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팬덤 ‘빠’들의 전성시대
정치 팬덤 ‘빠’들의 전성시대
  • 한정석 미래한국 편집위원
  • 승인 2018.07.04 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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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 미북 정상회담을 앞두고 백악관은 한바탕 홍역을 치러야 했다. 백악관이 미북 정상회담을 앞두고 만든 기념주화에 사단이 났던 것. 미국 내 언론들은 물론 영국 언론들마저 거센 비판이 일었다. 김정은의 불투명한 정상회담 태도로 정상회담 취소가 거론되는 판에 백악관이 발행한 기념주화가 김정은을 우상화했다는 이유다. 기념주화에는 김정은에 대해 ‘최고 지도자(Supreme Leader)’라는 호칭이 붙여졌다.

BBC는 보도에서 ‘보통은 국무위원장이라고 부른다’며 백악관을 은근히 조롱했다. 미국 CNN은 “김정은을 북한에서 부르듯이 최고 지도자로 칭했다는 비난이 나오고 있다”고 날선 비판을 가했고, 로버트 켈리 부산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트위터에서 “(기념주화가) 역겹다”며 “누구를 우상 숭배하는 것인가”라고 지적했다. 백악관은 ‘관례적으로 정상회담이 있으면 기념주화를 발행한다’고 진화에 나섰지만 북한의 관영매체 조선중앙TV는 때를 틈타 ‘김정은 장군에게 전 세계가 매혹되고 있다’고 보도했다.

미북 정상회담으로 김정은의 주가는 치솟았고, 북한 매체들은 연일 김정은에 대한 우상화에 열을 올리고 있다는 소식들이 등장하고 있다. 지도자에 대한 우상화가 북한에서는 일상이라면 대한민국은 다를까. 2018년 1월 24일 문재인 대통령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미주 한인들이 트위터리안 오소리햅번의 주관 하에 뉴욕 타임스퀘어에 전광판 광고를 게재해 문 대통령 지지층과 반대층이 갑론을박을 벌인 일이 있었다. 국내 문재인 팬클럽은 3000만 원을 모금해 지하철에 문재인 대통령 생일 축하 광고를 내걸었다. 이 문제로 속칭 ‘문빠’의 대모(代母)로 칭송받는(?) 최민희 전 의원은 한 언론의 라디오 방송에서 이를 ‘우상화’라고 비판하는 중도 성향의 시사평론가와 신경질적인 말다툼을 벌이기도 했다.

보수 우파라고 해서 크게 다를 것도 없어 보인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한나라당 대표였던 2011년, TV조선은 개국 당일 박근혜 당시 한나라당 대표와 인터뷰에서 ‘박 대표를 보면 빛이 난다 형광등 100개쯤 키신 것 같다’라는 역대 최고의 찬란한(?) 헌사가 나왔다. 진행을 맡았던 박은주 기자의 멘트였다.

대한민국에서 정치는 바야흐로 ‘우상과 빠들’의 시대가 됐다. 노빠, 문빠, 박빠, 홍빠, 안빠...소위 ‘빠’들이 한국의 정치를 좌우하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문화적 학술용어로 ‘팬덤(Fandom)’이라 불리는 이 ‘빠’의 원조는 70년대 공단에 불어닥친 여공들의 남진, 나훈아 팬들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이 둘이야말로 진정한 ‘대한민국의 라이벌’이었다는 평가를 듣는다. 팬(Fan)과 영토(Dom)의 합성어인 팬덤은 글자 그대로 ‘팬들의 왕국’이라 할 수 있다. 가요계를 중심으로 그저 청소년들의 ‘오빠부대’ 팬클럽 정도로 인식되었던 팬덤은 그러나 1990년대에 이르면 서태지와 아이들, HOT, 젝스키스, 신화, god 등 1세대 아이돌 스타들 팬덤 간에 헤게모니 투쟁 양상을 띠기 시작했다.

단순한 응원 조직을 넘어 서로가 서로를 상대로 누가 진정한 댄스 가요계의 황제인지 인터넷을 통한 설전과 비난의 전쟁이 시작되었던 것. ‘적과 동지’라는 정치적인 것의 본질이 가요계 팬덤들 사이에 등장한 셈이다. 90년대의 이러한 연예계의 팬덤은 2002년 20~30대를 중심으로 ‘노사모’라는 집합적 열광(Collective effervescence)을 형성하기에 이른다. ‘집합적 열광’이란 프랑스의 사회학자 뒤르켐이 현대 사회의 종교적 특성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한 개념이다. 이는 ‘한 장소에 모인 사람들이 감정을 공동으로 체험하고 공동의 행동 속에 표현하면서 서로를 고무시키고 증폭시킴으로써 만들어낸, 개인으로 있을 때는 경험하기 어려운 예외적 힘을 갖는 강력한 흥분 상태’를 말한다.

뒤르켐의 이러한 설명은 2002년 월드컵 게임의 ‘붉은 악마’라는 한국 축구 팬덤이 여중생 미군 장갑차 사망사건의 선동과 결부되면서 이른바 ‘촛불집회’라는 의례(儀禮)로 등장했다는 가설에 힘을 실어 준다.

이성이 아니라, 원시종교성이 만든 촛불

뒤르켐은 자신의 사회학 이론에서 사람들의 집합적 열광의 배경은 결코 이념이나 이성이 아님을 논증한다. 그러한 열광은 세속화된 성(聖)에 대한 인간의 ‘원시종교적 본성’인 것이다. 즉 고대에 신(神)의 뜻이 모든 사건과 현상의 설명으로 그 정당성을 가졌던 시대는 지나고, 이제 인간 스스로 자신들에게 닥친 현실을 이해하고 해결해야 하는 현대에서 인간은 여전히 선과 악의 문제를 종교적 본성에 따라 판단하려 든다는 것이고, 이 문제가 집단적 의례를 통해 집합적으로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러한 의례가 바로 ‘촛불’이었고, 이 촛불은 원시시대에 제정일치를 상징하는 ‘토템 숭배’라고 해석할 수 있다. 뒤르켐은 그러한 토템의 숭배는 결국 세속화된 종교적 본성에 의해 ‘개인숭배’로 이어짐을 간파했다. 뒤르켐의 모델에 따른다면 2002년 그 해, 노무현이라는 ‘정치적 아이돌’이 등장하는 완벽한 환경이 마련된 것이다.

90년대 서로를 적과 동지로 가르던 청소년들의 아이돌스타 팬덤은 이들이 청년이 된 2002년 월드컵에서 ‘붉은 악마’라는 내셔널리즘의 집합적 열광으로 이어졌고, 여기에 여중생 미군 장갑차 사망사건이 ‘반미(反美)’를 코드로 한 선동과 촛불이라는 의례와 토템을 만나면서 ‘반미면 어떠냐’고 연설했던 노무현을 숭배하는 ‘노사모’의 등장으로 이어졌음을 이해할 수 있다. 결국 오늘날 모든 ‘정치적 빠’들의 기원은 바로 이 노사모였던 것이고, 이들의 내면은 정치적 이념이 아니라, 원시종교적 발로라고 해석할 수 있다. 이 현상은 문재인을 지지하는 ‘문빠’로 이어지면서 드루킹 사건이 보여주듯 도덕적 타락과 법치와 문명 파괴의 반달리즘마저 드러냈다. 이들에게 문재인에 대한 비판은 그 어떤 것도 정당하지 않으며, 그래야 하는 이유로 노무현에 대한 ‘비판적 지지’ 때문에 노무현을 잃었다는 황당한 궤변을 제시한다. 한마디로 사이비 종교집단의 특성을 그대로 보여준다. 실제로 드루킹 그 스스로가 ‘경제적 공진화 모임’이라는 사이비 종교 수준의 단체를 조직하고 송하비결이나 환단고기를 설파하던 인물이었다.

박사모의 두 얼굴

좌파의 정치적 팬덤이 원시종교적 본성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우파의 정치적 팬덤은 다를까.

우파내 가장 강력한 정치적 팬덤을 형성한 주인공은 박근혜였다. 흔히 ‘박사모’라고 알려진 이 조직은 ‘노사모’에 필적하리만큼 그 조직이 방대하고 후원금도 막대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대한민국 박사모’가 공식 명칭인 이 단체는 2004년 3월 30일 1인 카페로 시작해 당시 4.15 총선을 앞두고 언론에서 관심을 보이면서 회원이 급속하게 늘었다.

흥미로운 사실은 박사모가 일관된 정치 이념이나 노선을 견지하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이 점에서 좌파인 노사모나 문빠들과는 사뭇 다르다.

2008년 4월 9일 박사모는 대한민국 18대 총선에서 친이계 이방호 전 한나라당 사무총장을 낙선시키기고 강기갑 전 민주노동당 대표를 당선시키는 데 큰 공헌을 했다. 2008년 2월 기준으로 이방호 후보가 강기갑 후보보다 30% 이상 격차를 벌리고 있었으나, 친박계 의원이 공천에서 대거 탈락한 이른바 ‘친박 공천학살’ 논란이 불거지면서 이방호 낙선운동의 배경이 됐다. 결과적으로 이방호가 강기갑에게 178표 차로 패배하면서 박사모의 낙선운동이 유효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당시 강기갑은 박사모에 “박사모 회원들 고맙다! 참 많이 노력해줘서”라고 화답했다. 당연히 비판이 따랐다. 조갑제 조갑제닷컴 대표는 “박근혜 씨는 박사모를 좀 말려야”한다면서 “박근혜 씨는 한나라당 당원인데 그의 추종자들은 한나라당 공격, 親北派(친북파) 지원행위를 하고 있다. 박근혜 씨의 묵인 하에 이뤄지고 있는 셈이다”라고 비판했다. 이에 정광용 박사모 대표는 “강기갑이 당선된다고 나라가 망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방호가 당선되면 손대는 것마다 다 망했으니까 더 망할 수 있다”면서 “결국 강기갑 의원이 당선됐지만 나라 안 망했다”고 해명했다. 이방호 말고도 이재오, 박형준, 전여옥, 김희정의 낙선운동을 전개했고 전여옥을 뺀 나머지 의원들 역시 낙선한 바 있다.

2008년 6월 3일 박사모는 미국산 쇠고기 수입반대 집회에 가세하기도 했다. 박사모 회원 50여 명은 3일 오후 6시께 서울광장 맞은편인 대한문 앞에서 ‘국민의 생명 위협하는 쇠고기 수입 중단하라’는 플래카드를 걸어놓고 촛불집회를 열었다. 이들은 자유발언을 마친 뒤 1700여개 시민단체 및 인터넷 모임으로 구성된 ‘광우병 위험 미국산 쇠고기 전면 수입을 반대하는 국민대책회의’(국민대책회의)가 주최하는 촛불집회에 합류하기 위해 서울광장으로 이동했다. 정광용 당시 박사모 중앙회장은 “보수 언론 등 보수 우파세력이 재협상을 요구하는 국민들에 대해 배후세력이 있다며 몰아붙이고 있다”며 “그러나 이것은 일부 좌파세력의 목소리가 아닌 전 국민의 목소리라는 걸 보여주기 위해 나왔다”고 말했다. 이에 조갑제 대표는 “국민들은 박 의원이 촛불난동 사태 때에도 불법폭력 시위대보다는 이명박 정부의 이른바 졸속 협상을 더 비판했을 뿐 아니라 친북 좌익세력이 주동한 촛불난동을 이념적으로 보면 안 된다는 말을 한 것을 잘 기억한다”며 “그의 팬클럽인 박사모는 한때 촛불시위에 가담하였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미디어와 SNS가 만드는 정치적 우상과 개인숭배

정치적 팬덤, 흔히 ‘빠’ 현상은 다른 한편으로는 정치적 개인숭배라는 형태로 등장한다.

이때 정치적 팬덤은 자신들이 숭배하는 개인의 정적에 대해 무한한 적개심을 갖게 되는 것이 보통이다. 숭배와 증오는 동전의 양면처럼 붙어 있다. “대중운동이 시작되고 전파되려면 신에 대한 믿음은 없어도 가능하지만 악마에 대한 믿음 없이는 불가능하다.” <맹신자들>의 저자 에릭 호퍼의 말이다. 그는 또 이렇게 말한다. “공동의 증오는 아무리 이질적인 구성원들이라도 하나로 결합시킨다. 공동의 증오심은 원수라도 동질감을 형성한다.”

문제는 이런 정치 팬덤의 증오를 언론들이 부추긴다는 점이다. 이 문제를 연구해 온 박영흠 서강대 언론문화연구소 연구원은 2016년 언론학회에 제출한 자신의 논문 ‘의례로서의 저널리즘 : 한국 저널리즘의 정파성에 대한 새로운 이해’에서 이렇게 지적한다. “특정 정치 세력에 대한 숭배 또는 혐오의 감정을 충족시키기를 원하는 수용자들에게 쾌감, 흥분, 분노, 열정 등을 제공하는 것은 한국 언론의 가장 중요한 기능 가운데 하나이다. 진보 성향의 대통령은 보수 신문에 의해 ‘계륵(鷄肋) 같은 존재’라 조롱당했고, 보수 성향의 대통령은 진보 신문에 의해 연쇄살인을 저지른 사이코패스에 비유되었다.” 박 연구원의 이러한 관찰은 보수 진영의 메이저 일간지 조선일보와 진보 진영의 나꼼수가 각각의 프레임 전쟁을 벌이는 과정에서 잘 드러났다.

조선일보가 노무현, 문재인 정부 시절, 자신의 권위적 매체 파워를 이용해 ‘정론(正論)’을 내세워 이들을 비판했다면 집합적 열광을 목표로 한 저널리즘의 시초라 할 수 있는 팟캐스트 ‘나는 꼼수다’는 이명박,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조롱과 욕설, 사생활과 관련된 루머 등을 여과 없이 내보냄으로써 보수 진영의 대통령을 혐오하는 진보 성향 유권자 집단에게 도덕적 정화(?)가 이뤄지는 카타르시스를 제공했다는 것이 박 연구원의 주장이다. 이러한 언론간의 진영 투쟁이 보수와 진보, 진보와 보수라는 정치적 팬덤에 카타르시스를 제공하면서 우후죽순처럼 등장한 SNS 미디어들은 페이스북을 통해 팬덤의 유통량 전쟁을 벌이는 상황으로 전개됐다. 특히 탄핵심판 이후 보수 진영에는 개인 미디어들이 난장을 방불할 정도로 등장하면서 이 가운데 다시 ‘빠’가 형성되는 특이성을 보여주는 것도 흥미롭다.

‘조만간 북폭’을 열심히 예언하고, 심지어 ‘트럼프 대통령이 만주를 대한민국에 선물하는 계획을 가지고 있다’는 우파 유튜브 채널들에는 예외 없이 ‘최고입니다’, ‘믿습니다’라고 외치는 빠들이 몰려든다. 그러한 빠들로 인해 진행자들은 다시 우상이 된다. 그리고 후원금들이 들어온다. 이들의 예측과 분석이 맞든 틀리든 일단 팬덤에 갇힌 이들이 듣고 싶은 이야기와 믿고 싶은 시나리오를 마치 박수무당들이 신 점치듯 늘어놓아도 아무런 비판과 이성적 의문들이 제기되지 않는 것이 현재 우파 개인 미디어들의 현주소라 할 만하다.

우상이 아닌 상식을 세우자

다시 뒤르켐으로 돌아가보자. 뒤르켐은 고대인들을 하나로 묶어 줬던 신들은 올림포스 정상 너머로 사라졌고 이제 인간에게 현실 문제를 스스로 해결해야 하는 자유와 책임을 넘겨줬다고 썼다. 뒤르켐에게 신들은 자신들의 일로 바쁜 것이다. 과학과 이성의 시대가 그렇게 만들었다지만, 여전히 현대인은 고대인들과 다를 바 없이 종교적 본성을 통한 성과 속의 갈등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다시 말해 무엇이 善이고, 무엇이 惡인지의 문제는 현대인도 여전히 해결해야 하는 고민이며 그렇기에 도덕은 어떻게든 우리가 연대라는 집단지성을 통해 해결해야 하는 문제로 남아 있는 것이다. 뒤르켐은 이 문제를 ‘긍정적인 연대’로 해결할 것을 제안한다. 그래야만 물질계와 정신계간에 분열과 혼돈이 초래되는 아노미 현상을 방지할 수 있다. 부정적인 연대는 연대가 이뤄지지 않는 ‘빠’들의 중구난방, 팬덤들의 팬덤들에 대한 투쟁이다.

우상은 그러한 아노미적 상황에서 등장한다. 아무 쓸모없는 각자의 정치적 우상을 만드는 데 공을 들일 것이 아니라, 우리의 혼란한 이 상황에서 적용될 수 있는 보편적 가치와 이념이 어떤 것인지를 고민해야 할 때다. 보편은 그 자체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며, 언제나 예외적이고 구체적인 상황을 다루는 방법으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우상과 허깨비가 아닌 진정한 지도자란, 그 방법을 올바르게 알고 있는 자임은 두말할 것도 없다. 문제는 우리의 수준과 양식과 눈이 그런 지도자를 알아볼 만큼 깨어났느냐는 것이다. 이는 상식의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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