지가 이렇게 나가면 안 됩니다.”

임 실장은 바로 내 앞에 앉아 있었다. 당시 안보관계장관회의에서는 북한의 소행에 대한 단호한 응징이 논의되고 있었다. 비행기를 띄워 북한의 도발 원점을 포격하는 방안도 논의 중이었다.
상황실 TV를 보니 실제로 그런 엉뚱한 보도가 자막으로 나오고 있었다. 황당한 생각에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높아졌다. “어디서 그런 소리가 나온 거죠? 하지도 않은 얘기가 왜 뉴스에 나와요? 누가 저런 말을 언론에 했어요? 지금 우리 민간인이 포격당했는데 확전을 걱정할 상황이에요?” 알고 보니 언론의 브리핑 요구가 빗발치는 상황에서, 회의에 참석한 한 인사의 사견이 잘 못 전달되어 언론에 나간 것이다. (이명박 대통령 회고록 346~347p)

퇴임 후 이명박 전 대통령은 재임 중  천안함 폭침과 연평도 포격 도발에 제대로 응징하지 못한 것을 가장 아쉬운 점으로 꼽았다. 그런데 연평도 포격 도발 건과 관련해서는 당시 김태영 국방장관과는 말이 엇갈렸다.

유용원 조선일보 기자는 김태영 국방장관과 인터뷰를 했다. 이명박 대통령은 퇴임 직전 언론 인터뷰에서 군에 공습을 지시했으나 김 장관 등이 유엔사 교전규칙 등을 내세워 공습을 반대해 할 수 없었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 김태영 전 국방장관은 이의 진위를 묻는 유용원 기자의 질문에 대해 “대통령과 옛 부하가 진실 공방을 벌이는 모습은 바람직하지 않다. 나도 하고 싶은 말은 있지만 일절 인터뷰에 응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친중 반일 외교의 절정 박근혜 정부

이에 대해 필자 역시 취재를 했다. 결론은 이명박 전 대통령이 명확하게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는 점이다. 단지 공군이 대응할 수 있는지 ‘알아보라’는 투의 말이었다. 이 말에 군은 당연히 방송에서 ‘확전 방지’라는 청와대 발 보도가 나온 마당에 적극적으로 나설 수 없는 입장이었다. 만약 대통령이 문서로 명확하게 ‘응징하라’고 명령했다면 군은 어떤 방법으로든 실행에 옮겼을 것이다. 군에 대한 대통령의 명령은 ‘문서’로 명확하게 전달해야 한다. 군의 명령체계를 몰랐던 이명박 대통령의 한계였다.

우파세력의 기대를 한 몸에 안고 출범한 박근혜 정권이었다. 그러나 외교안보 부문에서 무엇을 잘했는지 찾고자 하면 정말 힘들다. 그래도 잘한 것을 거론해 본다면 아마도 ▶개성공단 폐쇄 외엔 딱히 없는 듯하다. 정치적으로는 통진당 해산을 말할 수도 있겠지만 외교안보 부문도 아닐 뿐더러 해산의 주체는 정부가 아니라 헌법재판소다.

결론부터 말한다면 박근혜 정부의 외교안보정책은 낙제점이다. 특히 ▶친중반일노선은 한·미·일 삼각동맹에 흠집을 냈다. 그 외에 ▶질질 끈 사드 배치 ▶중국 전승절 참석 ▶제주 4·3사건 국경일 제정 ▶G7 정상회담 초청을 무시하고 아프리카 순방 등을 꼽을 수 있다.

2015년 2월 27일 워싱턴 카네기 국제평화연구소 세미나에서 웬디 셔먼 국무부 정무차관 역시 우회적이긴 하지만 박근혜 정부의 반일(反日) 외교정책에 대해 꼬집은 바 있다. ‘민족 감정은 여전히 악용될 수 있고 정치 지도자가 과거의 적을 비난함으로써 값싼 박수를 얻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러나 이는 진전이 아니라 국가 간 관계(한·미·일 동맹)에서 마비를 초래한다’고 비판했다.
2013년 12월 6일 바이든 미 부통령은 청와대를 예방했다. 박근혜 대통령과 회담하는 자리에서 그는 “미국은 계속 한국에 베팅할 것”이라면서 “미국 반대편에 베팅하는 것은 좋은 베팅이 아니다(It’s never been a good bet to bet against America)”라고 말했다. 이것은 분명한 박근혜 정부의 친중노선에 대한 경고였다.

아무리 박근혜 전 대통령을 옹호한다 하더라도 도저히 옹호할 수 없는 것이 있다. 그것은 2015년 9월 3일 중국 전승절에 참석한 것이다. 천안문에 시진핑, 푸틴과 나란히 선 박근혜 전 대통령의 모습은 충격적이었다. 당시 한미연합사의 미군장교들 역시 내심(內心) 격앙되어 있었다고 공군 출신 예비역 장성은 말했다. ‘어떻게 한국 대통령이 저들과 나란히 천안문에 설 수 있느냐?’,‘중국 전승절에 한국이 가야 하는 것이냐?’, ‘중국은 6·25 때 한국을 공격한 나라인데 저길 왜 갔느냐?’ 등의 항의 섞인 말을 들었다고 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주중 대사를 김장수 전 국방장관을 임명했다. 김 장관은 한미연합사 부사령관을 역임한 인물이다. 그를 미국 대사도 아니고 중국 대사로 임명한 것은 미국에 매우 불쾌한 시그널을 준 것이다. 여기에 박근혜 대통령이 직접 천안문 광장 중국 전승절에 참석했으니 동맹외교로선 치명타를 준 행위였다.  그토록 친중외교를 펼쳤지만 북한 미사일을 방어하기 위한 자위적 사드 배치에 중국은 무역 보복을 가했다.

박근혜 정부는 우리의 안보와 직결되는 사드라 불리는 고고도 미사일 방어체계 구축조차도 중국 눈치를 보면서 끌려 다녔다. 좌파 언론에서 미국의 MD에 편입하는 것 아니냐고 떠들면 국방부는 ‘한국형 킬체인 구축’이라는 虛想에 불과한 말로 미국의 미사일 방어망에 편입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장난 했다.

6·25전쟁을 통해 한미혈맹이 이뤄지고 미국의 도움으로 오늘의 대한민국이 된 것은 만천하가 다 아는 사실인데 미국과 MD 협력에 대해 극구 부인했던 것이 박근혜 정부였다. 친중반일 외교를 펼쳤던 박근혜 정권은 안보적으로 얻은 것은 하나도 없었다. 중국 전승절에 왜 박근혜 전 대통령이 직접 참석했는지는 지금도 미스테리다.

G7 정상회담 초청을 외면하고 아프리카로 간 박근혜

2016년 5월 일본 미에(三重)현 이세시마(伊勢志摩)에서 G7 정상회담이 열렸다. 일본에서 열린 G7 정상회담의 핵심 의제(議題)는 북핵과 세계경제 안정화 문제였다. G7 정상회담에 아베 일본 총리는 박근혜 전 대통령을 초청했다.

한국은 북핵 문제의 당사국이자 서방에선 G7 다음에 해당하는 경제력을 지닌 나라다. 인구 5000만 이상에 개인소득 3만 달러에 근접하는 나라는 G7의 이탈리아 다음으로는 바로 한국이다. 미국 입장에서도 한·일간 관계가 돈독해야 할 필요도 있다. 그러나 박근혜 대통령은 같은 기간 아프리카를 방문한다고 하여 G7 회담 초청에 응하지 않았다. 외교적으로 큰 실수였다.

국내 경제가 어려운 이 시점에서 G7 정상회담에 참석해 경제외교를 해야 하는 것이 순리다. 또한 미·일 정상회담과 G7 정상회의에서 북핵 문제에 한국의 요구 조건을 담았어야 했다. 억지로 참석하기도 힘든 G7 정상회담에 초청한 것을 뿌리친 꼴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나서 박근혜 대통령이 향한 곳은 아프리카의 이디오피아, 우간다, 케냐였다. 과연 외교의 비중으로 볼 때 G7 정상회담보다 아프리카 순방이 우선해야 했는지, 지금 생각해봐도 한심스러운 일이었다.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캐나다, 일본, 이탈리아 이들 G7 국가는 세계의 핵심 국가다. 한국이 외교의 코어그룹에 겨우 들어갈 수 있었던 상황을 박근혜 대통령은 아프리카 순방이라는 명목으로 스스로 빠진 셈이 되었다. 이것은 친중반일 외교노선과 더불어  박근혜 정부의 크나큰 외교적 실책이었다. 그런데도 아직도 주말마다 태극기와 성조기를 들고 ‘박근혜 탄핵 반대’를 외치는 이들이 있다. 태극기와 성조기도 모자라서 이제는 이스라엘기까지 들고 나오는 실정이다. 일반 대중과는 더욱 더 멀어져만 간다. 80이 넘은 원로들이 또 단체를 만들어서 나라 걱정을 하지만 그것 또한 ‘그 나이에 무슨.... 자식들이나 내보내지’라는 핀잔만 듣는다. 이것이 현실이다.

80년대 운동권은 늘상 ‘미제국주의자 타도’, ‘친일매판자본’이라는 주장을 입에 달고 살았다. 그러나 그들의 주장은 일반 대중에 먹혀들지 않았다. 그러자 그들은 방향을 바꿨다. 미제국주의자 타도에서 주한미군 범죄 문제로, 그리고 위안부 문제로 말이다.

생활밀착형 투쟁으로 방향을 바꿨다. 그렇게 해서 저들은 정권을 잡았다. 이제 우파도 냉철한 자아 비판을 통해 새로운 방법을 찾아야 한다. 종북타도 주장과 태극기와 성조기 흔드는 것으로는 더 이상 안 된다.

고성혁    역사안보포럼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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