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국 70주년 이승만을 말한다] 건국대 명예교수 이주영 "국부(國父)와 독재자의 두 얼굴"
[건국 70주년 이승만을 말한다] 건국대 명예교수 이주영 "국부(國父)와 독재자의 두 얼굴"
  • 미래한국
  • 승인 2018.06.27 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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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부(國父)와 독재자의 두 얼굴


- 이승만 대통령의 존함을 들으면 가장 먼저 어떤 생각이 드시나요?


우선은 건국, 건국 대통령, 국부(國父) 이런 단어가 떠오릅니다.이는 아주 상징적인 단어인데, 일반인들은 특히 젊은 사람들은 내용도 잘 모르면서 그냥 막연히 독재자라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어요. 그런데 어떻게 보면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다 독재자라고 볼 수도 있어요. 우리가 이승만 대통령을 독재자다, 아니다, 라고 얘기할 때에는 다른 사람들과 비교해 보고 말해야 해요. 우리가 이승만 대통령을 그 다음의 대통령들, 특히 군 출신 대통령들과 북한의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 같은 사람들과 비교해 봤을 때 과연 그분을 독재자라고 부를 수 있겠는지 생각해 봐야 해요. 저 자신은 이승만 대통령은 그 사람들에 비하면 독재자가 못된다고 생각하고, 그렇기 때문에 역시 건국, 건국 대통령, 국부라는 말이 훨씬 적합하다고 생각합니다.

- 우리 민족 5천년 역사에서 이승만 대통령만이 할 수 있었던 가장 큰 기여는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역시 근대국가로서의 대한민국의 건국이지요. 이 한반도 땅에는 많은 나라가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근대국가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대한민국이 처음입니다. 그 당시에는 공산주의라는 전체주의가 전 세계를 휩쓸고 있었기 때문에, 웬만하면 남한에서도 북한에서와 마찬가지로 전체주의 국가가 들어설 가능성이 굉장히 컸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막아내고 미숙하고 준비는 덜 되었지만 서양 문명과 같은 자유주의 국가,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건설했다는 것이 역사적으로 가장 큰 공로예요.

여기에 하나 결부시켜서 말하고 싶은 것은, 과거에 한반도에 나타났던 나라들, 조선왕조나 고려, 신라, 고구려, 백제 같은 나라들은 전부 주로 중국식 문화, 중국식 생활방식의 영향을 받은 대륙문명권의 나라였습니다.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이 세운 대한민국은 그것과는 방향을 완전히 바꿔서 미국이나 서유럽과 같은 해양문명권의 국가들과 같은 문화와 생활방식을 받아들이기 시작한 근대국가를 건설했다는 것입니다.

건국대 명예교수 이주영
건국대 명예교수 이주영

인간 이승만에게도 약점은 있었다

- 이승만 대통령의 애국애족 정신에 대해서는 평점을 얼마나 드릴 수 있을까요?

우선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사실 어려운 여건 속에서 나라를 세우고 기초를 닦았기 때문에 100점을 줘야 하는 게 원칙이지만, 인간에게는 완전하다는 것이 없고, 또 이승만 대통령 자신도 남의 탓이건 자기 탓이건 간에 실수한 것도 많고 해서, 저는 85점, 대학의 학점으로 치면 일단 B+ 정도 하는 것이 무난하다고 생각합니다.

좀 더 예를 들면, 부산 정치파동, 사사오입 개헌과 같은 정치적인 잘못은 이승만 대통령 자신의 책임도 커요. 대통령을 더 하려고 했고, 또 국회에서 대통령을 뽑으면 자기가 당선될 가능성이 없으니까 국민들의 직접선거로 바꾸려고 하는 욕심이 있기도 했지만, 사실은 그 당시의 정치구조에 잘못이 있었습니다.

당시의 정치구조는 미국식 제도를 많이 따른 것인데, 처음에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뽑은 제헌국회는 임기가 2년이었습니다. 국회의원의 임기가 2년이면 아무 일도 못합니다.

그런데 이것을 제헌국회의원 2년, 대통령 4년 하니까 혼선이 생기고 이승만 대통령으로서도 2년 만에 그만둬야 하는데, 다음에 새로 구성될 국회는 이승만에 대해 굉장히 적대적인 세력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무리수를 쓰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책임은 그 당시 정치 여건에도 있었고, 이승만 개인에게도 있었고 그랬습니다.

- 김구 선생이나 안창호 선생은 독립운동을 하고 임시정부에서 활동을 하신 민족의 지도자이기에 그분들을 기리기 위해 도산로(路), 도산공원, 김구 기념관, 동상 등을 세워서 기리고 있지만, 정작 대한민국의 정통성과 정체성의 뿌리라 할 수 있는 건국 대통령에 대한 예우는 말이 아닙니다. 이 같은 사실에 대해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일단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예우에 대해서 말하자면, 한마디로 거의 완전히 잊혀져 있고 지워져 있는 대통령입니다. 도처에서 지워져 있는 대통령이니까 이제부터는 어느 정도 예우를 갖춰야 할 시기가 오긴 왔는데, 도로에 이름을 붙이고, 기념 도서관을 세우고, 동상을 세우고 하는 것은 우리나라 국민들의 정서에 아직은 잘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것은 이승만 대통령뿐만 아니라 다른 대통령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서양에서는 어떤 유명한 사람의 이름을 따서 도로 이름 등에 붙이지만, 우리에겐 그것이 익숙하지 않아요. 그런 일을 한반도에서 제일 먼저 시작한 것은 북한이에요. 김일성대학교, 김종숙 군, 김책 시, 이런 것은 사실 굉장히 어색합니다. 사실 우리한테는 맞지 않는 것인데, 우리도 그것을 따라서 자꾸 이름을 바꾸는데, 저는 이승만 대통령보다도 다른 사람들에 대한 그런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역사, 사회, 국어 교과서 이런 곳에서 국부인 건국대통령에 대해 너무나 부정적으로 묘사하고 있거나 아예 지워져 있습니다. 사정이 이렇기 때문에 학교 교육을 통해 이승만 대통령에 관한 역사적 평가를 바로 하고 난 후에 무엇을 세우거나 도로 등에 이름을 붙이거나 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자칫 역효과가 날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다른 사람들은 붙이고 있는데 붙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충분히 고려해 볼 문제입니다.

광복과 건국은 동시에 기념되어야

- 일부 사학자가 1919년 4월 13일 상해임시정부의 시작이 곧 대한민국이 건국된 날이라고 주장하고, 정부는 1948년 8월 15일을 건국일로 정하지도 않고 기념하지도 않고 있습니다. 건국일은 마땅히 국가 명절인 건국절로 제정하여 기념해야 하는데도 국가가 이를 시행하지 않고 있는 것에 대해 한 말씀 해주시죠.

당연히 건국을 기념하는 건국절이 제정되어야 합니다. 우선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1945년 8월 15일은 일제의 압제로부터 해방된 날입니다. 그 후 3년 뒤인 1948년 8월 15일은 대한민국이 건국된 날입니다. 그런데 해방일과 건국일이 햇수로만 3년 차이가 나고 날짜로는 똑같습니다. 그래서 이승만 대통령이 통치하고 있을 때 8·15 경축사에서 8·15 해방과 건국을 동시에 기념하는 그런 날로 행사를 치렀습니다. 그것이 가장 무난했는데, 문제는 이승만 대통령이 물러난 다음의 집권세력들이 문제입니다.

그런데 해방이라는 말과 광복이라는 말은 의미가 좀 다릅니다. 해방은 압제로부터 벗어나는 것이고, 광복은 압제로부터 벗어나는 것과 독립국가로 서는 것을 함께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된 이유에선지 광복이란 말을 해방이란 말로 바꿔 해석하면서 광복절, 광복일이라고 하면서 해방된 날로만 기념하고 있는데, 이것은 아주 잘못된 일이에요. 원래 이승만 대통령은 처음 국회에다 독립기념일의 제정을 요구했습니다. 그때 건국절이란 말을 쓰지 않고 독립기념일로 제정해 달라고 국회에다 요청했는데, 국회에서 논의 과정에서 어찌 된 일인지 광복절로 바뀌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와서 이것을 잘못되었다고 바꾸기는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이기 때문에, 제일 좋은 방법은, 지금은 8.15를 광복절로 기념하고 있는데, 광복을 해방의 뜻으로만 사용하고 있으니, 동일한 날을 건국절로 제정하여 기념하면서, 같은 8월 15일에 대통령이 경축사를 할 때 광복과 건국을 동시에 기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표시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가장 좋아 보입니다.

반공포로석방

공산주의자들의 이승만 증오

- 국내 사학계가 흔히 진보사학자라는 사람들에 의해 95% 이상 장악되고, 그 외의 사람들도 이승만 대통령의 이름을 입에 올리기조차 꺼려 하는 실정인데도 이 교수님은 이승만 건국대통령을 바르게 알리기 위하여 책도 저술하고, 강연 등을 통해 혼신의 노력을 아끼지 않으시는데 거기에는 무슨 특별한 사연, 혹은 중요한 사연이 있으신가요?

두 가지로 나눠 얘기할 수 있는데요. 왜 사람들이 이승만을 이렇게 미워하고 있느냐? 이에 대해 제가 여러 가지 문헌을 통해 분석해 본 결과,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는데 상당한 사람들, 어떻게 보면 가장 발언권이 강한 사람들의 주장을 분석해 보니, 이렇습니다. 이승만만 없었으면 북한과 똑같은 공산국가를 세워서 남북이 통일될 수 있었는데 이승만 때문에, 이승만이 대한민국을 세우는 바람에, 결국은 공산화 통일을 못했고, 공산화를 못했기 때문에 밉다고 하는 그런 뜻이 제일 강한 것 같습니다. 다른 이유도 있겠지만, 질문하신 것에 대한 대답은 이렇습니다.
해방 이후에 굉장히 많이 월남했는데, 똑같은 원리입니다. 북의 전체주의 체제를 피해서 자유를 찾아 남으로 넘어왔는데, 만약에 대한민국이란 나라가 없어지거나 무너지게 되면 오갈 데가 없어지는 겁니다. 보트피플이 되는 도리밖에 없어요. 그런 의미에서 북한 출신들은 대부분이 정도에 차이는 있지만 대한민국을 세우고 그것을 지켜낸 이승만 박사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의 애정이 있는 겁니다.

훼손된 채 방치된 이승만 대통령 흉상
훼손된 채 방치된 이승만 대통령 흉상

국민의 뜻에 따라 하야한 이승만

- 이승만 대통령의 말년인 1960년 4월 19일에 학생운동이 일어났고, 그 결과 180여명이 사망하고 수천 명이 부상당했습니다. 그때 이승만 대통령께서는 자유당 총재로서 부정선거에 대한 책임을 지고 하야 하셨는데, 그 일에 대한 소회를 말씀해 주시지요.

4·19와 이승만 대통령의 관계를 말할 때엔 저는 늘 크게 곤혹을 느끼게 됩니다. 한편에서는 옹호해야 한다는 마음이 있으면서 또 한편으로는 그분의 책임도 크기 때문에 착잡한 마음을 금할 수 없어요. 일단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이승만 대통령을 독재자를 볼 수는 없어요. 자기로 인해서 4·19가 일어났고, 거기서 죽은 학생들도 있고 부상당한 학생들도 있었지요. 그때 이승만 대통령은 부상당한 학생들이 입원해 있는 병원을 찾아갔습니다. 독재자라면 절대로 자기를 물러나라고 데모하다가 부상당한 환자들을 위문하러 찾아가지 않습니다. 자기가 직접 가서 위로의 말을 하고 그 다음에 독재자이니 물러나라고 한다면 물러나겠습니까? 안 물러나죠. 그런데 그분은 자진해서 하야(下野)했다는 것만 보더라도 독재자가 아닌 게 분명합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승만 대통령은 4·19에 책임이 많이 있어요. 어떤 책임이 있냐 하면, 이승만 대통령께선 다 잘했지만 결정적으로 잘못한 것은 물러날 때를 놓치신 것입니다. 사람은 나올 때도 있고 물러날 때도 있는데, 물러날 때를 놓치신 겁니다. 그러면 이승만 대통령이 물러나야 했던 때는 언제인가? 1948년에 임기 4년의 대통령에 당선이 되었어요. 그러고 또 다시 재선이 됐으니까 4년, 그렇게 해서 8년 동안의 임기를 마치고 물러났다면 1956년 초에 물러나야 했습니다. 1956년 초에 물러났어야 했는데, 그때 못 물러났어요. 그때 못 물러났기 때문에 사사오입(四捨五入) 개헌을 하여 대통령을 4년 더하게 되었지요.

그러면 왜 1956년에 못 물러났는지 조사를 해보니까, 이승만도 1956년에 8년 임기를 끝내고 물러나려고 했었습니다. 그런데 자유당 전당대회에서 이승만 박사를 차기 대통령 후보로 추대를 했어요. 또 하나는 미국의 예를 보더라도 조지 워싱턴 대통령이 거의 종신 동안 할 수 있었는데도 본인이 두 번 해서 8년으로 끝내고 말았는데, 그런 예를 따라서 “나도 8년으로 끝내는 것이 좋겠다”라고 분명히 거절 의사를 밝히는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런데 자유당에서 뭐라고 대답이 왔느냐 하면요, “왜 미국 대통령에는 조지 워싱턴 대통령만 있습니까?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도 있습니다”고 했어요.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대통령에 4번 당선되었어요. 그래서 4년, 4년, 4년 12년을 하고 그 후에 다시 네 번째 당선이 되어서 13년째 하다가 병으로 죽었습니다.

“미국에 루스벨트 대통령은 4번 당선이 되었는데 이승만 당신은 왜 2번만 하고 그만두려고 그러느냐.” 이러면서 자유당에서 여러 가지로 압박을 합니다. 이승만 대통령에게 물러나지 말라는 데모도 하고 그래요. 이렇게 되니까 이 노인네가 여러 가지 마음 아픈 고민을 하다가, 여러 가지 압력이나 유혹을 이기지 못해 결국 1960년에 출마를 했다가 나라와 본인 모두 어려움을 겪게 된 것입니다.

1959년 4·19가 나기 직전 해에 미국 망명 시절부터 이승만 대통령의 개인 비서가 되어 도와준 미국의 로버트 올리버 교수가 한국을 방문했어요. 한두 달 동안 여기서 여러 사람을 만나보고 마지막으로 미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경무대에 들어가서 이 대통령한테 하직 인사를 하면서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각하, 이제 연세도 많으시니까 후계자한테 넘겨주시고 좀 편히 쉬시지요.” 이렇게 얘기했더니, 이승만 대통령이 그에게 “나라고 왜 그런 생각이 없겠나…. 그런데 마땅한 후계자가 없어.” “왜 없습니까?” “한번 얘기해 봐, 누구가 좋은지…”

그래서 조모 박사와 장모 박사가 거론된 겁니다. 거기에 대해 이승만 대통령이 어떻게 대답을 했느냐 하면, “조모 박사는 안 돼. 술이 과해서 나라 일을 그르칠 위험이 커.” 그것을 언제 경험했느냐 하면, 6·25가 터지고 좀 있다가 내무부 장관을 교체할 때 조모 박사를 내무부 장관 시켰는데, 그때 술좌석을 많이 가졌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소문도 나쁘게 나고 그랬던 거 같아요.

장모 박사에 대해서도 “안 돼. 장모 박사는 애국심이 너무 없어.” 이 점도 그 당시로선 어땠는지 모르지만 나중에 보면, 박정희 장군이 5·16 군사 쿠데타를 일으켰을 때 장모 박사가 국무총리였어요. 그때는 내각책임제였으니까 총리가 실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쿠데타를 막아야 될 입장에 있었어요. 쿠데타를 막아야 될 책임자인 국무총리가 1주일 동안이나 수녀원에 숨어버렸어요. 그러니까 겁이 많은 사람이라고 볼 수 있어요.

이승만 대통령은 그냥 자기 임기가 끝나면 뒤도 안 돌아보고 물러났어야 했는데, 주변에 여러 가지 간언(奸言), 노인으로서의 지나친 걱정, 이런 것들이 뒤범벅이 되어서 물러날 시기를 놓치고 만 것이 가장 큰 잘못이라고 생각합니다.



대한민국사랑회 <이승만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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