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가 대중의 선택을 받으려면
보수가 대중의 선택을 받으려면
  • 박결 라운지리버티 대표
  • 승인 2018.07.09 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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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는 인간이 대중을 상대로 하는 최고 난이도의 예술이다. 뜻을 가진 한 개인이 다른 개인들 즉, 대중들에게 다양한 활동을 통해 자신의 생각을 널리 전파하고 동의를 얻어야 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치와 예술은 그 본질이 상당히 유사하다. 왜냐하면 사람과 사람간의 공감을 이끌어내고 유대를 만들어가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한 활동이라는 점에서 정치와 예술은 인류의 역사와 그 괘를 같이 해온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고유한 활동영역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대의 흐름에 맞게 또 유행의 바람을 타고 정치와 예술은 모더니즘, 포스트 모더니즘 등의 하나의 거대한 사조를 만들어 왔고 그런 사조들에 맞춰 인류의 역사는 발전해왔다. 그간 다양한 정치적 예술적 시도들이 있었을테지만 그 중 가장 많은 대중의 동의를 이끌어 내는 이념과 예술이 곧 시대를 관통하는 사조가 되었다.

모더니즘 시대로 분류되는 19세기의 산업혁명 시기의 정치와 예술은 위(기득권)에서부터 아래(대중)로 전파되어 내려오는 것이었다. 그 시기의 정치인과 예술인들은 대중보다 훨씬 더 높은 곳에서 대중들을 내려다 보며 대중들을 지휘하는 존재였다. 따라서 그들의 사상과 활동은 그들의 권력을 유지하는 도구로 이용된 반면에 한 시대를 이끄는 패러다임을 생산해내지 못하고 그저 기득권이 시키는 대로 따라갈 수 밖에 없었던 대중이라는 존재는 정치, 예술 사조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철저한 외면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다시 말해, 그 시기의 대중은 그들의 권력에 언제나 복종해야 되는 피지배 계급으로 여겨졌다. 그런 점에서 모더니즘 시대의 정치와 예술은 일상의 영역이 아닌 비일상의 영역이었다. 마치 신의 영역과도 같이 정치와 예술은 숭고하고 권위적이며 신비로운 이미지로 대중에게 군림해야 했고 그 권위와 신비로움에 사람들이 경외감을 느끼고 복종을 했던 것이다.

하지만 모더니즘이라는 사조도 결국 막을 내리게 되었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 이후에 대중들은 인간의 이성에 불신을 가지게 되었다. 합리적일 줄 알았던 인간들이 지식과 힘을 가지게 되자 오히려 그것을 악용해 대중들을 전쟁의 참상으로 밀어 넣었던 것이다. 그 기간을 거치며 대중들은 기득권들이 만들어 온 사회와 사조에 실망과 배신 그리고 환멸을 느끼게 되었고 자신들을 지배해오던 권위의 파괴를 꿈꾸기 시작했다. “대서사에 대한 불신”, “저자의 죽음” 등의 구호가 포스트 모더니즘을 이끌었다. 그 시절 즈음부터 정치인들은 대중들의 위에 군림하려 하지 않았다. 사실, 하지 않았다기 보다는 하지 못했다는 표현이 더 옳을 것이다. 대중들이 가진 선거권 즉, 투표의 힘이 점차적으로 강해졌기 때문이다.

예술가들도 마찬가지로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권위를 내려놓고 대중들의 선택을 받기 위해 거리로 나섰다. 실내에서만 그림을 그리던 관행을 탈피하고 캔버스를 들고 세상으로 나오게 된 것이다. 오랜 기간 그들이 쌓아온 권위와 신비주의는 그 시절부터 철저하게 무너지게 되었다. 포스트 모더니즘 시대를 지나오며 대중들이 정치와 예술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점차적으로 높아졌으며 따라서 정치인과 예술가들은 이제 대중의 취향과 의사를 외면하고서는 자신의 뜻과 이상을 전혀 펼칠 수 없는 시대가 오게 된 것이다. 정치와 예술이 비일상의 영역에서 일상의 영역으로 들어오는 순간이었다. 

조금 극단적으로 표현하자면, 이제 대중들의 선택을 받지 못하는 정치인과 예술가는 이제 그 존재의 이유조차 없어지게 된 시대가 온 것이다. 사실 예술의 경우에는 설령 예술가가 대중의 선택을 전혀 받지 못한다고 해도 꾸준히 자신의 예술 활동을 취미생활로라도 홀로 이어갈 수는 있다. 하지만 정치는 전혀 그렇지 않다. 정치 활동은 단 한명일지라도 자신을 제외한 타인의 동의가 없는 상태에서는 아예 시작조차 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개인이 취미로 하는 정치활동”이라는 것은 존재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물론 혼자서 하는 정치 참여나 정치 비평 등은 가능할 수 있겠지만, 순수한 의미의 정치 그 자체를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자신 이외의 인간들에게 공감과 동의를 얻어야 한다. 인간과 인간을 잇고 인간들 사이의 소통능력으로 만들어 내는 하나의 예술, 그것이 바로 정치의 본질인 것이다.

정치와 대중 예술의 본질은 유사하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정치와 예술의 본질이 비슷하고 시대의 흐름에 따라 전달 방식을 달리 한다고 했을 때 지금 이 시점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예술은 이미 오래 전부터 콘텐츠화 되어 시장에서 사고 팔 수 있는 하나의 상품이 되었다는 점이다. 그래서 많은 예술 콘텐츠 제작자들은 대중들의 취향을 알아내기 위해 대중들과 직접 소통하고 그들의 의견을 메모하고 시장에서 팔 수 있을 만한 콘텐츠를 제작하고 유통하고 있다. 혹자는 이러한 현상을 “예술의 상품화 현상”이라고 비판하지만 사실 자유시장경제에서 예술품과 콘텐츠를 사고파는 현상을 부정하는 사람들은 아직도 그 옛날 모더니즘 시대의 관점에서 예술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기에 너무나도 구시대적이라 할 수 있다. 어쨌거나 그렇게 권위를 내려 놓으며 예술은 다양성을 확보할 수 있었고 그것이 곧 예술의 발전으로 이어졌다. 정치에도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예술이 권위를 내려놓고 대중들과의 소통을 시작했듯이 이제 정치도 그런 분위기로 흘러가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정치도 이제는 예술이 변화한 것과 마찬가지로, 대중들의 동의를 얻기 위한 방식이 과거와는 완전히 달라져야 한다.

정치는 인간이 대중을 상대로 하는 최고 난이도의 예술이라는 전제 아래에서, 정치를 하나의 문화콘텐츠 사업이라고 가정해 봤을 때, 문화콘텐츠의 하위 분야인 대중음악과 정치 사이에서 몇 가지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 첫째로, 대중들에게 자신이 가진 이념과 정책을 알리고 그 과정을 통해 지지층을 확보해 그 세력을 기반으로 활동을 해나가는 것이 정치라고 했을 때, 가수가 창의성을 발휘해 노래를 만들고 그 노래를 대중에게 알리고 홍보하며 대중들을 직접 만나기 위해 각종 행사를 다닌다는 점에서 정치와 대중음악은 상당히 비슷하다. 둘째로, 지지하는 정치인을 따라다니고 지지하는 정치인의 이념을 보고 배우고 동조하는 세력이 존재하듯이, 가수들의 경우에도 그들의 노래를 듣고 콘서트에 기꺼이 동참하는 등의 활동을 하는 팬클럽이 존재한다는 점에서 정치인과 지지층의 관계는 가수와 팬클럽의 관계와 비슷하다.

그러나 현재 한국의 보수우파 정치와 대중음악 사이에는 앞서 언급한 유사성 이외에 결정적인 차이들이 존재한다. 그리고 바로 그 차이들이 오늘날 한국 보수의 몰락을 불러왔다. 먼저, 가수들은 적어도 자신이 추구하는 주력 장르가 있다. 힙합이면 힙합, 댄스면 댄스, 트로트면 트로트 등 자신이 좋아하고 잘하는 장르를 중심으로 곡을 쓰고 활동 하는 가수들에겐 대중들에게 어필하기 위한 자신만의 뚜렷한 색깔이 있다.

그 장르와 색깔은 가수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동시에 해당 장르를 좋아하는 대중들을 팬클럽으로 형성하게 하는 가장 중요한 요인이 된다. 아무리 그 가수가 좋다고 해도, Rock을 하던 가수가 트로트를 들고 나온다면 팬들은 바로 다른 가수를 찾아 떠나기 마련이다. 왜냐하면 대중음악 팬들은 음악에 대한 나름의 주관과 최소한의 식견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자신들이 좋아하는 장르를 불러주는 가수들을 알아보고 그들에게 더 큰 매력을 느끼기 때문이다.

하지만 국내 보수 정치는 이러한 점을 간과하고 있다. 현재 대한민국의 보수 정치에는 장르가 없다.  정치인이 가진 뚜렷한 이념적 색깔이 없다는 것이다. 자신이 좌파든 우파든 일단 대중들이 좋아하고 환호할 만한 요소는 무작정 가져다 쓰고 있다. 스스로를 보수 정치인이라 말하면서 지방 선거 공약으로는 무상급식을 내놓은 김태호 자유한국당 의원이 그런 예를 잘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 보니 확실한 지지층이 생기지 않는다. 그리고 대중들이 대중음악에 대한 관심이 큰 반면에 정치를 바라보는 국민들 역시 마찬가지로 자신이 어떤 이념을 좋아하는지 어떤 정책을 선호하는지에 대한 이해도가 전혀 없다. 정치에 무관심한 국민들이 너무나도 많은 것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장르 즉, 이념을 중심으로 사람들이 모이고 지지세력이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어떤 한 인물을 중심으로 세력이 형성되고 그 인물이 내놓는 정책이 어떠한 이념적 색채를 띠더라도 무조건적으로 옹호하고 지지한다. 어떠한 인물이 좌파적 정책을 펼치든 우파적 정책을 펼치든 그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이 그저  맹목적으로 자신이 좋아하는 인물만을 추앙하고 있다.

정치 소비자가 외면한 보수 우파의 몰락

모더니즘 시대 이후로 사조를 형성했던 포스트 모더니즘 조차도 이제 국제적으로 서서히 막이 내려지고 있는 지금까지도 한국의 정치판은 한 인물과 그 인물을 추종하는 세력들을 중심으로 모든 것이 이뤄지고 있다. 박빠 문빠 홍빠 황빠 이빠 김빠 조빠 등등 특정 한 정치인물 중심으로 각자의 세력이 형성되어 있고 그 세력은 그 인물들을 우상으로 여기고 그들을 추앙하고 따르며 각자의 세력을 확장하고자 애를 쓴다. 인물이 많은 만큼 그 지지세력도 마찬가지로 다양하다보니 지지층 간의 불필요한 다툼도 잦다. 각각의 세력들이 서로 다른 세력들과 하루에도 수 십, 수 백 차례 씩 온라인과 오프라인 공간에서 무의미한 전쟁을 치르고 있다. 정치권의 인물들이 서로 조금이라도 대립하는 양상을 보이면 그들의 빠들은 정책에 상관없이 우선 그 인물을 옹호하고 감싼다. 

그러나 만약 같은 당 내부에 최소한 비슷한 이념을 가졌거나 같은 정책 방향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주축이 되어 모여 있었다면 어땠을까? 아마도 그들은 그 이념을 중심으로 자연스럽게 동지의식을 가지게 되었을 것이고 그 동지의식에 의해 정당을 운영하며 비교적 수월하게 하나가 되었을 것이다. 지금처럼 아무런 구심점도 대책도 없이 그저 서로 밟으려고만 하는 정치 세태와는 분명히 달랐을 것이다. 그렇지만 현재 보수 정치판에는 인물만 가득하고 이념이 부재하다보니 각 인물들 간에 끈끈한 동지애가 전혀 형성되지 못하고 있다. 지지세력들 역시 하나가 될 구심점을 전혀 찾을 수 없기 때문에 서로 화합할 수도 없다. 이념이라는 구심점이 없기 때문에 그렇다.

보수우파는 이런 이유에서 몰락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어찌 보면 이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결과다.  보수의 이념이 잘못 되어서, 새로운 안보관을 따라가지 못해서 보수우파가 무너지고 있다고 말했던 김성태 자유한국당 의원의 발언은 그래서 완전히 틀렸다. 맥을 잘못 짚어도 한참은 잘못 짚은 것이다. 보수의 이념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보수의 이념이 제대로 서지 않은 것이 문제다. 안보관 역시 갈팡질팡 하며 그저 좌파들의 발목만 잡는 식이 되어 버렸으니 우파 지지자들도 그들을 외면할 수 밖에 없었다.

지금까지도 인물을 중심으로 당을 움직이고 지지자의 마음을 움직이겠다는 그들의 생각은 완전히 낡아빠진 모더니즘 시대의 유물인 것이다. 한국은 모더니즘과 포스트 모더니즘의 전환이 유럽이나 미국의 그것보다 상당히 압축적이었다. 경제의 성장 속도가 압축적이었던 만큼 사조의 전환도 너무 빨랐기에 그 속도에 맞추지 못한 정치인들은 아직도 1, 2차 세계대전 시기에 유행했던 정치 스타일을 추구하고 있다. 이제 변할 때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보수우파가 이제껏 인물 중심 정치로 잘 연명을 해온 것은 사실이다. 그 마지막 정치인이 박근혜였다. 그러나 박근혜 이후로 우리는 또 다시 그녀를 대체할 인물을 찾는 것에만 급급했고, 대선과 지방선거에서 참패한 원인과 문제점을 파악하지 못한 채, 또 새로운 인물을 찾아야 한다는 말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고 있다. 하지만 더 이상 인물 중심으로는 그 답을 찾을 수 없다는 현실을 이번 지방선거와 지난 대선을 통해 우리의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을 했다. 패배의 원인을 제대로 분석하지 못했기에 아직도 영웅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모더니즘과 포스트 모더니즘 그리고 포스트 모더니즘 그 이후를 바라보고 있는 지금 이 시대에 대한 이해도가 완전히 없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들이다.

우파의 영웅은 인물이 아니다. 우파의 영웅은 다름 아닌 “바로 잡힌 이념”이다. 그리고 우파의 이념이 영웅이라면, 우파의 이념에 맞는 우파적 정책은 그 영웅이 사용하는 무기다. 작은 정부, 낮은 세율, 힘의 외교, 공공부문 개혁, 시장경제, 교육 자율화 등 우파의 이념에 맞는 우파의 정책이 바로 영웅의 무기인 것이다. 그러나 지금 한국의 보수에게는 영웅도 무기도 없다. 우파의 이념과 우파적 정책을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들다. 솔직히 말해 더불어민주당의 정책과 현재 자유한국당의 정책을 동시에 놓고 보면 누가 좌파인지 누가 우파인지를 구분하기가 힘들 지경이다. 우리는 지금 이념이라는 영웅을 우리의 바로 눈앞에 두고도 그것을 찾을 생각을 하지 못하고 엉뚱한 곳에서 영웅을 찾고 있다. 새로운 인물이 나타나 우리를 구원해주기만을 기다리며 보름달 아래에 물을 떠놓고 기도를 드리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아직까지도 보수는 재건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답은 가까이에 있다. 한국의 예술은 이미 그 답을 찾아 세계를 향해 퍼져 나가고 있다. 정치와 예술의 본질이 유사하다는 점에서 보수우파는 예술이 나아간 길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시대의 흐름에 맞게 인물 중심에서 이념 중심으로 생각의 전환이 가능하다면 보수우파도 분명 새로운 활로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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