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의 멸망과 북한의 미래
고구려의 멸망과 북한의 미래
  • 이주천 자유민주학회 회장· 미래한국 10기 편집위원
  • 승인 2018.06.14 11:56
  • 댓글 2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역사비평]

소위 ‘북조선인민민주주의공화국’이 창설된 지 어언 70년이 되었다. 소련소비에트연방공화국이 74년만에 붕괴된 점으로 미뤄 보면 북한의 수명도 한계점에 다다른 느낌이 든다.

미국관계도 극도로 악화된 상태에서 트럼프는 한반도 인근에 전략자산을 총집결해 언제든지 북한을 공격할 수 있도록 군사력을 확충했다. 김정은은 곤경에 처하고 말았고 북한의 장래는 더욱 불투명해졌다.

과연 북한은 어떻게 될 것인가? 북한의 미래에 대한 전망을 하기 위해서는 과거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다. 우리 역사에서 북한과 가장 대비될 수 있는 국가는 고구려이다. 즉 고구려 멸망의 원인을 추출해 보면 북한의 미래를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고구려의 운명을 닮은 북한

북한과 고구려는 시공간을 넘어 한반도 북방에 동일한 영역을 지배했고, 평양을 도읍(수도)으로 정한 점이나, 고구려가 아시아의 패자 수와 당나라에게 오랫동안 항쟁했으며, 북한은 6·25전쟁 이후 주적인 미국에게 무모한 핵실험과 장거리 미사일 발사로 결사항전 중인 점에서 유사한 점이 많다. 그렇다면 고구려의 멸망에서 북한의 미래에 대한 어떤 함의를 얻을 것인가?

고구려는 무려 700년의 역사를 자랑하며 한때 수와 당과 더불어 동북아의 패자로 군림했다. 고구려는 만주를 석권했으며 절정기 시절의 고구려 군세는 북경 근처에까지 이르렀다고 전한다. 요새 용어로는 G-2 국가였다. 그러기에 한국사에서 가장 안타까운 점이 바로 고구려의 멸망으로 우리 민족이 삼한 통일의 주도권이 신라에게 넘어갔으며, 그 이후 한국의 영역이 한반도내로 축소되어버리고 말았던 점에서 민족사의 일대 비극이 아닐 수 없다. 고구려는 언제부터 망조가 들기 시작했을까?

역사가들은 고구려 멸망기를 연개소문의 집권 이후로 보는 데 대체로 의견이 일치된다. 내적 원인으로 연개소문의 그 일가의 권력 독점과 독재적 권력 행사에 주목한다. 왜냐하면 이로부터 많은 정치·사회적 문제가 파생되었으며, 그것이 고구려 사회의 내부적 통합력을 현저하게 약화시켰기 때문이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역사가들은 대체로 고구려 멸망의 요인을 다섯 가지로 지적한다.  ① 연개소문의 집권 이후 독재정치로 귀족합의체 정치를 무너뜨리고 연씨 일가의 독재정치로 변질된 점 ② 경직된 대외정책으로 당과의 장기간 전쟁에서 국력이 피폐하게 된 점 ③ 불교를 탄압하고 도교를 장려함으로써 불교 고승들의 망명을 부추겼으며, 사회가 통합력을 상실하고 정신적으로 분열된 점 ④ 권력 계승이 제도화되지 못하고 세습되어 다른 귀족층의 불만을 산 점  ⑤ 마지막으로 형제간 골육상잔으로 권력 투쟁이 비화되어 멸망을 자초한 점 등이다.

642년 연개소문의 정변이 성공하게 된 이면에는 6세기 이래의 국내계 귀족세력과 신흥 평양계 귀족세력의 대립이 숨어 있었으며, 대당정책을 둘러싼 온건파와 강경파의 대립과 북진남수책(北進南守策)과 북수남진책(北守南進策)의 대립도 요인으로 작용했다. 결국 연개소문은 평양계 귀족세력과 대당 강경파의 지원으로 정변에 성공할 수 있었다.

642년 영류왕과 반대파 귀족 100여 명을 주살하는 유혈정변을 단행한 연개소문은 막리지에 취임한 후부터 국정을 마음대로 하는 등 독재권력을 행사했다. 부(父) 태조가 죽은 후 연개소문은 유력 귀족들의 강한 견제를 극복하고 겨우 동부(東部) 혹은 서부(西部) 대인(大人)의 지위를 세습(承襲)할 수 있었다.

이렇게 그가 부직(父職)을 승습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던 것은, 연씨 가문이 상대적으로 뒤늦게 진출한 신흥귀족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영류왕대에 이르러서는 그 세력이 강대해져 여타 귀족으로부터 집중적인 견제를 받았기 때문으로 해석되고 있다.

귀족세력들은 642년(영류왕 25) 초에 연개소문을 변방인 천리장성 축조의 감역(監役)으로 임명해 그의 세력기반과 격리시키려 했고, 나아가 국왕과 결탁해 암살을 모의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연개소문은 열병(閱兵)을 핑계로 부병(部兵)을 동원해 100여 명의 반대파 귀족들과 영류왕을 죽이고 보장왕을 옹립하는 유혈 정변을 단행했다. 그리고 자신은 막리지에 취임했다.

바로 그해에 김춘추는 평양성을 방문해 연개소문에서 신라와 연합, 백제를 치자는 동맹을 제안했다. 그러나 연개소문은 신라가 고구려 침공으로 빼앗은 땅을 돌려줄 것을 제안했고, 김춘추가 이를 거절하자 그를 토굴에 가뒀다. 그 이유는 그가 신라를 얕잡아 봤기 때문이다. 후일 신라가 배후에서 당의 군사에게 식량과 군대를 지원하는 중요한 역할을 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김춘추의 동맹 제안 거절이 고구려 멸망에 중요한 단서가 되는 독이 되었다.

연개소문의 유혈정변은 당에게 침공의 구실을 마련해 줬다. 당 태종의 고구려 토벌 출정 명분은 임금을 시해하고 권력을 장악한 불충한 자를 응징하겠다는 것이었다. 연개소문은 당 태종의 친정(親征)을 기다리지 않고 영주(營州)를 기습 공격함으로써 전쟁의 단초를 열었다. 여기에는 대규모 총력전을 매개로 국내외 정세를 긴박하게 이끌어 가면서 짧은 시간에 권력 기반을 다지기 위한 목적이 있었으리라 판단된다.

644년부터 645년까지 당 태종은 요동을 원정했으나, 안시성에서 성주 양만춘에게 패하고 퇴각했다. 대막리지 직에 취임한 연개소문은 645년의 대당전쟁을 총지휘하는 최고의 군령권자로 활약했다. 더구나 전쟁이 고구려의 승리로 귀결되었으므로, 대막리지 연개소문의 권위는 크게 고양되었고, 권력도 더 강화되었다.

이로써 연개소문은 권력을 독점하고 국정을 전제할 수 있는 연개소문 일인의 독재시대가 열렸다. 그러나 당과의 전쟁에서의 승리는 연개소문을 더 교만하게 만들었으며 연개소문 일가에 의한 정치의 독점과 전횡이 이뤄졌다.  또한 장기간에 걸친 당과의 전쟁으로 국력이 피폐하게 되었다.

체제 유지에 실패한 연개소문

연개소문은 정권을 장악한 이후, 불교를 탄압하고 도교를 장려했다. [보장왕 2년(643)] 3월 연개소문이 왕에게 아뢰기를, “삼교(三敎)는 비유하자면 솥의 발과 같아서 하나라도 없어서는 안 됩니다. 지금 유교와 불교는 모두 흥하는데 도교는 아직 성하지 않으니, 이른바 천하의 도술(道術)을 갖추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엎드려 청하오니 당(唐)나라에 사신을 보내 도교를 구하여 와서 나라 사람들을 가르치게 하소서”라고 하였다.

대왕이 매우 그러하다고 여기고 표(表)를 올려서 (도교를) 요청하였다. 태종(太宗)이 도사(道士) 숙달(叔達) 등 8명을 보내고, 이와 함께 노자(老子)의 <도덕경(道德經)>을 보내줬다. 왕이 기뻐해 불교 사찰을 빼앗아 이들을 머물도록 했다.

연개소문이 도교를 장려한 이유는 첫째, 영류왕을 비롯한 집권 귀족들의 비호를 받던 불교사원 세력을 꺾으려는 데 있었다. 둘째, 도교가 불교나 유교처럼 심한 허례의식을 일삼는 종교가 아니었으므로 중하층 일반 백성들로부터 쉽게 지지를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연개소문의 불교 탄압으로 인해 사회적 통합력을 상실하고 불교 고승들이 대거 백제와 신라로 망명했다.

집권 말기 연로한 연개소문의 고민은 갈수록 깊어졌다. 장자 연남생, 차자로 연남건과 연남산이 있었는데 장자인 남생과 동생들 남건과 남산 간에는 관계가 매우 나빴다. 배다른 형제간으로 추정된다. 병석의 연개소문은 사망을 앞두고 세 아들에게 화살더미를 가져오게 했다. 연개소문은 아들들에게 “화살 한 개는 쉽게 분질러지지만 화살뭉치는 분지르기 어려우니 형제간의 화목과 단결하라”고 호소하고 숨을 거뒀다.

장자 연남생은 성격이 급하고 경솔한 점이 치명적 단점으로 보이는데, 대막리지의 역할을 수행하기에는 능력이 부족했다. 연남생의 구체적인 활동을 처음으로 확인할 수 있는 사건이 661년 9월 압록수 전투이다. 이때 연남생은 정예병 수만 명을 거느리고 압록수를 지키고 있었으나 글필하력이 이끄는 당군에 무너져 3만 명이 넘는 고구려군이 목숨을 잃었다.

그는 결전을 속행하여 원정군의 의도대로 함정에 빠져서 패전을 자초하였다. 책임자인 연남생은 겨우 몸을 피하였다. 반면, 연개소문은 662년 2월 사수(蛇水) 전투에서 당군을 격퇴하였다. 661년은 남생이 막리지에 임명된 해로 압록수 전투 패배에 따른 책임론이 제기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는 연남생의 지도력에 대한 의문을 품고 귀족들의 반발을 사기에 충분하였다.

또한 665년 평양성에서 연남건과 연남산이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잡았을 때, 당에 투항하였으며 심지어 당군을 길 안내하는 향도(嚮導) 역할을 충실히 한 것으로 볼 때, 더 그런 점이 두드러진다. 연개소문의 아들들이 권력을 승계했지만 그들의 국가 운영 능력은 미지수였으며 그의 아들들  사이에 갈등이 터지자 그것을 수습할 제도적인 장치가 전혀 작동하지 못했다.

집권과 함께 연남생이 당면한 과제는 안으로 민심을 수습하고 전쟁 피해를 복구하는 것이며 밖으로는 대당관계를 수립하는 것이었다. 이런 가운데 665년 10월 고구려 태자 복남(福男)이 당나라에 입조했다. 밖으로 대당유화정책을 펴는 가운데 연남생은 민심의 동향을 살펴보고 국정을 운영할 기반을 다지기 위해 동생들에게 평양을 맡긴 채 전국을 순행했다.

그런데 순행 도중 주변의 이간질로 인해 형제간 다툼이 발생했다. 이 과정에서 연남건은 정권을 찬탈했고, 연남생은 국내성을 기반으로 군사를 일으켰으나 여의치 못하여 당에 투항했다. 연남생의 당 투항이 미친 여파는 컸다. 고구려 최고집권자의 망명은 주변의 이탈을 가속화시켰다. 연남생의 숙부인 연개소문의 동생 연정토(淵淨土)가 신라로 투항하는 등 고구려는 안으로부터 무너지고 있었다.

결국 당군이 한 달여에 걸쳐 평양성을 포위하자 보장왕은 연남산을 시켜 이적에게 항복했다. 하지만 연남건은 성문을 닫고 군사를 내서 저항했다. 그런 가운데 연남건 진영의 군사를 맡아보던 승려 신성(信誠) 등이 연남생과 내통하여 당군을 맞아들이면서 평양성은 함락되고 말았다. 연남건은 보장왕과 함께 포로로 잡혔다.

북한 김정은 정권에서 보이는 고구려 말기의 증후

고구려의 말기처럼, 북한의 김정은 정권은 그야말로 북조선노동당에 의한 ①일당독재정치 ②경직된 대외정책과 폐쇄된 사회 ③기독교를 위시한 종교 탄압 ④대에 걸친 권력의 세습 ⑤혈육상쟁의 비극 등의 특징을 지니고 있기에 고구려 말기의 증상과 유사한 증후군을 보여준다.

1947년 북조선인민위원장이던 김일성은 스탈린으로부터 개인숭배와 독재정치를 배웠다. 스탈린은 무자비한 탄압이 프롤레타리아 영구 투쟁의 일부라며 학살을 정당화했을 뿐만 아니라 공산주의의 원리에 벗어난 개인숭배를 조장하고 위성국가들에 공개재판을 전파했다.

이를 모방한 김일성은 우상화에 걸림돌이 되는 정적들을 무자비하게 숙청했다. 김일성은 1950년대는 남한에서 공산주의 운동을 한 남로당계와 중국에서 공산주의 운동을 한 연안파를 숙청하고, 1960년대는 함께 항일무장투쟁을 한 갑산파를 제거해 1인 독재체제를 완성했다.

고구려의 연개소문이 집권 초기 지방세력의 반발이 강하자 대당강경책을 고수하고 대당도발을 하면서까지 내부 결속을 강화했듯이, 북한 정권은 반미와 반일을 구호로 내세워 주민들에게 주기적으로 대외 적개심을 고취시키면서 경직된 대외정책을 추구해 권력의 누수현상을 막으려고 몸부림치고 있다. 북한 정권은 미국과 무려 70년 동안 줄기차게 항쟁해 왔으며 자본주의가 스며들지 못하도록 문호를 폐쇄했다.

김일성이 가장 두려워하는 종교는 기독교로서 철저하게 탄압했다. 주민들이 기독교를 신봉하게 된다면 김일성 자신에 대한 충성심보다는 하나님을 더 섬기게 될 것은 뻔하다. 심지어 성경을 소지한 것만으로도 교화수용소에 보내졌다. 김일성은 자신의 사후, 반란을 두려워해 자신의 권력을 세습시키는 조치를 단행했다.

김정일-김정은에게 권력이 세습되면서 2600만 북한 주민들은 자유를 박탈당한 채 거의 노예와 같은 생활을 영위하고 있다. 이리하여 김일성가계, 즉 김일성가의 혈통이 아니면 출세할 수 없게 되었다. 이는 정통 맑시즘과 레닌주의에서도 철저히 금기시한 봉건왕조에서나 볼 수 있는 전근대적 정치 행태이다.

마지막으로 3대째 세습독재자 김정은은 후견인 장성택을 기관총으로 무자비하게 사살하고 이복형 김정남을 말레이시아 공항에서 독극물을 통해 암살시키는 골육상쟁의 만행을 저질렀다. 2인자를 없애고 후계자 구도에서 아예 후환의 싹을 자른 것이다. 그렇다면 고구려의 멸망에서 봤듯이, 북한 김정은 정권의 미래는 매우 비관적이며, 북한 정권의 붕괴는 언제, 어떻게 라는 시간과 방법상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미래가 보이지 않는 북한 정권의 김정은과 문재인 대통령이 또 한번 언론과 국민에게 알리지 않고 5월말 주말에 판문점에서 다정하게 만나는 ‘깜짝쇼’가 일어났다. 한미동맹을 귀중하게 생각하지 않고 망해가는 북한, 망할 수밖에 없는 북한과 손을 잡고 어쩌겠다는 것인가? 지도자가 냉엄한 역사적 교훈을 망각할 채 지불할 대가는 끔찍할 것이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처한 냉엄한 현실이다.

이주천  자유민주학회 회장 · 역사학

본 기사는 시사주간지 <미래한국>의 고유 콘텐츠입니다.
외부게재시 개인은 출처와 링크를 밝혀주시고, 언론사는 전문게재의 경우 본사와 협의 바랍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2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박혜연 2018-06-14 12:09:59
물론 북한의 실상과 허상에 대한 기사는 써야된다~!!!! 하지만 당신들이 싫어하는 좌파세력들도 일부는 북의 실상과 허상에 대해 다 알고있으니 제발 종북몰이 그만해라~!!!!

박혜연 2018-06-14 12:05:19
이제 미래한국은 보수언론이되 정치색이 일체없는 경제문화적인 논조를 보이는 언론사로 변신하고 종북몰이 과거기사들 당장 지워라~!!! 애국을 자처하신 보수분들 6.13지방선거를 이후로 완전 참패한거 알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