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순간, 인생을 읽다
죽음의 순간, 인생을 읽다
  • 박주연 미래한국 기자
  • 승인 2018.06.26 12:35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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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장례문화의 산 증인 '삼립산업 대표 오병용'
4천여 시신 염습, 베푼만큼 누리는 93세 봉사의 달인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이른 여름 아침 서울 중구 장교빌딩에 위치한 삼립산업 사무실에 들어서자마자 중역으로 보이는 말끔한 신사와 마주쳤다. “오병용 회장님 인터뷰를 하러 왔는데요, 계신가요?” “제가 오병용입니다.” 아흔셋이라는 나이가 믿기지 않는 건강한 혈색의 기업인이자 소망교회 장로이며 교회 경조부장으로 4천여 구의 시신을 염습했다는 그와의 인터뷰는 그렇게 시작됐다.

- 시신 염을 한다는 게 쉽지 않은 일일 텐데요, 시신 염습이란 특별한 봉사를 하게 된 계기가 있으신가요?

사람들이 꺼리는 천한 일을 하게 된 것은 내 어머니 때문입니다. 내 나이 아홉 살 되던 해에 남편을 잃고 홀로 우리 형제들을 키워 오셨는데, 월남한 이후로도 고생만 하다가 세상을 떠나셨어요. 그때가 89세 일 땐데, 어느 날인가 아침에 어머니가 그러시는 거예요. “혜자가 오면 같이 먹을 테니 먼저들 먹거라” 혜자는 고등학교 다니던 큰 딸인데 그날 학교에서 시험보고 일찍 집에 온다고 해 어머니가 기다린다고 그런 거지.

그래서 먼저 밥 먹고 나서 남대문 시장에 도착할 즈음에 집에서 전화가 온 거예요. 어머니가 이상하다고 빨리 돌아오라고. 어머니가 밥을 잡수시다 뇌일혈로 가셨어요. 어머니가 들고 있던 숟가락을 내가 손에서 뺐어요. 그때는 장례에 대해 잘 몰랐고, 꿈에도 생각 못한 어머니 죽음으로 당황하고 허둥대던 차에 교회의 선배 장로님과 권사님들이 오셔서 장례를 해주셨지요.

그분들은 찬송과 기도로 어머니의 평온한 임종을 축복했고, 시신을 깨끗이 씻기고 단장해 장례를 치러 줬어요. 그런 모습을 지켜보면서 참 형언할 수 없는 감동을 받았지요. 그분들의 넉넉한 인정, 조건 없는 헌신에 신선한 충격을 받았고, 앞으로 몇 백 배라도 사회에 되갚아야겠다고 결심하게 됐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은혜가 아닐 수 없었어요. 그렇게 신세 갚은 심정으로 시작한 이 일이 평생의 직분이 된 것이지요.

- 그렇게 염을 시작하게 되셨군요. 과거와 지금 장례 모습도 많이 변했지요?

지금은 장례식장이 각 병원에 있잖아요? 지금으로부터 한 40년쯤 전이니까… 그때만 해도 장례식장이란 게 없었어요. 가정에서 다 했지. 사람이 앓다가 임종하면 집에서 장례를 치르는데, 장의사가 관리를 해줬지요. 그땐 소고기 파는 푸줏간 사람이나 장의사 이런 사람들은 상놈 취급을 받아서 그런 집엔 딸 시집도 안 보내려고 할 때였어요.

이런 시대에 교인들이 세상을 뜨는데 장례를 어떻게 치러야 하는지 몰라 속수무책이니 내가 교회 직분을 맡아 사명을 받았으니 발 벗고 나서서 성도들 마지막 가는 길을 도와야겠다는 생각을 한 거예요. 내게 연락이 오면 달려가서 사경을 헤매는 사람이 있으면 쫓아가 기도하며 임종을 지키고, 이미 운명한 사람은 달려가 뒷수습을 맡았어요.

어제까지도 얼굴을 마주 대하던 이가 내일, 아니 잠시 후에 영원히 볼 수 없는 곳으로 간다고 생각하면 비장한 감정이 들어요. 모쪼록 먼 길 떠나는 이의 마지막을 단단히 챙겨줘야 되겠다는 생각이 머리와 가슴을 꽉 메우는 것이지요.
 

삼립산업 대표 오병용
삼립산업 대표 오병용


- 장례 절차를 위해 늘 준비돼 있으시겠어요.

자동차 트렁크에 칠성판(시신을 눕히는 30센티미터쯤 되는 널빤지)과 염습에 필요한 솜이나 알코올 같은 도구들이 있어요. 또 세상을 떠났다는 걸 알리는 초롱도 있지요. 초롱을 달아 놓으면 사람들이 ‘저 집에서 초상이 났구나’ 알고 찾아오지요. 그런 것 잘 모르죠? 그런 게 장례 문화야.

그렇게 내 손으로 입관시켜 저 세상으로 보낸 시신이 4천여 구 좀 안 돼요. 그렇게 여러 해를 해오면서 고인의 이름, 연령, 성별, 병사 원인 등 일일이 기록도 해놨어요. 그럼 그게 통계가 되는 거예요. ‘금년 초봄에는 유아(幼兒)가 많이 죽었구나’ 여름 지나 가을 접어들면 ‘노인들이 세상을 많이 떠났구나’ 하고 알게 됩니다. 무슨 병으로 저 세상으로 갔는지도 통계가 나오지. ‘아, 간암으로 죽은 사람이 많구나’, 또 ‘위장암으로 죽은 이도 많구나’ 하고 그런 병명 통계도 낼 수가 있어요.


교회 화장 문화 정착에 기여

- 귀중한 통계자료가 되겠네요. 40여년 염을 하셨으니 장례문화의 산 증인이기도 하시고요.

예전엔 화장이란 게 없어요. 전부 매장이야. 매장하니까 산에 공동묘지만 가득하잖아요. 그러다보니 정부에서도 우리 장례문화를 개선해야겠다는 생각을 한 거예요. 근데 어떻게 해야 할지 방향을 알 수가 없었던 게지. 그때가 아마 고건 씨가 국무총리 할 때였을 거예요. 노무현 대통령이 서거하고 고건 씨가 국무총리 할 때 정부에서 장례문화 개선 문제로 내게 연락이 왔어요.

소망교회 오병용 장로가 염습을 제일 많이 했다고 장의사협회에서 날 추천한 거예요. 고건 총리가 ‘앞으로 장례를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 물었고 논의를 하다가 화장하자는 결론을 냈어요. 내가 우리 교회부터 화장 문화를 실천하겠다고 했지. 곤지암에 가면 우리 교회 수양관이 있어요. 소망교회 성도의 묘라고 해서 크게 비석이 있지요. 그런 식으로 장례 문화가 개선돼 왔고, 그게 역사지요.

- 처음 염을 할 때 무섭지 않으셨어요?

그게 무서우면 염을 하겠어요? 특별한 봉사이지요. 지금은 병원에 냉동실이 있으니까 괜찮은데, 예전에 할 때 한 여름에는 곤욕이에요. 예를 들어 간암으로 죽은 사람 몸에서 썩은 물이 코와 입, 항문에서 다 흘러내립니다. 그 더운 때 축우(송장 썩은 물)가 줄줄 흐른다고. 냄새가 아주 고약해요. 그걸 어떻게 처리할 수가 없어 애를 먹어요.

어떻게 처리할까 연구도 했어요. 심지어 큰 얼음집에 가서 얼음을 사다 관 주변에 놓은 적도 있고, 또 얼음을 운반하기 힘드니 머릴 써요. 비닐을 관에다 깔고 사람을 넣고 뚜껑 닫아요. 그렇게 하면 화장터 갈 때는 좋지만, 매장할 땐 또 관 뚜껑 열고 시신 꺼내서 비닐을 제거해야 돼요.

땅에 그대로 넣으면 시신이 안 썩는다고. 잘 모르는 사람은 그냥 덮어놓고 파묻는데, 양심이 있어야지, 난 꼭 관을  떼서 시신을 내놓은 뒤에 비닐 제거하고 다시 관에 넣어서 매장해주고 했어요. 그리고 향로에 향을 피우는 건 냄새 안 나도록 뿌리는 것이지 예의로 하는 게 아닙니다.

살아 있을 때 삶이 고인 얼굴을 만든다

- 4천여 구 가깝게 염을 하셨으니, 특별히 기억에 남는 경우도 있으실 것 같아요.

아주 많지. 한 번은 여고생 염을 해줬어요. 아주 예뻤지요. 근데 애 아버지가 해군 소장이야. 이 아버지가 밤낮으로 애한테 “내가 서울대 나왔으니 너도 서울대 안 가면 안 된다” 해서 아이가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던 모양이야.

입시에서 서울대 떨어지니까 스트레스 받아서 집에도 안 들어왔대요. 그렇게 시간이 흘러 사람들이 동네에 이상한 냄새가 난다고 수군거리기 시작했어요. 냄새를 따라 찾아보니 여학생이 옥상 물탱크 안에서 목을 맨 거야. 내가 직접 가서 줄을 풀어 안고 내려와 장례해줬어요. 그리고 한 며느리가 있었는데, 밤낮으로 교회에 가서 살다시피 하니까 시어머니가 그렇게 구박을 했대요.

한번은 시어머니가 며느리 다니는 교회에 와서 “우리 며느리는 밥이 나오는지 떡이 나오는지 살림은 안 하고 교회에서 산다”고 사람들한테 얘기하더라는 거야. 그렇게 며느리가 신앙생활 하는데 있어 자유롭지도 못하고 창피도 당했대요. 그러다 그 시어머니가 얼마 있다 세상을 떠났어요. 며느리가 교회 집사인데 “시어머니가 제가 교회 다닌다고 그렇게 핍박을 했는데, 그래도 교회에서 장례를 해줄 수 있나요?”

그러더라고. 안 해준다고 할 수 있어요? 해줘야지요. 예수를 잘 믿는 사람들은 운명을 다해도 얼굴이 좋아요. 근데 며느리 학대한 시어머니 장례해주면서 얼굴을 보니 찌그러지고 마치 누군가로부터 쫓기는 듯한 표정이더라고. 내가 표현은 못해도 속으로 ‘그렇게 며느리 학대하더니 천국에 못 갔구나’ 이런 생각이 듭디다. 감이 그렇게 온 거지.

세상을 뜰 때 사람들은 다 화장을 해요. 얼굴에 연지 찍고 눈썹도 그리고 분도 바르고 얼굴이 훤해져요. 남자들도 면도해주고 분도 발라. 그렇게 해서 상주들한테 “당신 어머니 천당에 갔습니다” “얼굴이 참 편해 보이지 않습니까” 하고 위로를 하는 거예요.

한번은 내가 염 해주고 얻어맞은 적도 있어요. 상주가 육군 소장이야. 그 집에서 입관하면서 피아노 위에 성경책이 놓여 있는데 상주가 “아버지가 갖고 다니던 성경책인데 함께 넣어주시오” 라고 말합디다. 상주가 술을 한잔 걸친 모양이야. 그래서  “거기 놔 둬봐야 땅 속에 들어가면 다 썩어 버리니 아버지가 쓰던 성경책 들고 선생님도 교회에 나오시면 좋지 않나요”라고 말했어요.

그러니까 그 사람이 “이놈의 자식이 하라는 대로 하면 되지” 하고 내 뺨을 때리더라고. 그 와중에 내가 왜 때리느냐고 맞대응 하겠어? 미안하다고 했지. 그러니까 부엌에서 일하던 교회 집사님이 “우리 장로님이 무역회사 사장인데 돈이 없어 이 일을 하는 줄 압니까” 그 양반한테 항의해서 내가 또 말렸어요. 장례식 다 끝나고 그 사람이 내게 사과하러 왔더라고. 나를 장의사 일꾼인줄 알았다는 거야. 그런 일도 있었습니다. 한 사십년 전 일이에요. 

- 한창 시신 염을 하면서 경험하셨던 때와 지금은 장례문화가 많이 달랐을 것 같아요.

1974년에 장로가 됐고, 그때부터 장례 일을 했는데 그동안 상당히 변한 걸 실감합니다. 아까 얘기했지만 1990년대 후반에서 2000년 초반에 매장문화에서 화장문화로 바뀐 것이지요. 전통적으로 옛 사람들은 ‘신체발부수지부모(身體髮膚受之父母)’라는 의식이 있었기 때문에 시신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을 훼손하는 걸 불경하게 생각했어요. 때문에 화장이 자리 잡는 데 시간이 걸렸지만 오늘날엔 화장이 매장보다 더 많아지게 됐지요. 또 시신 기증, 또는 장기 기증 문제도 달라졌어요.

옛날엔 신체 훼손은 부모에 죄를 짓는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활성화되지 못했지만 지금은 장기 기증자가 늘어나고 있잖아요. 내가 장례를 치러준 성도들 중에도 장기를 기증하셔서 시신을 염하지 않은 분들이 몇 분 있어요. 또 장례 비용도 천정부지로 올랐지요. 예전에 집에서 장례 치를 땐 관 값이 잘해야 20만 원, 수의가 15만 원 정도로 100만 원 정도면 장례를 치를 수 있었지만 지금은 1000만 원 이상 들어가니 힘들어요.

또 예전엔 집 문 밖에 경조(慶弔)라고 써 놓은 등을 걸어 놓았는데, 요즘은 보기 어렵지요. 대부분 장례가 병원에서 이뤄지기 때문이에요. 또 지금은 부의금을 사람에게 전달하거나 장례식장 옆에 놓여 있는 부의금 함에 넣지만 예전에는 영정 앞에 놨어요.

우리 교회 성도 초상이 나면 연락을 받고 달려가 내가 제일 먼저 한 게 장례식을 내 방식대로 따라달라는 거였어요. 대개는 상주들이 따르지요. 상주 허락을 받은 후에는 모든 장례의식을 기독교식으로 치릅니다.

문제는 시골에서 삼촌, 이모, 외삼촌 등 어르신들이 방문할 때인데, 기독교식으로 염을 할 때는 수의를 입히고 얼굴에 화장을 하는 정도에서 마무리 하는데, 시골 사람들은 꼭 망자 몸을 일곱 번 묶어 달라고 고집해요. 염을 하면서 몸을 묶는 이유는 시신을 땅에 묻으면 살이 썩으면서 뼈가 흩어져 유해 조각을 분실할 염려 때문인데, 요즘은 많은 사람들이 화장하고, 또 매장하더라도 유해를 잃을 염려가 적어 몸을 잘 묶지 않지요. 일곱 번 묶어 달라고 요청하는 사람들이 많아 직접 장의사에 가서 배워오기도 했습니다. 이런 경험들이 쌓이다 보니 이제 염하는 것뿐 아니라 장례에 관해선 전문가 못지않은 지식을 갖게 되었어요.

- 어렵지만 특별한 봉사라는 의미에서 보람이 크시겠어요.

그렇게 염을 해주다 보니 명절 같은 때엔 선물이 오기도 하는데, 절대 받으면 안 돼요. 어떤 사람은 구두표도 가져오고 심지어 양복표도 가져오는데, 그거 받으면 되겠어요? 가져오면 “내가 그것 받으려고 해준 줄 아시오” 하면서 야단칩니다.
 

죽음은 우리에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가르친다

- 말씀을 들으니 생전에 잘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죽음을 잘 맞이해야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결혼식엔 못가도 장례식에는 가라는 얘기가 있어요. 성경 말씀대로 운명을 맞이하면 인간은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에요. 어디까지나 거룩하고 엄숙하게 장례를 치러야지요. 육신은 흙으로 돌아가고 영혼은 하늘나라로 가 심판을 받게 되는데, 나는 고인이 천당 갈 수 있도록 잘 빌어줍니다.

어제까지 팔팔하던 사람이 오늘 흔적도 없이 사라지면 그렇게 허무할 수가 없어요. 그러니 세상을 사는 동안 남한테 악하고 굴지 말고 선하게 살면서 하나님 말씀대로 순종하고 살면 천당에 가는 겁니다. 난 어머니 죽음을 통해 수 십 년간 다른 사람이 저 세상 가는 길을 인도하는 일을 하게 됐는데, 그런 삶을 통해 남에게 베풀 때 행복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한 가지 정말로 확신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내가 남에게 베푼 만큼 그 배, 몇 배로 나에게 돌려주신다는 거예요. 나는 앞으로도 내게 남은 시간 동안 베풀 수 있는 만큼 더 많이 베풀고 싶어요. 죽는 순간이 아름답고 평화로운 사람의 삶이 잘 산 삶입니다. 죽음은 우리에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가르쳐주지요.

지난 40여년 간 4천여명에 가까운 시신을 염습봉사해온 오병용 장로는 1926년생이다. 북한에 있는 원산공립상업학교를 졸업했고, 스무살에 월남해 자수성가한 기업인이다. 경동기업 전무 등으로 일하다 1966년 무역회사 (주)삼립산업을 설립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72년 고려대 경영대학원을 수료했으며, 소망교회 장로로 봉직하다가 퇴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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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HJ 2018-06-29 22:22:08
댓가없이 선한 일 하시는 장로님 존경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