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명재상을 찾아서] 정조(正祖)의 복심, 재상 채제공(蔡濟恭)
[조선시대 명재상을 찾아서] 정조(正祖)의 복심, 재상 채제공(蔡濟恭)
  • 이한우 미래한국 편집위원·논어등반학교 교장
  • 승인 2018.06.28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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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20년(숙종 46년)에 태어난 채제공은 1743년 문과에 급제해 영조 시대에 주로 벼슬살이를 했다. 1753년에 충청도암행어사로 균역법의 실시 과정에서 나타나는 폐단과 변방 대비 문제를 진언했다. 1755년 나주 괘서사건이 일어나자 문사랑(問事郞)으로 활약했고, 그 공로로 승정원 동부승지에 제수됐다.

글짓는 데 뛰어나 남인이라는 핸디캡에도 불구하고 영조의 총애를 받았고 1758년에 도승지가 됐는데 이 해에 사도세자와 영조의 사이가 악화돼 세자 폐위의 비망기가 내려지자 죽음을 무릅쓰고 막아 이를 철회시켰다. 이 사건은 훗날 정조의 무한한 총애를 받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왜냐하면 훗날 영조는 제공을 가리켜 “진실로 나의 사심 없는 신하이고 너의 충신이다”라고 정조에게 말했다.

재상 채제공(蔡濟恭)
재상 채제공(蔡濟恭)

남인 핸디캡 극복, 영·정조의 총애를 받다

이후 영조의 깊은 신임과 함께 약방제조로 병간호를 담당하기도 했고, 정조가 왕세손으로 대리청정한 뒤에는 호조판서과 좌참찬으로 활약했다. 1776년 3월에 영조가 죽자 국장도감제조에 임명돼 행장·시장·어제·어필의 편찬 작업에 참여했다. 이어 사도세자 죽음에 대한 책임자들을 처단할 때 형조판서 겸 판의금부사로서 옥사를 처결했다.

1780년(정조 4년) 홍국영(洪國榮)의 세도가 무너지고 소론계 공신인 서명선(徐命善)을 영의정으로 하는 정권이 들어서자, 홍국영과의 친분, 사도세자의 신원에 대한 과격한 주장으로 정조 원년에 역적으로 처단된 인물들과의 연관, 그들과 동일한 흉언을 했다는 죄목으로 집중 공격을 받아 조정에서 쫓겨나 이후 오랫동안 서울 근교 명덕산에서 은거 생활을 했다.

정조 8년 윤3월 21일 정조는 제공을 공조판서로 복직시킨다. 그런데 공조참판 김문순이 제공 밑에서는 일을 할 수 없다며 출근을 거부하고 계속 상소를 올리자 6월 5일 김문순을 파직하고 불서용의 명을 내렸다. 6월 9일에는 영의정 정존겸, 좌의정 이복원, 우의정 김익 등 전현직 정승들이 연명으로 상소를 올려 채제공을 처벌할 것을 청했으나 정조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정조가 볼 때 전현직 정승들의 상소는 ‘참소(讒訴)’에 지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정조는 제공을 일선에서 물러나게 할 수밖에 없었다.

다시 2년이 지난 1786년(정조 10년) 9월 7일 정조는 제공을 평안도 병마절도사로 임명한다. 원래는 중앙사령관격인 도총관에 임명하려 한 것인데 제공이 조정 실력자들의 견제 때문에 극구 사양하자 일단 지방 사령관으로 명한 것이다. 그것도 사도세자의 묘소에 들렀다가 오는 도중에 길에서 우연히 만난 제공을 보고 내린 결정이었다. 경희궁으로 돌아오자 뒤늦게 이를 알게 된 병조판서 이명식이 간쟁을 하자 “경은 늙었어도 발이 매우 빠르구나”라며 웃어넘겨 버렸다. 그러나 거의 모든 조정 신하들이 벌떼처럼 들고 일어났다.


9월 10일에는 제공의 절도사 임명에 반대한다는 이유로 좌의정 이복원, 우의정 김익, 그리고 행 부사직 이성원 등을 그 자리에서 파직해 버렸다. 심지어 정조는 제공을 탄핵하는 상소를 받았다는 이유만으로 승지를 자르기도 했다. 이런 우여곡절을 거치며 제공은 한직인 중추부 지사로 1년여 세월을 보내다가 정조 12년 2월 마침내 우의정 제수를 받았다. 어쩌면 정조는 숙종 때처럼 남인으로의 환국(換局)을 추진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환국 이후 정권을 담당할 만한 인재풀이 남인에게는 없었다.

결국 절충 방안으로 제공 한 명을 비호하다보니 나머지 거의 모든 정파가 등을 돌리는 극한 상황을 자초할 수밖에 없었다. 정조는 제공을 우의정에 제수한 그 다음날 그동안 제공을 비판하다가 삭직됐던 관리들을 모두 복귀시키라고 명한다. 탕평을 위한 대타협 조치를 취한 것이다.

정조 12년 2월 15일 정조가 제공을 위한 장문의 해명을 내놓았지만 조정의 반발은 그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바로 다음날 좌의정 이성원이 그와 관련해 사직상소를 올렸고 2월 17일에는 제공이 자신의 문제로 조정이 시끄럽다며 자신에 대한 우의정 제수를 없었던 일로 해줄 것을 청했다. 2월 19일 정조는 3정승을 불러 직접 상호 협력을 권유키로 했다. 그러나 제공은 병을 이유로 나오지 않았고 영의정 김치인과 좌의정 이성원만이 들어왔다.

모함과 참소에도 당당했던 재상

정조는 두 사람에게 “이번 일은 바로 조정의 큰 거조로서 선조(先朝)에서도 일찍이 하지 않았던 일을 지금 내가 하였으니 만약 뒷갈무리를 잘하지 않는다면 나와 경이 책임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리고 우상이 본디 온화하지 못하니 경이 모름지기 조절하고 억제하여 한계와 법도를 넘지 못하게 하라”고 당부했다. 이에 대해 김치인은 그 자리에서 “신은 늙어서 감당할 수 없습니다”고 즉각 거부했다.

그런데 열흘이 지난 2월 29일 정조와 3정승과의 대화를 보면 김치인이 많이 누그러졌음을 알 수 있다. “우정승이라고 해서 어찌 조정을 할 만한 소지가 없겠습니까?” 이후 적어도 제공의 우의정 임명과 관련된 공세는 한층 누그러졌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마침내 정승의 반열에 오른 제공은 정조의 뜻을 받들어 황극(皇極-임금의 권위)을 세울 것, 당론을 없앨 것, 의리를 밝힐 것, 탐관오리를 징벌할 것, 백성의 어려움을 근심할 것, 권력기강을 바로잡을 것 등의 6조를 진언했다. 이후 1790년 좌의정으로서 행정 수반이 되었고, 3년 간에 걸치는 독상(獨相)으로서 정사를 오로지 하기도 했다. 실록은 이 무렵의 그를 이렇게 평하고 있다. 반대당파가 주도한 실록편찬임을 감안해서 볼 필요가 있다.

“이로부터 은우(恩遇)가 날로 융숭하여졌고, 그 사이에 또 독상(獨相)도 수년을 지냈으니, 대체로 백년 이래 처음 있는 일이었다. 글을 짓는 데는 소(疏) 차(箚)에 뛰어났고, 일을 만나서는 권모술수 쓰기를 좋아하였다. 외모는 거칠게 보였으나 속마음은 실상 비밀스럽고 기만적이었다. 매양 연석(筵席)에 올라서는 웃고 말하고 누구를 헐뜯거나 찬양하는 데 있어 교묘하게 상의 뜻을 엿보았고, 물러가서는 상의 총권(寵眷)을 빙자하여 은밀히 자기의 사적인 일을 성취시키곤 하였다.

상은 매양 그를 능란하게 부리면서 위로하여 돌보아주고 누차 널리 포용해주었다. 그런데 사술(邪術-천주교)이 널리 퍼짐에 미쳐서는, 상이 사교도들의 마음을 고쳐 귀화시킬 책임을 일체 그에게 위임했으나, 그는 사교에 연연하여 흐리멍덩한 태도로 은근히 사당(邪黨)을 비호하다가 끝내 하늘에 넘치는 큰 변이 있게 만들었으니, <춘추>의 의리로 논한다면 먼저 치죄하는 율(律)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 짧은 글을 통해 우리는 당시 치열했던 당쟁의 한 단면을 볼 수 있다. 그밖에도 그는 이 시기에 이조전랑의 자대제(自代制) 및 당하관 통청권의 혁파, 신해통공정책 등을 실시했으며 반대파의 역공으로 진산사건(珍山事件)이 일어나기도 했다. 1793년에 잠깐 영의정에 임명되었을 때는 사도세자를 위한 단호한 토역(討逆)을 주장하여 이후 노론계의 집요한 공격이 야기되기도 했다. 그 뒤는 주로 수원성역을 담당하다가 1798년 사직했다. 그리고 이듬해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누구보다 정조가 받은 충격은 컸다. 제공의 죽음을 전해들은 정조의 전교다.

‘저녁부터 새벽까지 백성을 걱정하는 한 생각뿐이었는데, 이제 채제공이 별세했다는 비보를 들으니, 진실로 그 사람이 어찌 여기에 이르렀단 말인가. 이 대신은 불세출의 인물이다. 우뚝하게 기력(氣力)이 있어, 무슨 일을 만나면 주저 없이 바로 담당하여 조금도 두려워하거나 굽히지 않았다. 그는 젊은 나이에 벼슬을 시작하여 이때부터 영고(寧考-영조)께 인정을 받아 금전과 곡식을 총괄하고 세법(稅法)을 관장했으며, 어서(御書)를 윤색(潤色)하고 내의원(內醫院)에 있으면서 선왕의 옥체에 정성을 다했다.

내가 즉위한 이후로 참소가 여기저기서 빗발쳤으나 뛰어난 재능은 조금도 꺾이지 않았는데, 극히 위험한 가운데서 그를 발탁하여 재상 지위에 올려 놓았었다. 50여 년 동안 조정에 벼슬하면서 굳게 간직한 지절은 더욱 탄복되는 바인데 이제는 다 그만이구나.’ 조정이 내린 시호는 문숙(文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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