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100주년 남북공동사업 어떻게 볼 것인가?
3·1운동 100주년 남북공동사업 어떻게 볼 것인가?
  • 이주천 자유민주학회 회장
  • 승인 2018.07.25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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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대통령은 7월 3일 서울시 중구 ‘문화역서울 284’(옛 서울역사 공간)에서 열린 ‘3·1운동 및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사업 추진위원회(아래 3·1운동 사업추진위)’ 출범식에서 격려사를 통해 “남과 북이 독립운동의 역사를 함께 공유하게 된다면 서로의 마음도 더 가까워질 수 있을 것”이라며 ‘남북공동사업’ 구상을 3·1운동 및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사업 추진위원회에 주문했다. 70년을 이어온 남북분단과 적대관계로 인해 독립운동의 역사도 갈라놓았으니, 남북공동사업을 통해 역사를 하나로 통합하는 일부터 하자는 취지이다.

“남과 북이 독립운동의 역사를 함께 공유하게 된다면 서로의 마음도 더 가까워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위원회에서, 남북이 공동으로 할 수 있는 사업까지 구상해주실 것을 당부 드립니다.” 문재인 정부는 남과 북이 독립운동의 역사를 공유하자고 제안했지만, 기대와 달리 북한은 3·1운동을 보는 역사적 해석과 입장이 우리와 전혀 다르다. 북한은 3.1운동을 ‘3·1 인민봉기’라고 칭하며 김일성의 아버지 김형직이 다녔던 평양 숭실학교(현 숭실대학교의 전신) 청년학생들이 주도한 혁명이라고 칭하고 있다.

“3·1 인민봉기의 불길은 먼저 평양과 서울에서부터 타올랐다. 평양에서는 우리나라 반일민족해방운동의 탁월한 지도자이신 김형직 선생님의 혁명적 영향을 받은 평양숭실중학교의 애국적인 청년학생들이 주동적인 역할을 놀았다.” [조선력사(고등중학교 제4학년용), 교육도서출판사, 2000, p.113].

하지만 정작 김형직은 숭실학교를 중퇴했을 뿐이고, 오히려 항일단체 ‘조선국민회’ 활동으로 인해 1918년 평안남도의 일경에게 체포되었다가 중강진으로 이사해 평양의 3·1운동에는 참가하지도 못했다. 김일성도 <세기의 회고록>에서 아버지를 따라 짚신을 벗어서 손에 들고 독립만세를 외쳤다고 하며, 만경봉에 올라가 나팔을 불고 북을 치며 저녁까지 계속 독립만세를 불렀다고 선전선동하는데, 이때 김일성(1912년생)의 나이 8세에 불과하기에 나라 현실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를 나이인데 이런 만세운동의 참여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조작과 거짓말이 가득 찬 그의 회고록은 신빙성이 희박하다.

“아버지가 집을 떠난 지 얼마 안되여 3·1인민봉기가 터졌다. 3·1 인민봉기는 일제의 10년간의 야만적인 《무단통치》하에서 모진 수모와 학대를 받으며 살아온 조선민족의 쌓이고쌓인 울분과 원한의 폭발이였다...(중략)...3월 1일 평양에서는 낮 12시에 종소리를 신호로 수천명의 청년학생들과 시민들이 장대재에 있는 숭덕녀학교 운동장에 모여들어 《독립선언서》를 랑독하고 조선이 독립국가라는 것을 엄숙히 선포한 다음 《조선독립 만세!》, 《일본인과 일본군대는 물러가라!》는 구호를 웨치면서 격렬한 가두시위를 벌리였다...

그때 여덟살이였던 나도 다 꿰진 신발을 신고 시위대렬에 끼여 만세를 부르면서 보통문앞에까지 갔다. 성안을 향해 노도와 같이 밀려가는 어른들의 걸음을 나로서는 미처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어떤 때는 너덜거리는 신발짝이 거치장스러워 짚신을 벗어서 손에 들고 뜀박질로 대렬을 따라갔다.”[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중 제1장 ‘비운이 드리운 나라’ 제3절 ‘독립만세의 메아리’]

문재인 대통령은 ‘3·1 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 출범식에서 남과 북이 독립운동의 역사를 공유하게 된다면 서로의 마음도 더 가까워질 수 있을 것이 라고 말했다. / 연합
문재인 대통령은 ‘3·1 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 출범식에서 남과 북이 독립운동의 역사를 공유하게 된다면 서로의 마음도 더 가까워질 수 있을 것이 라고 말했다. / 연합

3.1운동의 실체를 날조하는 북한

북한은 3·1운동의 실패 원인에 대해서도 우리와 견해가 전혀 다르다. 북한은 3·1운동의 지도부의 나약성과 비폭력·무저항주의를 실패의 주요 책임으로 보고 있으며, 또 탁월한 수령인 김일성의 영도력과 조선공산당의 영도를 받지 못했기에 실패했다고 본다. 북한이 3·1운동을 평가하는 유일한 점은 ‘김일성 수령체제’의 前史(전사)로서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김일성의 나이가 불과 8세였는데 어떻게 영도력이 가능하며 3·1만세운동 당시는 조선공산당이나 이와 비슷한 좌익계열의 사회·공산당이 거의 존재하지 않을 때였다. 또 일제의 가혹한 탄압이 미제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고 있다고 하여 역사적 사실과 전혀 다른 왜곡을 하고 있다. 일본은 승전국 중 일원이었고, 영일동맹으로 영국과 우호관계를 존속시켰지만, 만주에 대한 침략 야욕을 드러냈고 산둥반도의 독일조차지를 점령함으로써 아시아에서 미국의 이해관계와 정면 충돌해 미국과 외교관계는 악화일로에 있었다.

“3·1 인민봉기는 미제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은 일제의 가혹한 탄압에 의하여 결국 목적을 이룩하지 못한 채 실패하고 말았다. 3·1 인민봉기가 실패하게 된 가장 큰 원인은 이 운동이 탁월한 수령, 혁명적인 계급과 혁명적인 당의 령도를 받지 못한 데 있었다. 3·1 인민봉기가 실패한 다른 하나의 원인은 부르죠아민족주의자들의 계급적 제한성과 숭미사대주의에 있었다.”(조선력사(고등중학교 제4학년용), 평양: 교육도서출판사, 2000, p. 116).

당시 3·1운동을 전후로 국제 정세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1차 세계대전 당시 우드로 윌슨 대통령은 연두교서에서 미국의 전쟁 참전 명분으로 전후 세계에서 식민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민족자결주의를 제창했으며 이 선언은 제3세계의 독립운동가들에게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고 독립운동의 기폭제 역할을 했다. 우리 독립운동가들도 1차 세계대전 종결 후 파리에서 열린 베르사이유 강화회의에서 재천명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가 약소국의 독립을 가져올 것으로 희망했었다. 이에 강화회의의 대표단으로 김규식이 파견되기도 했으나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어쨌든 3·1운동 지도부는 비폭력·무저항주의에 입각한 평화적 시위와 전승국 열강에의 독립 청원을 통해 독립을 달성하고자 했다.

3·1 만세운동이 실패한 뒤, 중국 상해에서 조직된 상해임시정부를 북한은 어떻게 기억하고 있나? 북한은 임시정부를 매우 부정적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다. <조선역사> 책에서는 임시정부를 권력투쟁이나 일삼는 분열과 독립을 구걸하는 사대주의, 독립운동이란 명분으로 동포의 돈을 착취하는 부패의 온상으로 파악한다.

“한편 해외에 있던 부르죠아민족운동의 상층부들은 1919년 4월에 중국 상해에서 이른바 《림시정부》라는 것을 꾸며내고 그 안에서 《자치파》니, 《독립파》니 하는 파벌을 이루고 권력싸움을 벌리였다. 이와 함께 그들은 큰 나라들에 조선이 독립하게 해달라고 구걸하러 다니는 사대주의망동도 부리였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독립운동자금》이라는 이름으로 숱한 돈과 값진 물건을 동포들로부터 빼앗아 저들의 배를 채웠다. 이처럼 부르죠아민족운동 상층분자들의 부패타락과 매국배족행위는 독립군운동의 와해와 함께 나라 부르죠아민족운동의 쇠퇴몰락을 가져왔다.” [조선력사(고등중학교 제4학년용), 평양: 교육도서출판사, 2000년, pp. 118-120].

북한이 3·1운동이나 상해임시정부를 계급투쟁 관점에서 부정적으로 인식하는데, 문재인 정부는 어떻게 남북이 합동으로 기념사업을 전개해 독립운동사를 하나로 통합하는 일이 가능하다고 보는가? 더구나 북한은 올해 김정은 신년사에서도 밝혔듯이 ‘창건 70돌’을 강조하고 있기에, 문재인 정부의 1919년 건국론과는 전혀 다른 역사 인식을 가지고 있다.

“올해 우리는 영광스러운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창건 70주년을 맞이하게 됩니다. 위대한 수령님과 위대한 장군님의 최대의 애국유산인 사회주의 우리 국가를 세계가 공인하는 전략국가의 지위에 당당히 올려 세운 위대한 인민이 자기 국가의 창건 70돌을 창대히 기념하게 되는 것은 참으로 의의 깊은 일입니다.” (김정은 2018 신년사).

위의 신년사에서 알 수 있듯이, 북한은 ‘공화국 70년’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이점에서 ‘대한민국 70년’의 기억을 지워버리고 중국의 임시정부만 내세우려는 몰지각한 문재인 정부와 건국에 대한 인식이 전혀 다르다. 이런 엄청난 역사적 간격을 어떻게 메우려고 무작정 남북한이 만나자고 하는가?

공유될 수 없는 남북한 건국역사, 문재인 정부의 ‘우리끼리’(?)

문재인 정부가 이러한 북한의 역사 인식이 다르다는 점을 모를 리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에게 자꾸 접촉하려는 의도는 다분히 정략적이고 다목적이다.

① 4·27판문점회담에서 연출된 ‘민족공조’, ‘우리끼리’ 분위기를 유지하기 위해서 지속적인 이벤트 행사(학술, 연예, 체육) 등이 불가피하다. 권력의 입장에서 볼 때, 4·27 이후 광풍처럼 몰아닥친 ‘한반도 평화’라는 무드가 2020년 총선까지 지속되어야 한다. 지각 있는 국민이라면 잘 알겠지만, 4·27 판문점회담 이후 싱가포르회담까지의 두 달간 북풍으로 6·13 지방선거에 여당의 압승으로 문재인은 트럼프와 김정은에게 엄청난 신세를 졌다. 트럼프에게는 외상으로 천천히 갚을 수 있지만, 김정은에게는 급전(急錢)이라도 빌려 갚아야 한다. 그만큼 북한의 경제 사정이 어렵기 때문이다. USB의 전달은 이제 막 시작일 뿐이다. 그래서 무엇이든지 행사를 마련해 북에 성의를 보여야 할 필요가 있다.

② 건국 100주년 기념사업의 전단계 작업이다. 3·1운동 이후 4월 11일, 일부 독립운동가들이 중국에서 상해임시정부를 수립했는데, 이것으로 이미 나라가 건국되었다는 주장이다. 그렇다면 문재인 정부는 1948년 8월 15일에 건국된 대한민국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역사 개조작업을 추진하고 있다. 건국을 1919년 상해 임시정부 수립 시점으로 끌어올리겠다는 것이다. 이것은 사람의 생일을 속이는 파렴치한 행위와 유사하다.

③ 국내에서 북한의 비핵화를 중심으로 한 안보 논쟁을 희석화시켜서 북한에게 숨통을 틔게 해주고, 북한에 독립운동의 역사를 공유하자고 제안한 바, 이는 ‘반일민족주의’ 공동전선을 의도한 바에 다름 아니다.

1948년 8월 이후 남북한은 각자 개별적인 가치관과 상이한 역사 인식 속에서 전혀 다른 적대적 이념을 기반으로 독자적 국가로 70년 동안 존재해 왔다. 그렇기에 두 국가가 과거의 역사를 하나로 통합하려는 발상 그 자체가 무모한 것이다. 세계사는 권력자가 역사를 함부로 ‘改作(개작)’하려고 좌지우지하려고 했다가 실패한 역사로 가득 차 있다, 이를 반면교사로 삼고 자중하는 모습을 보이기는 커녕, 문재인 정부는 브레이크 없는 광폭 질주를 계속하고 있다.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자랑하는 대한민국은 북한처럼 역사 개작을 최고존엄자가 마음대로 하는 나라가 되어서는 안 된다. 역사를 정치권력이 힘을 남용해 마음대로 개작을 시도한다면, 역사의 신은 그 결과에 대해서는 후일 준엄한 책임을 물을 것이다.

이주천 자유민주학회 회장

고려대 사학과, 미 인디아나대 대학원, 미 탬플대 졸업, 조지타운대 방문교수, 미주리대 객원교수, 뉴라이트 전국연합 대표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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