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회, 보수세력의 위기인가, 궤멸인가? (1) - 한국 보수에 대한 단상
한국사회, 보수세력의 위기인가, 궤멸인가? (1) - 한국 보수에 대한 단상
  • 연세대 국가관리연구원 윤민재
  • 승인 2018.06.27 1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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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선거 이후 보수궤멸에 대한 논의가 회자되고 있다. 선거결과로만 본다면 보수의 궤멸은 아니다. 보수 유권자의 방황, 혹은 정치적 무관심이 보수의 궤멸로 보일 뿐 여전히 저변에는 많은 보수유권자들이 있다. 그러나 보수정당의 궤멸이란 말은 어느 정도 타당하다. 과거처럼 보수유권자들이 믿고 투표할만한 보수정당이 현재 존재하는가에 대한 의심이 커지고 있다. 더불어민주당과 청와대의 개혁드라이브 앞에 힘 잃은 보수정당은 더욱 힘을 쓰지 못하고 있다. 현 정부에 대응할만한 경제, 사회복지 정책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또한 남북문제의 진전 앞에 과거처럼 안보 논리로 어느 정도 유권자의 관심을 끌었던 보수정당은 객관적이지 못한 비현실적인 안보, 통일의 이야기만 하고 있다. 과거에는 지역 균열, 안보 균열로 이익을 보았지만 이제 그러한 균열의 정치에 기댈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더군다나 보수 여당은 분열되었고 심지어는 기층에서는 무소속, 혹은 더불어민주당으로 이전하는 이탈의 조짐이 커지고 있다.
 

현 상황은 보수의 궤멸이 아니라 구습에 너무 익숙해져 있고 사고의 발상 전환을 전혀 하지 못하고 있는 보수정당의 궤멸이 맞는 말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보수정당이 또 쪼개지고 이전투구를 벌인다면 방황하고 부유하는 보수유권자들은 더불어민주당으로 이전하거나 정치적 무관심 세력으로 남게 될 것이다. 이때 더불어민주당과 청와대가 더 강한 개혁드라이브를 걸고 정의당 등이 동조하면서 다음 총선에서 강력한 개혁정치를 전면에 내세운다면 정계는 요동칠 것이고 보수정치권의 전면적인 개편이 나타날지도 모른다. 반면에 문재인 정부의 경제정책이 실패하거나 남북관계에서 돌변 상황이 발생한다면 보수유권자들은 더불어민주당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낼 것이고 잠복했던 지역 균열, 안보 균열이 나타날 것이다.

상황은 매우 유동적이고 누구도 예측할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보수유권자들은 침묵하고 있거나 정치에 무관심을 표명할 뿐 궤멸하거나 소멸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보수정당만이 궤멸 직전에 있을 뿐이다. 이번 선거에서 여권 일부 후보가 도덕적, 정치적으로 문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무난하게 당선된 것은 그러한 ‘흠’에도 불구하고 유권자들은 보수정치세력을 찍을 수 없는, 도저히 그들에게서 정치적 희망을 가질 수 없는 상황이 있었던 것이다. 심지어 전통적 보수지역인 TK에서 조차도 선거 막판까지 당선이 위협받는 상황에 있었다. 단지 전국을 더불어민주당에게 100% 넘길 수 없다는 위기의식이 그 지역에서 보수정당 후보자들을 당선케 한 것이다.

이제 문재인 정부의 실수나 정책 실패만을 기다리는 요행수가 답이 될 수 없다. 상황을 능동적으로 개척하고 이슈를 선점해야 한다. 그리고 끊임없이 국민의 입장에서 눈높이에 맞는 정책 개발에 힘써야 한다. 그 모든 것들은 국민들의 마음을 읽어야만 가능한 것이다. 국민은 변칙이나 무리수를 원하지 않는다. 따뜻하고 편하고 고요히 흘러가는 상식을 원한다. 상식의 정치를 원하는 것이다.

연세대 국가관리연구원  윤민재
연세대 국가관리연구원 윤민재

 
■ 한국 보수에 대한 단상

한국 정치문화와 보수세력의 특징

▶ 정당정치의 후진성
▶ the habit of hearts 의 문제
▶ 성찰과 포용, 관용의 부족
▶ 일반화된 타자의 부재(generalized others)
▶ 민주주의와 시장은 동의어가 아니다
▶ 비르투의 정신의 부재

  우리 사회 이념 갈등을 증폭시키는 요인으로 집단을 중요시하는 정치문화를 들 수 있다. 집단을 중시하다보니 자연히 ‘우리’와 ‘그들’이라는 편 가르기 의식이 자리 잡게 되었다. 또한 집단사고가 작동하면서 개인의 의식이 극단화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한국 정당의 후진성은 이러한 이념 갈등을 증폭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정당은 지역주의를 교묘히 이용하거나 상대방을 수구 기득권 집단이나 혹은 좌익 급진주의자로 매도하는 전략을 쓰게 된다. 정당은 국민의 지지를 얻기 위해‘편향성의 동원’에 의존하게 된다. 편향성의 동원이란 사회의 중심 갈등을 억압 또는 대체하기 위해 특정 갈등을 부각하고 그에 따라 정치참여를 동원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이 한국 정당이 보여준 악습이었다.

한국 사회 보수세력의 마음의 습속(the habit of hearts)은 보수세력만의 집단적 이기주의에 빠져 민주주의의 정신을 후퇴시키고 경제성장과 안보의 논리만 강화시킨 비정상적 마음의 습속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마음의 습속은 근대화, 산업화, 민주화 과정을 거치면서 강화되었고 왜곡된 보수주의 정치문화를 만드는데 영향을 주었다.

서구의 보수/진보의 형성은 근대 국가의 형성과 개인과 시민의 발전 속에서 공적이고 민주적인 제도와 담화, 토론의 분위기 속에서 이루어졌다. 그러한 대립과 갈등 경쟁은 민주적인 제도와 내용을 침식하지 않고 오히려 건강한 체질로 전환시키면서 보수와 진보가 함께 성숙될 수 있는 사회적인 기반을 마련했다. 

반면 한국 사회의 보수/진보의 형성과 발전과정은 서구의 근대적인 역사발전의 내용이 생략된 채 체제이데올로기와 접합되면서 경쟁상태가 전무한 상태가 되었고 보수이념은 견고한 국가권력과 지배세력의 지원으로 한국 사회의 구석구석을 지배하고 통제하는 거대한 이념 틀로 작용하였다. 그렇지만 이러한 과정은 보수이념 자체에 유리한 측면만을 제공한 것은 아니었다. 보수주의 이념은 자기검증과 반성, 반대세력으로부터의 비판과 이를 통한 끊임없는 성찰, 보다 합리적인 사고와 철학으로 발전하려고 하는 노력이 부재한 상태에서 정치권력의 장악과 사회 저변의 헤게모니 획득에 치중된 면이 강하였다.

한국사회에서 보수주의 세력이 기본으로 지켜야 할 자유주의의 덕목은 매우 취약하고 오직 반공과 친미, 왜곡된 보수이념만이 존재하였다. 보수세력들은 정치적 이해관계를 중심으로 이합집산을 하기 때문에 오랜 기간 지속될 수 있는 이념을 만들어내지 못했다. 왜냐하면 보수세력의 주요 관심은 권력을 유지하면서 그 권력의 틀 속에서 지배세력으로 남는 것, 즉 기득권을 유지하는 데만 있었기 때문이다. 반면 서구의 보수/진보의 형성은 근대국가의 형성과 개인과 시민의 발전 속에서 공적이고 민주인 제도와 담화, 토론의 분위기 속에서 이루어졌다.

한국의 보수세력이 지난 70년 동안 정체된 모습을 보인 것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외부의 세력(북한, 사회주의)에 한정해 거기에 대항하는 자세에서만 찾고 스스로에 대한 성찰과 반성, 그리고 사회 포용으로서 사회문제와 불평등, 소외, 억압 등의 문제를 통해 자신들의 위치를 자리매김하려는 자세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보수세력은 권위주의 정권을 지나면서 나타난 사회 불평등, 인권문제, 사회차별, 물질만능주의 등의 문제를 치유하고 개선할 수 있는 정책을 제시해야만 했다(이러한 가치로의 이전은 보수의 변절 혹은 기회주의 행태가 아니다. 탈냉전, 글로벌 시대, 국민이 주권자임이 확인된 이 시대에 필연적인 현상이다. 보수개혁을 논하면서 이러한 가치로의 이전을 ‘좌클릭’이라고 부정하는 것은 결국 보수개혁을 하지말자는 것이다. 이때문에 보수를 수구로 혹평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현 상태에 안주하고 그로부터 명예, 부와 같은 사적 이익을 더욱 추구하였고, 그 결과 대중들로부터 더욱 멀어지게 되었다.--> 이는 자신들을 들여다볼 수 있는 객관적 거울의 결여, 나아가 성찰의 부족을 가져왔다.

보수세력은 오직 파괴, 절멸, 부정, 획일화 배제의 언어만을 통하여 상대방을 규정하고 자신의 준거 틀을 세우는 전근대적인 자기정체성 확보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이러한 방식은 자신에 대한 객관적인 성찰과 비판을 차단함으로써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이념과 가치관의 자기 발전과 상승 극복의 과정을 스스로 포기하게 만들었다.

위의 현상은 일반화된 타자의 부재와 감정이입과 공감능력의 부족으로 설명될 수 있다. 일반화된 타자는 개인의 자아가 완성되기 위해서는 다양한 타자들(사회)이 그를 바라보고 규정하는 시각을 수용하고 객관적으로 해석하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을 말한다. 이를 통해 개인의 자아는 사물(사회)를 객관적으로 인식할 수 있다. 중요한 점은 정체성, 자아확립을 위해서는 반드시 사회라는 거대한 타자가 필요하다는 점이고 그것을 통해 나의 정체성이 객관적으로 형성될 수 있다는 점이다(어린 아이들이 숨바꼭질을 할 때 두 손으로 자신의 눈을 가리면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못 본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일반화된 타자가 내면화되지 못한 결과이다).

그리고 감정이입과 공감능력의 부족을 들 수 있다. 보수는 타인의 공감과 돌봄에 의존하지 않고 타인에게 감정이입을 하거나 책임을 지지도 않고 자신의 이익에 봉사하는데 중점을 두었다.
미국 독립선언문의 인권 논리가 소개되기 전 미국사회에서는 대중들의 공감과 감정이입을 불러일으키는 소설 등이 발표되었다. 대중들은 고난과 역경을 겪는 평범한 이들과 자신을 동일시하고 등장인물의 기분을 느끼고 그들의 역경을 인식하기 시작하였다. 즉 공감의 정서가 확대되었다(George Lakoff).

민주주의는 시장과 동의어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신자유주의 시대에 민영화, 시장 개방이 시민사회와 시민의 미덕을 확립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한마디로 어불성설이 될 수 있다. 자본주의가 민주주의를 낳은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가 자본주의를 불러왔다는 역사적 사실을 분명히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시장이 아닌 공적 영역이 활성화된 건강한 시민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이념 대립과 상대방을 절멸시키려는 기존의 보수와 진보의 대결 구도는 결코 건강한 민주적인 공적 영역을 만들 수 없다.

마키아벨리가 ‘권력의 순간’으로 부른 것처럼 권력을 쟁취하는 것이 모든 정치세력의 목표가 되고 쟁취를 하는 순간 법, 제도, 정신, 물질, 권력 모두를 향유할 수 있다는 사실을 한국의 정치사는 보여주고 있다. 마키아벨리는 운, 상황, 호의 등을 의미하는 포르투나(fortuna)가 아닌 비르투(virtu)의 정신을 지도자는 가져야 한다고 역설한다. 용기와 기백, 결단력, 능력, 기술이 바로 비르투가 보여주는 상징 내용이다. 비르투는 외부에 의해 주어지거나 행운에 의해 부여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주체적으로 만들어가는 것이다.

한국의 보수세력은 비르투의 리더십을 가지고 주체적으로 상황을 돌파하고 여건을 만들어 나갔는가?
한국의 보수세력은 공익과 민주주의의 발전을 위해 이슈를 선점하고 이슈를 주도해 나갔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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