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명재상] 탁월한 이재(吏才)와 신중한 처신으로 38살에 정승 오른 한음(漢陰) 이덕형(李德馨)
[조선시대 명재상] 탁월한 이재(吏才)와 신중한 처신으로 38살에 정승 오른 한음(漢陰) 이덕형(李德馨)
  • 이한우 미래한국 편집위원·논어등반학교 교장
  • 승인 2018.05.29 1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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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씨(李氏) 성(姓)을 가진 세 분의 정승(政丞)이 좌우에서 돕고 인도하여 오늘이 있게 되었다.”

임진왜란이 끝났을 때 백성들 사이에서 떠돌았다는 말이다. 이원익, 이항복 그리고 이덕형(李德馨)을 가리키는 말이다.

덕형은 조선초 명문가 광주(廣州) 이씨(李氏)로 연산군 때 정승을 지낸 이극균(李克均)의 5세손이다. 1561년(명종 16년) 한양에서 태어났는데 나면서부터 자질이 뛰어났고 성품 또한 침착하고 굳세고 순후(醇厚)하면서도 조심성이 있었다고 한다. 한양의 북쪽에 살았다고 해서 호를 한음(漢陰)이라고 지었다고 한다.

20세(선조 13년 1580년) 과거(科擧)에 급제해 괴원(槐院-승정원)을 거쳐 사원(史苑-예문관의 별칭)에 천거를 받았으나 당시 장인이던 이산해가 궁중 소장의 서적을 주관할 때라 덕형은 사사로운 친분을 이유로 사절했는데 선조(宣祖)가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을 강(講)하려고 하면서 고문(顧門)에 대비할 재신(才臣) 다섯 사람을 선발케 하고 어부(御符-임금 전용 도서관)의 책을 내주자 마침내 참여했다.

선조의 지극한 총애를 받은 덕형은 초고속 승진을 거듭한다. 홍문관 정자를 거쳐 1583년에 사가독서(賜暇讀書-문풍 진작을 위해 유능한 젊은 관료들에게 독서에 전념하도록 휴가를 주던 제도)를 했고 그 뒤에 부수찬·정언·부교리를 거쳐 이조좌랑이 됐고, 1588년 이조정랑으로서 일본 사신 현소(玄蘇) 등을 접대해 그들의 존경을 받았다. 1590년에는 동부승지·우부승지·부제학·대사간·대사성 등을 차례로 지내고, 이듬 해 예조참판이 되어 대제학을 겸했다. 이 때 덕형의 나이 31살이었다.
 

MBC 월화드라마 '화정'에 등장하는 한음 이덕형
MBC 월화드라마 '화정'에 등장하는 한음 이덕형

담대했던 名士
 

1592년 임진왜란 발발 직후 덕형의 담대함은 두고두고 그의 면모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다. 그의 비명은 당시 그의 행적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임진년(壬辰年, 1592년)에 들어 왜구(倭寇)들이 대거 침입해 우리나라를 천식(食-점차로 먹어 들어감)하면서 이모(李某)를 만나 강화를 논의하겠노라 선언하므로, 선조가 조신(朝臣)들에게 그 대책을 두루 하문(下問)했으나, 모두가 겁에만 질려 대답을 하지 못했다. 이때 공이 나아가 이르기를 “급히 서두르는 것이 신하된 자의 직분입니다”라고 자청하여 단기(單騎)로 급히 달려 구성(駒城-용인(龍仁))에 이르러 보니 벌써 적(賊)의 기세는 걷잡을 수 없이 널리 퍼져 있어 들어갈 틈이 없었다. 곧바로 되돌아 한강(漢江)을 건너와 보니, 대가(大駕)는 이미 서행(西幸-몽진)한 뒤라 사잇길로 뒤쫓아 평양(平壤)에 도착했다.

그동안 적들은 패수(浿水-대동강(大同江)의 옛 이름)까지 핍박해 들어와서 공을 만나기를 청하므로, 공은 또 가길 자청하여 단가(單)로 강중(江中)에까지 나아가 그들을 회견하였다. 뭇 신하들과 여러 장수들은 그 광경을 바라보고 두려움에 질려 얼굴빛이 변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건만, 공은 적을 만나 태연자약한 기세로 꾸짖기를 “너희들이 아무런 까닭도 없이 군사를 일으켜 오랫동안의 우호(友好)를 깨뜨림은 무엇 때문인가?”라고 하니, 현소 등이 이르기를, “우리는 명(明)나라로 들어가려고 하는데, 조선(朝鮮)에서 군도(軍途)를 빌려주지 않았기 때문이다”라고 하는지라, 공은 준엄한 얼굴을 지으며 잘라 이르기를 “너희들이 우리의 부모국(父母國)과 같은 나라를 침범하려고 하니, 설사 우리나라가 망하는 한이 있더라도 할 수 없다. 어찌 화의(和議)가 이루어지겠는가?”라고 했다. 그 후에 현소 등은 떠들썩하게 공을 칭송하여 이르기를 “험악한 적진 속에서도 말하는 품이 지난날 연회의 주석(酒席)에서 하는 태도와 다름이 없으니, 참으로 미치기 어려운 인물이다”라고 했다.

1594년 이조판서, 1595년 병조판서를 지냈다. 이 때 덕형은 큰 위기를 맞게 된다. 1596년에 호서(湖西)의 이몽학(李夢鶴)이 군사를 일으켜 두 고을을 함락하자 홍주 목사(洪州牧使) 홍가신(洪可臣)이 그를 토멸해 주살했는데, 그 잔당(殘黨)이 체포당해 덕형의 이름을 끌어들인 것이다. 덕형은 거적을 깔고 엎드려 처벌의 명을 기다렸으나 선조는 문제 삼지 않았고 병조판서의 자리에서만 물러나게 했다.

정유년(丁酉年, 1597년 선조 30년)에 왜적(倭賊)이 재침(再侵)하자 명(明)나라 황제가 네 사람의 장수(將帥)를 보내면서 병사(兵士) 10만 명을 인솔하게 했고, 어사(御使) 양호(楊鎬)를 감군(監軍)으로 삼았다. 양호는 나이가 어리고 기세를 마구 부려 세상의 명사(名士)들을 얕보는 버릇이 있어 우리나라 사람들은 그 평판을 듣고 몹시 겁을 먹었는데, 선조는 많은 신하들 가운데 오직 덕형만이 그를 상대할 수 있다고 하여 보냈다. 다시 정치에 복귀한 것이다. 양호를 만난 덕형은 첫 대면에서 이렇게 말했다.

“지금 왜적(倭賊)의 기세가 몹시 험악하니 순식간에 한강(漢江)을 건너올 것이다. 까딱 한 번 천참(天塹-천연의 요새지 한강(漢江))을 잃는다면 비록 명군(明軍) 같은 위세(威勢)일지라도 힘이 되기란 어려울 것이다.”

양호는 그 말을 듣고 즉시 서울로 들어가 서둘러 책전(責戰)을 하고 유격장(遊擊將) 마귀(麻 貴)가 거느린 용감한 기병들이 왜적을 직산(稷山)의 소사(素沙) 들판에서 크게 무찔렀다. 그래서 서울이 다시 안정을 찾게 됐다. 그후 양호는 덕형의 일 처리에 감복해 이렇게 말했다.

“이모(李某)는 비록 명(明)나라 조정(朝廷)에 있다 하더라도 예복(禮服) 차림으로 위엄을 갖추어 묘당(廟堂-정승 사무실)에 서서 백료(百僚)들을 복종하게 할 인물이다. 참으로 훌륭하다!”

선조는 이 말을 듣고 곧바로 우상(右相)에 임명하니 나이 38세였는데, 얼마 안 되어 좌의정(左議政)에 올랐다. 20세에 과거에 급제하고 불과 18년 만에 정승의 반열에 오른 것이다. 훈련도감 도제조를 겸한 덕형은 곧바로 명나라 제독 유정(劉綎)과 함께 순천에 이르러 통제사 이순신(李舜臣)과 함께 적장 고니시의 군사를 대파했다.

선조의 한결 같은 총애를 받았던 덕형은 광해군 집권과 더불어 큰 시련기를 맞게 된다. 광해군 초기에 그의 친형인 임해군(臨海君)에 대한 고변(告變)이 있어 삼사(三司)에서 즉시 법대로 다스리길 청하자 광해군(光海君)이 대신(大臣)들의 논의를 물었으므로 공과 좌상(左相) 이항복(李恒福)은 의(義)로써 처단하는 것보다는 은정(恩情)으로 감싸줄 것을 말하였고, 한강(寒岡) 정구(鄭逑)도 도헌(都憲-대사헌)으로서 상소(上疏)하여 전은(全恩-온전히 살려주는 은혜)을 주장했으며, 상신(相臣) 이원익(李元翼)도 차자를 올려 역시 전은을 주장하자 시론(時論)이 떠들썩하게 일어나 전은을 주장한 사람들을 지목하여 호역(護逆)이라 몰아세웠다. 덕형은 남인이었고 당시 세상은 북인 천하였다.

1613년(광해군 5년) 이이첨의 사주를 받은 삼사에서 영창대군(永昌大君)의 처형과 폐모론을 들고 나오자 이항복과 함께 이를 적극 반대하였다. 이에 삼사가 모두 이덕형을 모함하며 처형을 주장했으나 광해군이 관직을 삭탈해 이를 수습했다. 그 뒤 용진(龍津)으로 물러가 국사를 걱정하다 병으로 죽었다. 이때 그의 나이 불과 53세였다. 짧았으나 참으로 많은 일을 한 생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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