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한국 - 월드뷰 공동기획] 혼밥 혼술 시대의 리더십
[미래한국 - 월드뷰 공동기획] 혼밥 혼술 시대의 리더십
  • 이정일
  • 승인 2018.05.31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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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비록 혼자 있지만, 결코 혼자가 아니다. 나는 휴대전화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누구와도 함께 할 수 있다.”

<호모 모빌리쿠스>에서 저자 김성도는 휴대폰 하나만 있으면 세계의 그 누구와도 소통할 수 있는 무한소통의 시대가 열렸음을 알린다. 휴대폰은 분주하고 복잡한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한 본능적인 선택인 것처럼 보인다. 문제는 소통의 홍수 속에서 살아가지만 정작 필요할 때 도움을 구할 만한 사람을 찾기 어렵다는 것이다. 스마트폰은 SNS로 이어진 수많은 관계 속에서 정작
‘나’라는 사람은 없는 풍요 속의 빈곤을 보여준다. 이런 모순은 어떻게 생산되는가?

우리 사회엔 밖으로 드러나 있지만 설명하기 쉽지 않은 모순이 존재한다. 나는 대가족과 함께 성장해 대가족에 대해 잘 안다. 하지만 시대가 변했다. 가족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은 급속하게 바뀌고 있다. 역사적으로 결혼은 아이를 낳는 것이 가장 중요한 목적이었다. 또 가족을 하나로 묶는 강한 끈이었다. 하지만 지금 미국인들의 75%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오늘날 청년들은 결혼의 조건에 더 까다로워지고 있다. 한국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결혼과 독신에 대한 인프라는 문학 작품을 통해서도 구축되고 있다.

문학은 언제나 시대를 반영한다. 1970년대와 1980년대는 정치적으로뿐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격동의 시대였다. 당시 남자들은 경제적 생존이 지상 목표였고 가족 부양이 삶의 전부인 시대를 살았다. 아버지의 부재와 부권 상실은 문학이란 활자를 통해 형상화된다.

그래서 작가 김애란의 <두근두근 내 인생>은 새롭게 들린다. 프롤로그에서 작가는 17살에 부모가 된 나이어린 부모와 조로증(早老症)을 앓는 16살 늙은 자식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아버지가 묻는다. 다시 태어난다면 무엇이 되고 싶으냐고. 나는 큰 소리로 답한다. 아버지, 나는 아버지가 되고 싶어요. 아버지가 묻는다. 더 나은 것이 많은 데, 왜 당신이냐고. 나는 수줍어 조그맣게 말한다. 아버지, 나는 아버지로 태어나, 다시 나를 낳은 뒤 아버지의 마음을 알고 싶어요. 아버지가 운다.”

세상의 모래알 같은 수많은 인연 중에, 우리는 부모와 자식으로 만난다. 그런데 그 특별한 인연의 끈이 먹고 사는 데 바빠 뚝뚝 끊어지곤 한다. 같은 지붕 아래 잠자고 한 밥상에 둘러앉아 식사를 하고, 같은 공간에서 부대끼고 살며 행복을 나누는 가족. 하지만 2030세대에선 이런 소박한 가족을 꿈꾸며 살기가 쉽지 않다. 취업난과 경제 불황으로 결혼은 필수가 아닌 선택이 되었다.
소비 패턴과 TV 속에서 만나는 혼밥 혼술 한국사회가 빠르게 바뀌고 있다. 이젠 혼밥 혼술 같은 나홀로 문화가 하나의 트렌드로 자리잡고 있다. 1인가구와 싱글족의 급등으로 사회 전체가 ‘우리’(We)에서 ‘개인’(Me)으로 옮겨간 것을 체감한다. 오랫동안 밥은 누군가와 함께 먹어야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젠 아니다. 바쁜 스케줄뿐 아니라 경제적 여유나 관계 유지에 대한 부담감 때문인지, 많은 이가 혼자 밥을 먹고 영화를 보고 쇼핑을 하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다.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해 1인가구의 수가 520만 명을 넘었다. 2030세대 두 명 중 한 명은 스스로를 나홀로 족이라고 생각한다. 1인가구가 소비트렌드 주도 계층으로 떠오르자, 이들을 잡기 위한 업계의 움직임도 발빠르다. 편의점에서 도시락으로 끼니를 때우는 풍경은 이젠 자연스러워졌다. 나홀로 고객을 잡기 위해 포장 트렌드도 확 달라졌다. 반 마리 고등어, 간편 채소 같은 1인용 소포장 제품이 생겨나고 있다.

TV에서도 혼밥 혼술을 주제로 한 프로그램들이 인기를 끌고 있다. ‘나혼자 산다’, ‘혼밥혼술’, ‘청춘시대’, ‘조용한 식사’ 같은 프로그램에선 혼밥 혼술이 다양한 모습으로 펼쳐진다. 이제 싱글 라이프는 경제 불황, 취업난과 개인주의에서 비롯된 슬픈 자화상에서 자신만의 시간을 찾으려는 흐름으로 바뀌는 듯하다. 싱글 라이프가 이제는 3S-짧은 시간(short time), 적은 돈(small money), 특별한 경험(special experience)-로 표현되기 때문이다.

2016년 9월 첫방송을 시작한 ‘혼밥혼술’은 노량진 학원가를 배경으로 삼고 있다. 이 드라마는 혼밥과 혼술이 일상인 공시생들의 이야기, 학원 선생님들의 이야기다. 하석진은 한국사 강사로 나오는데, 그가 혼술을 하며 이렇게 속삭인다. “혼자 마시는 게 좋으니까. 굳이 떠들지 않아도 되는 고독이 좋다. 오롯이 나만을 위한 시간. 혼자 술을 마시는 이 시간이 나만의 힐링 타임이다.”
맥락은 다르지만 산문집 <아름다운 저항> 서문에서 방현석은 이렇게 적고 있다.

“누구에게나 빛나는 시간이 있다. 한 사람이 살아가는 동안 가장 아름답고 빛나는 순간은 언제일까. 사람답게 살기 위해 눈물 흘리고 아파하며 싸운 흔적, 그 흔적 앞에서 우리는 가장 아름다운 인간의 시간과 인간의 풍경을 목격한다.”

남을 배려하며 살다보면 진정한 나를 사랑하는 법을 잊곤 한다. 언어학자인 사이토 다카시는 “혼자 있는 시간이 나를 단단하게 만들어준다”고 조언한다. 그는 대입에 실패한 18세부터 첫 직장을 얻은 32세까지 철저히 혼자였다. 친구도, 직업도 없었다. 때문에 그가 쓴 <혼자 있는 시간의 힘>은 울림이 있다. 그래서일까, 작가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 첫 문장이 새롭게 읽힌다. 소설은 이렇게 시작한다.

“그는 홀로 멕시코 만의 바닷가에 조각배를 띄우고 낚시를 하는 노인이었으며, 84일 동안 고기를 잡지 못하였다.”

멀리 가려면 함께 가라

2차 세계대전 이전, 전 세계의 99.9%의 사람들이 시도 때도 없이 만났다. 1950년대 이전, 미국에서도 집, 상점, 일터가 한곳에 모여 있었다. 사람들은 모든 일상사를 걸어서 해결했다. TV도 그렇게 재미가 없었기에, 다들 밖에서 시간을 보냈다. 친한 친구나 이웃들이 시도 때도 없이 만났다. 집 앞에서 시시콜콜한 일상 이야기를 나누며 웃고 떠들었다. 그렇게 시간을 보냈다.
1950년대 베이비부머 시대가 열리면서 주택난이 심각해졌다. 전쟁이 끝나고 평화가 찾아오자 땅값이 싼 도시 외곽에 집을 지어 부동산업자들은 떼돈을 벌었다. 하지만 공동체란 풍경이 뒤틀리기 시작했다. 자동차가 보편화되자 걷는 문화가 사라졌다. 생활에 여유가 생기자 사람들은 스포츠와 취미 생활에 빠져 들었다. 그 결과 이웃과의 교제가 확연히 줄었다. 이젠 미국인 10명 중 7명이 이웃을 모른다. 외로움은 노인 자살의 주요 원인이다.

이건 한국도 마찬가지다. 이젠 ‘전원일기’ 같은 드라마 속 삶은 좀처럼 찾기 힘들다. 미국 드라마 중 ‘프렌즈’나 ‘빅뱅이론’이 있다. 한국에서도 큰 인기를 얻은 미드이다. 프렌즈나 빅뱅이론이 보여주는 것은 행복한 삶은 주변에 있다는 것이다. 미국인들이 이걸 좋아한 이유 중 하나는 함께 모여 웃고 떠드는 걸 그리워하기 때문일 것이다. 상위 1% 안에 드는 똑똑한 사람들도 결국 나와 똑같이 고민한다는 걸 보여준다. 차이는 덤앤더머(dumb & dumber)일 뿐이다.

드라마가 주는 의미는 간결하다. ‘한 올의 실로는 줄을 만들 수 없고, 한 그루의 나무는 숲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의미 있는 인생은 나 혼자서 가꿀 수 없다. 진정한 협력이 필요하다.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 문턱을 넘으면 금방 깨닫는다. 배움은 고립된 사실들을 암기하는 것이 아니란 걸. 배움이란 여러 사실을 연결해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 내는 일이다. 이런 배움을 익힐 수 있는 장소로 교회만큼 좋은 곳도 없다.

교회는 확대된 가정이다

감정처럼 스크래치가 잘 나는 것도 없다. 사람들 사이에서 좋은 소문은 걸어가고 나쁜 소문은 날아간다. 그래서 몸이 아플 때보다 마음이 아플 때가 많다. 서로 어울려 따뜻한 말 한 마디, 진심이 담긴 말 한 마디를 나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늘보다 높고 바다보다 넓은 게 마음이라지만, 이걸 다스리기가 쉽지 않다. 대개는 천장보다 낮고 쥐구멍보다 좁은 게 사람의 마음이다. 우리는 모두 같은 병을 앓고 있다.

멀리서보면 잔잔해 보이는 바다도 가까이서 보면 파도가 크게 친다. 사업도 경기가 항상 좋을 수 없듯이 사람관계도 항상 좋을 수 없다. 크리스천의 최종 목표는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일이지만 그 일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지 않는다. 하나님의 일은 거대한 프로세스이며 사람을 통해 이뤄지기에 어디서든 변수가 생길 수 있다. 사람 사는 곳은 문제가 있기 마련이지만 또 문제가 있으면 반드시 답도 있기 마련이다.

“타인의 감정과 생각을 이해한다는 것은 인간을 이해한다는 것이다. ... 내가 아닌 ‘남의 가슴과 머릿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 능력이기 때문이다.”

도정일 교수의 지적은 선명하다. 사람을 잡으려면 마음을 잡아야 한다. 탁월한 방송 진행자나 리더들은 상대의 감정을 잡아내는 능력이 뛰어나다. 존 코터(John Kotter) 하버드 경영대학원 교수와 댄 코헨(Dan Cohen) 딜로이트 컨설팅사의 부사장이 함께 쓴 책이 있다. <기업이 원하는 변화의 기술>(The Heart of Change)이다. 두 저자는 이 책에서 변화의 핵심을 기술이나 조직이 아니라 감정이라고 지적한다.

“행동 변화는 사람들에게 분석 결과를 보여줘 그들의 생각에 영향을 주는 것이 아니라, 진실을 보게 해서 감정에 영향을 끼칠 때 더 잘 일어난다. 물론 생각과 감정은 모두 중요하고, 성공한 조직엔 둘 다 나타나지만, 변화의 핵심은 감정에 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나와 타인이 똑같은 세상을 함께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저마다 고유한 모습으로 창조하셨지만 부부, 가족, 교회, 사회란 공동체를 만드셨다. 유대인들은 어려운 시기를 밥심으로 넘겼다. 주중엔 좀 빠듯하게 산다. 대신 주말엔 풍성한 식탁을 차렸다. 음식을 나누며 서로를 격려하고 힘을 얻었던 것이다. 밥심을 생각하며 톨스토이가 쓴 단편 <세 가지 질문>에 나오는 고백을 들어보자.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때는 바로 지금 이 순간이고, 가장 중요한 사람은 지금 함께 있는 사람이고, 가장 중요한 일은 지금 내 곁에 있는 사람을 위해 좋은 일을 하는 것.”
고생을 함께 하면 마음의 벽들이 허물어진다. 서로가 가족이고 한 팀임을 깨닫는다. 이기든 지든 함께 한다. 모두가 함께 이기는 법을 배우게 되면 이것이 진짜 성공이다. 혼자 거두는 승리보다 훨씬 기쁘다. 진정한 성공이란 혼자가 아닌 함께 결승선을 통과하는 것이다. 성공은 나눌 때 가장 달콤하다.

무엇이 리더를 만드는가

다윗왕은 누구보다 전쟁을 많이 치른 왕이다. 그는 손에 피를 많이 묻힌 탓에 성전을 세우는 일은 아들에게 넘기게 된다. 사무엘상 30장에 보면 그가 아말렉과 전쟁을 할 때 한 무리가 피를 흘리기 싫어서 후방에 남겨진 짐을 지키겠다고 한다. 그들의 뻔한 속셈을 알면서도 허락한다. 다윗은 승리 후 그들에게도 전리품을 똑같이 나눠 줬다. 다윗은 “그들도 단지 서서 기다렸지만 그들도 봉사하였다”라고 말했다. 그것이 배려이다.

리더는 책임을 지는 자리지만 동시에 경청하는 자리이다. 두 귀를 준 이유는 뭘까? 두 배로 듣지만 공평하게 들으라고 주셨을 것이다. 하늘과 사람의 마음에서 오는 소리를 들어야 한다. 귀를 기울이면 혼탁해진 사회 안에도 여전히 아름답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린다. 그들 중 어떤 이들은 혼밥 혼술이란 나홀로 문화에 젖어 있다. 리더가 귀를 기울여야 그들을 찾을 수 있다.

경청엔 유익이 많다. 잘 들으면 상대방의 마음을 치유하고 신뢰도 생긴다. 지혜로운 사람은 들을 줄 안다. 솔로몬이 젊은 나이에 왕이 되었을 때 하나님이 그에게 소원을 물으셨다. 그때 솔로몬은 “지혜로운 마음을 주옵소서”라고 구한다. 그 지혜로운 마음이란 “듣는 마음”을 가리키는 문학적 표현이다. 우린 잘 들어야 한다. 잘 듣는 것은 상대방에게 가장 효과적으로 나를 표현하는 방법이다. 나를 아는 것은 중요하다. 나를 아는 것은 모두를 아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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