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 조선의 잡지... 18~19세기 서울 양반의 취향
[신간] 조선의 잡지... 18~19세기 서울 양반의 취향
  • 김민성 미래한국 기자
  • 승인 2018.07.17 0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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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양반의 사소한 일상과 사회 풍조를 들여다보는 생활사

조선시대 최초의 세시풍속지인 유득공(柳得恭, 1748~1807)의 『경도잡지(京都雜志)』는 18~19세기 서울 지역의 풍속과 양반의 생활상을 저술한 책이다. 제1권 [풍속] 편, 제2권 [세시] 편으로 구성된 『경도잡지』는 각각 19개 항목으로 나뉘어져 있다. 

대표적인 실학자 중 한 명인 유득공은 그 자신이 서울 출신인데다 양반층의 일상생활을 가까이서 접하거나 경험했던 만큼 『경도잡지』에서 당시의 풍속과 세시를 있는 그대로 생생하게 기록하고 있다. 

책 제목에 ‘잡지(雜志)’를 붙인 것만 봐도 짐작할 수 있듯이, 『경도잡지』는 특정한 기준에 맞춰 항목을 구분하지 않고 군더더기 없이 짧게 핵심만 서술되어 있다. 
그럼에도 이후에 나온 김매순(金邁淳, 1776~1840)의 『열양세시기(洌陽歲時記)』, 홍석모(洪錫謨, 1781~1857)의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와 함께 우리나라 3대 세시풍속기 중 하나로 손꼽힐 만큼 민속사적 측면에서 중요한 저작이다. 

이 『경도잡지』에는 서문이나 발문이 없다. 유득공이 『경도잡지』를 왜 서술했는지 직접 밝히지 않은 만큼 집필 동기와 그 내용을 미루어 짐작할 수밖에 없다. 17세기 중엽 이후 조선에는 변화와 개혁을 주장하는 새로운 사상 조류가 생겨났는데, 바로 실학사상이다. 

유득공 역시 홍대용, 박지원, 이덕무, 박제가 등과 더불어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실학자(북학파)로 손꼽히는 인물이었다. 이들은 이전의 관념론적 성리학에서 벗어나 나라 밖의 선진 문물을 받아들이고 실용성과 효용성을 우선시하며 산업의 활성화를 도모했다. 

그런 관점에서, 즉 당시의 사회 변화를 정확히 읽을 수 있는 생활사 자료가 바로 『경도잡지』다. 그런 만큼 제대로 된 평가가 이루어져야 하고 원전 텍스트를 새롭게 해석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경도잡지』 [풍속] 편의 19개 항목을 토대로 한 이 책은 원전의 의미에 조금이나마 더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조선의 잡지’라는 제목을 붙였다. 

또한 현대의 독자들이 좀 더 편안하게 읽을 수 있도록『경도잡지』에 나온 항목의 순서를 따르지 않고 19개 항목을 4개 장에 나누어 정리했으며, 각 항목의 시작 부분에 해당 원문을 번역하여 실었다. 


이 책의 저자인 진경환은 그동안 전통문화를 공부하고 강독했으며 조선시대 생활사를 누구나 쉽고 재미있게 접할 수 있는 대중교양서로 서술해보고 싶다는 생각에 오랫동안 사로잡혀 있었다. 

그러던 중에 『경도잡지』 [풍속] 편을 접하게 되었는데, 기존에 출간되거나 인터넷으로 서비스되고 있는 내용들 중 많은 부분에서 심각한 오류들을 발견했다. 이에『경도잡지』내용 번역의 오류 문제들을 글로 지적했지만 별달리 수정,보완되지 않은데다 고전 텍스트의 번역과 주석의 방식에서 한 번쯤 생각해볼 수 있는 새로운 예시를 보여주고 싶다는 마음에서 이 책을 집필하게 되었다고 한다. 

사실 이 책의 원전인 『경도잡지』는 핵심만 짧게 서술되어 있기 때문에 관점에 따라 단어 하나도 여러 논란과 주장을 낳을 수 있다. 번역은 제각각, 해석은 동서남북인 부분도 있다. 그런 만큼 당시 양반들의 의식주부터 취미와 놀이, 유흥과 공부, 그리고 의례까지 잘못 전해진 부분이 적지 않다. 

오늘날 우리가 머릿속에 그리고 있는 조선시대 양반의 모습은 어떠한가? 머리에 상투 틀어 갓 쓰고, 아랫사람들에게 호통치고, 서책만 끼고 앉아 멋이라곤 찾아볼 길 없고, 가난하여 끼니를 때우지 못해도 남에게 절대 굽실거리지 않고 꼿꼿하기가 이를 데 없는…… TV 사극이나 영화 등에 등장하는 양반의 모습이 전형이라고 여기고 있지는 않은가? 그렇다면 이 책을 통해 왠지 낯설고 어색해 보이지만 친근한 듯하고, 여전히 격식에 얽매이면서도 이전보다는 개인적인 욕망이 강해져가는 새로운 양반의 모습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은 조선시대 양반의 차림새, 그중에서도 남성 양반의 쓰개부터 살펴본다. 복건, 방관, 정자관, 동파관 등 그 종류도 다양한데 제각각 때와 장소에 따라 구분하여 썼다고 한다. 그중 검은 헝겊으로 위는 둥글고 삐죽하게 만들고, 뒤에는 넓고 긴 자락을 늘어지게 대며, 양옆에는 끈이 있어서 뒤로 돌려 매개 한 쓰개인 복건은 크게 두 가지 관점이 대립하고 있다. 우선 주위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한가로이 노닐 때 복건을 착용한 것으로 보이는데, 퇴계 이황은 복건을 중들이 쓰는 두건과 같아서 선비나 학인이 쓰기에 적절치 않다고 했다. 그런데 오늘날 천원권 지폐에는 복건 차림을 한 이황의 초상이 들어 있다. 

이는 사상·문화사적으로 깊이 따져보아야 할 문제라고 이 책의 저자는 말한다. 한편 정약용은 복건이 중국 진나라 때부터 사부의 복장이 되었고 주자에 이르러 예복이 되었으며 송대에 이르러 유학자들 사이에 널리 퍼지게 되었다고 언급했다. 

복건의 제작 방법을 당파와 관련하여 설명한 연구도 흥미로운데 이황이 복건을 중의 모자라 하고 대신 정자관을 쓴 이후로, 남인들은 이황의 선례에 따라 200년 가까이 복건을 착용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초상화를 보면, 남인인 허목이 복건과 심의를 착용한 것이 발견되고 있어 일률적으로 단정해 말하기는 어렵다. 

이외에도 복건이 조선시대에 주자학이 전래되면서 유학자들이 유가의 법복으로 숭상하여 착용했지만, 그 모습이 매우 괴상하여 일반화되지는 못했고 소수의 유학자들에 의해서만 조선 말기까지 이어졌다는 주장도 있다. 이처럼 쓰개 하나에도 다양한 관점과 주장이 상존하며 반드시 바로잡아야 할 잘못도 있다. 

흔히들 『천자문』을 한자 학습용 교재로 여기는데, 이는 아주 잘못된 생각이다. 네 자 두 구를 한 문장으로 모두 125개 문장인 『천자문』은 원래 산문으로 지어졌지만, 이후에 다시 운을 넣어 사언고시 형식으로 편찬되었다. 또한 『천자문』은 동아시아 고전의 주요 테마인 문·사·철을 모두 담고 있다. 

오랫동안 전통적인 한자 교재로 활용되어온 『동몽선습』과 『격몽요결』이 인간의 기본 덕목인 오륜을 중심으로 철학적 내용이 집약되어 있고, 『훈몽자회』가 초학자에게 한자를 가르치고 익히는 데에만 초점을 맞추었다면, 『천자문』은 문장 구성이 시적이고 역사, 천문, 지리, 인성 등 거의 모든 분야를 망라하고 있다. 따라서 학동들이나 초학자들에게 다양한 교양 지식과 표현법을 익히게 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전체적으로 학동들이 읽기에는 내용이 조금 어렵다는 비판도 있다. 그럼에도 『천자문』은 오랫동안 기초 학습 교재와 입문서로 활용되어왔다. 

남들보다 더 고급스러운 것, 더 값비싸 보이는 것, 더 특별한 것을 갖고 싶다는 사람의 욕망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다. 18~19세기 서울 양반들도 마찬가지였다. 의식주에 소용되는 것들부터 주로 여성들이 지닌 노리개나 패물, 말, 집, 혼례, 담배, 문방사우, 꽃과 나무 등 명품을 선호하고 유행을 좇다 보니 양반 사회의 사치 풍조가 절정에 다다랐다. 그러한 세태를 비판하거나 일침을 가하는 목소리도 함께 터져 나왔다. 이는 곧 신분제 사회가 무너지고 개인의 행복을 더 중시하는 근대사회로 나아가는 전조이기도 했다. 

칼은 사치스러운 패물이었다. 여성이 정절을 지키는 데 사용한 것으로 잘 알려진 은장도 역시 노리개 중 하나였다. 장도의 칼자루와 칼집을 만드는 데 쓰인 재료로는 은뿐 아니라 옥, 코뿔소의 뿔, 바다거북의 등딱지, 검은 물소 뿔 등 국내에서 생산되지 않는 희귀한 상품들이었다. 

견마잡이들도 덩달아 허세를 부려 더 좋은 고삐를 가지려 했다. 질 좋은 매끈한 가죽으로 만들어 번쩍번쩍 광을 내고 거들먹거리고 다녔는데 ‘거덜 났다’는 말이 여기서 생겨났다. 견마잡이 주제에 우쭐하고 다니니, 그나마 알량한 재산이나 살림 같은 것이 여지없이 허물어지거나 없어진다는 뜻이다. 

혼례 때 신랑이 백마를 타고, 과거 급제자가 삼일유가를 치르는 것 또한 축하하는 의미를 뛰어넘어 당시의 허례허식 풍조가 얼마나 만연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어디 그뿐인가. 가문을 드러내기 위해 대문을 크고 높게 만들고 처마를 노송취병으로 치장하는가 하면, 서울의 호사가들은 여덟 칸짜리 비둘기 집(용대장)을 만들어놓고 누가 더 많이 희귀하고 값비싼 비둘기를 사들이냐를 놓고 경쟁했다. 체면 때문에 품위 없이 쌈지 따위를 갖고 다닐 수 생각한 양반들은 쇠로 만든 담배합에 은으로 매화나 대나무를 장식하고, 자줏빛 나는 사슴 가죽으로 끈을 달아 담뱃대와 함께 말꽁무니에 달고 다니면서 멋을 부렸다. 

담뱃대를 걸어놓는 연관대, 담뱃대를 청소하는 찔개와 꼬질대, 담배를 빤 후 침이나 가래를 뱉는 그릇인 타구나 재떨이 등도 명품을 추구하는 양상이 심화되었다. 

사는 곳이 어디냐에 따라 먹고 마시는 풍속도 달랐다. 북촌에는 부귀한 집이 많아서 음식 사치가 대단했는데, 갖은 편이라고 하는 떡 만드는 솜씨가 발달했다. 반면 남산 밑에는 구차한 샌님과 형편이 넉넉지 않은 무반들이 사는 곳이라서 손쉽게 얼근하여 불쾌한 것을 잊자는 데서 술 빚는 솜씨가 좋았다는 것이다. 

양반들의 명품 선호와 함께 특정한 것에 매달려 즐기는 마니아들도 등장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웰빙 붐을 타고 크게 성행한 화훼 재배와 정원 경영이었다. 같은 꽃이라도 특이한 품종과 양태에 관심을 가졌으며 남들과 다른 것을 갖고 싶어 했다. 마니아들이 애호한 것들 중 하나인 비둘기 역시 그 색깔이며 생김새, 그리고 습성에 따라 가격도 천차만별이었다. 작은 몸집에 순백색으로 이마에는 검은 화점 하나가 있는 점모가 제일 비쌌는데 한 쌍에 백 문(1,000전)이 넘기도 했다고 한다. 또한 조선 후기의 문인인 이옥은 스스로 담배를 몹시 사랑하고 또 즐긴다며 자신에게 담배벽이 있다고 했다. 

이렇듯 조선 후기에는 꽃이나 나무, 애완동물, 담배, 악기 같은 것은 물론이거니와 칼, 과일, 그림, 수집품, 표구 등에 깊은 관심을 가진 마니아층도 있었다. 조선 후기, 특히 18~19세기는 권위적이고 형식이 지배하던 시대에서 개인의 취향과 행복이 더 중시되는 시대로 넘어가는 시점이었다. 

왕조시대의 종말과 양반의 몰락이라는 거대한 시대적 흐름은 언뜻 사소해 보이지만 너무 가까워서 쉽게 느껴지지 않는 일상적인 변화와 함께 서서히 격랑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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