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의 비타협주의가 낳은 빛과 그림자
이승만의 비타협주의가 낳은 빛과 그림자
  • 손세일 전 국회의원
  • 승인 2018.06.15 11: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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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70주년 기획-이승만을 말한다] 릴레이 인터뷰 손세일 전 국회의원

- 이승만 대통령에 대해 먼저 어떤 생각이 떠오르시나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가장 인상 깊은 것은 1942년 3월 처음으로 단파방송을 통해서 이 박사가 직접 국내 동포들에게 메시지를 전하면서 게릴라전을 하고 사보타주를 하라고 선동하는 아주 강력한 방송을 하신 일입니다. 예순 일곱인가 때인데도 아주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감동적으로 해서 국내에 큰 영향을 미쳤는데 그 방송 생각이 자꾸 납니다.

- 우리 5천년 한민족 역사에서 이승만 대통령만이 할 수 있었던 가장 큰 기여는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한마디로 공화주의(共和主義)를 바탕으로 한 근대적 국민국가를 만드셨다, 건설하셨다, 라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물론 국민국가에 대한 정의도 여러 가지 있지만, 또 다른 방법에 의해서 건설하자는 안도 많았지만, 이 박사의 리더십이 아니고서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 많은 노력을 했는데 이 박사의 지도력이 아니고서는 어려웠으리라 생각합니다.

좋은 한 가지 예가, 자신의 전기를 쓰는 미국인 올리버 박사에게 “당신은 내가 상황이 아니라 신념에 의해서 지배되는 사람이라는 것을 모르고는 나를 제대로 그릴 수 없을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말하자면 신념의 지도자였습니다. 신념이라는 것은 지도자에 따라서 어떤 신념이 특별히 강할 수 있지만 이 박사처럼 객관적인 정보와 학습과 지식에 바탕을 둔 신념이야말로 정치가로서의 지도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합니다. 그 신념에서 특별히 투철한 형안(炯眼)과 지식과 용기를 가지고 활동한 지도자입니다.
 

정의와 불의를 구별했던 이승만

- 이승만 대통령의 애국애족 점수는 100점 만점에서 몇 점을 드릴 수 있습니까?

한마디로 이 박사의 애국은 자기 나라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느냐 하는 것으로 나타낼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다른 외세에 대한 저항의 강도도 있을 것이고, 또 다른 능력도 평가될 수 있습니다. 우선 자기 소명과 임무와 관련해서 중요한 것은 우리나라는 어떤 나라라고 하는 확신, 아까 말한 신념에 의해서 갖는 내용이 있어야 하는데, 이 박사는 “한국은 아시아에서의 전략의 심장이다”라고 말씀했습니다. 그것은 미국의 생각과는 다른 것이고 또 당연히 공산주의 국가들과도 달랐어요.

그런데 그 미국과 달랐던 것 때문에 미국과도 싸움을 많이 했고, 또 그렇게 해서 결국은 자기가 생각하는 대로 이끌었습니다. 그런 비전과 욕심과 용기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다른 애국자들과 다르고 그런 인식이 있어 그렇지 못한 많은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항상 전투적이었습니다.

이 박사가 아주 독실한 크리스천인데 성경 중에서도 제일 좋아한 성경 구절이 요한복음 10장 34절인데, ‘내가 이 땅에 화평을 주러 온 것으로 알지 마라, 검(劍)을 주러, 칼을 주러 왔노라’는 대목을 매일 외웠다는 거예요. 그만큼 정의와 불의를 구별해서 정의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늘 강조했습니다.

- 일부 사학자는 1919년 4월 13일 상해 임시정부의 시작이 대한민국이 시작된 건국일이라고 주장하고 정부는 1948년 8월 15일을 건국일로 정하거나 기념하지 않고 있습니다. 건국일은 마땅히 국가명절인 ‘건국절’로 제정해서 기념해야 되는데도 국가가 이를 시행하지 않고 있는 것에 대해 한 말씀해 주십시오.

참 안타깝고 시정되어야 하는 일이지요. 그런데 1948년의 제헌국회에서 만들어 공포한 헌법의 전문에서 ‘3.1운동에 의해 대한민국을 건립하여 세계에 선포한 독립정신을 계승하여 대한민국을 재건한다’고 했어요.

그 논리만 보면 그 학자들의 말이 맞을 수도 있어요. 그러나 실제로는 그 임시정부 자체가 1941년 11월 앞으로 전쟁이 끝나고 본국에 들어가서 정부를 수립하는 그런 건국을 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하면서 발표한 ‘건국강령’이 있습니다.

이것이 임시정부의 건국의 지침이었는데, 그 건국강령에 의하면, 임시정부의 활동을 복구의 단계와 건국의 단계로 나누면서, 먼저 나라를 찾고, 그런 다음 본국에 들어가서 건국을 한다, 이렇게 구별하여 규정을 하면서 임시정부의 활동은 복구의 단계이고, 국내에 들어가서 정부를 수립하게 되는 것이 건국의 단계라고 규정해 놓고 있어요.

국내에 들어가 제대로 된 정부를 수립할 때가 건국이라고 임시정부 자체가 선언했어요. 또 전쟁이 끝나고 1945년 9월 3일 김구 주석의 명의로 발표한 14개 항의 당면 과제가 있는데, 그 과제를 보면 “지금은 건국의 길로 들어가는 과정에 있다”고 하면서 “임시정부는 본국에 들어가서 각계각층의 사회단체나 지방 유지나 민주원로나 종교단체 등의 대표들을 모아서 과도정부를 만들어 그 과도정부로 하여금 보통선거에 의한 정부 수립을 하도록 한다. 그리고 임시정부의 임무는 과도정부를 수립해서 그 과도정부가 기능을 하는 단계까지다.” 이렇게 명백하게 선언을 했었어요.

이런 것을 고려할 때 1919년 임시정부가 수립된 것이 바로 토지, 즉 국토와 주민을 가진 우리 대한민국의 정부가 수립되었다고 말하기는 어렵지 않은가 저는 개인적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건국에 대해 많은 논란이 있는 상황을 고려해서 좀 타협할 점은 없을까? 예컨대, 건국일을 독립기념일이라 하고 초대대통령을 건국대통령이라고 하는 것은 좋지만, 건국기념일을 명절로 정하는 문제와 같은 것에 대해서는 타협의 여지가 없을까? 학자 등과 토론을 해보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 손 의원님은 10여 년이 넘는 긴 세월을 이승만 대통령에 대해 연구를 하고 책도 출간했는데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연구를 한 계기와 연구 과정을 통해 접한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소회의 말씀을 듣고 싶습니다.

제가 6·25를 겪은 것은 고등학생 때였습니다. 대학에 가서 정치학을 공부하면서는 이른바 전쟁의 아픔, 분단의 아픔을 느끼면서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연구해 봐야겠다는 문제 의식에서 임시정부에 대한 공부를 먼저 했습니다.

그 후 3·1운동 60주년이 되는 1969년 동아일보사에서 3·1운동 60주년 기념논문집을 냈습니다. 그때 임시정부에서의 헌법 개정 과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추적해 논문을 써서 거기에 발표했습니다. 그것도 부족한 점이 많습니다만, 아직도 각계로부터 임시정부 연구의 최초의 업적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그것이 69년의 논문집에 수록되고 나서 그 이듬해인 70년  <이승만과 김구>라는 책을 냈는데 그 논문을 보완하고 확대하고 살을 좀 붙여 책을 냈습니다.

6·25 때 한국에 와서 8군사령관을 했던 밴플리트 장군이 이승만 대통령을 보고 이런 말을 했다고 해요. ‘이승만 대통령은 자기 몸무게만한 다이아몬드 덩어리다.’ 그분의 말이 명언(名言)이 되었습니다만, 그분이 그렇게 위대한 인물이라는 것을 사람들이 깨달았던 거지요. 그렇다면 이 박사의 다이아몬드를 분석하면 어떤 빛이 나올까요? 물론 첫째는 민주주의, 두 번째는 반일주의 또는 반일사상, 세 번째는 반공주의라는 빛이 나와요. 그리고 그것을 총괄하는 것이 기독교정신이다, 라고 저는 생각해요.

이 네 가지로 이뤄진 어마어마한 크기의 다이아몬드 덩어리가 바로 이 박사라고 부연 설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승만 대통령의 경우 가령 공산주의에 대한 태도를 다른 어떤 국내정책이란 관점에서 말할 수는 없어요. 그리고 세계적으로 미국하고도 공산주의에 대한 인식이 달랐어요.

미국은 빨리 전쟁을 끝내고 소련과 협조를 하면서 세계 평화를 유지하고, 경제적으로만 세계 전체를 리드하는 것으로 만족하려는 정책이었는데, 이 박사는 그런 정책이 잘못되었다고 했어요. 많은 미국인이 가지고 있는 중립주의나 고립주의적 태도를 제외하고도 이 박사는 2차 세계대전을 요컨대 아마겟돈, 즉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선과 악의 마지막 결전의 장(場)이라고 비유를 하면서, 그때는 연합국으로서 미국과 같이 협조하고 있는 소련을  일본과 마찬가지로 전체주의라는 카테고리에 넣어 미국의 동맹국인 나라까지도 비판했던 아주 철저한 반공주의자였습니다.

그 뒤 대한민국을 건국할 때나 6·25 때, 그리고 그 뒤 세계의 남북관계에 있어서도 철저하게 반공주의를 견지하고 그에 따른 정책을 과감하게 펼침으로써 오늘날 이 대한민국이 만들어지고 성장하고 발전할 수 있게 된 것 아닌가 확신하고 있습니다.

- 이승만 대통령의 말년인 1960년 4월 19일 학생운동이 일어나 180여 명이 사망하고 수천 명이 부상 당했습니다. 그때 이승만 대통령은 자유당 총재로서 부정선거에 대한 책임을 지고 하야했는데 그 일에 대해 한 말씀해 주시죠.

물론 이승만 대통령도 인간인 이상 다른 욕심도, 좋은 의미에서 욕심도 있고 사명감도 있었겠지만, 우선 그런 큰 부정선거가 이뤄졌다는 것을 몰랐다는 것 자체가 정치인으로서 책임이 있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이 대통령 자신이 모델로 생각했던 미국의 정치 관행을 봐도, 조지 워싱턴이 선거에 당선됐음에도 불구하고 사양하고 재선으로 끝냈거든요.

그리고 올리버 박사도 그랬습니다. 이 박사가 은퇴하는 적절한 시기가 언제였겠느냐고 물었더니 올리버 박사의 말이 그것은 역시 56년이었다고, 말하자면 3선 개헌을 하지 않고 3대 대통령에 취임하지 않고 은퇴하는 것이 이상적이었다는 대답한 것을 봤습니다.

물론 저 역시 원칙적으로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다만 선의로 해석하자면, 이 대통령이 하와이에서 마지막으로 한 기도가 ‘하나님 아버지, 맡기신 소명을 이제 육체가 다해서 다 못하겠습니다. 우리 백성들, 국민들을 축복해 주십시오’라고 했다고 합니다.

이는 남북통일에 대한 그분의 소명 의식이 남달리 강해서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원칙의 문제에서 조금도 양보하지 않는 고집과 투쟁적 성격 때문에, 소명 의식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바람에 여러 가지 오판을 하게 된 것이 아닌가, 저는 그렇게 생각하고 안타깝게 여깁니다.


대한민국사랑회 <이승만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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