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국 70주년 기획 이승만을 말한다] 이승만 대통령, 독립과 건국을 위해 세계를 설득하다
[건국 70주년 기획 이승만을 말한다] 이승만 대통령, 독립과 건국을 위해 세계를 설득하다
  • 이인호 서울대 명예교수
  • 승인 2018.07.26 11:1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릴레이 인터뷰 이인호 서울대 명예교수

건국 70주년 기획 이승만을 말한다


"독립과 건국을 위해 세계를 설득한 사람"
 

- 이승만 대통령에 관해 가장 먼저 어떤 생각이 떠오르십니까?

우리나라가 독립된 민주국가로 우뚝 서는 데 가장 큰 공헌을 하신 분인데도 가장 낮은 평가를 받고 계신 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 우리 5천년 한민족 역사에서 이승만 대통령만이 할 수 있었던 가장 큰 기여는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대한민국이 민주공화국으로 건국될 수 있었던 것은 이승만 박사가 계셨기에 가능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물론 나라를 세우는 일은 혼자 하는 일은 아니지만, 비록 온 민족이 아무리 그것을 갈구하고 또 여러 독립 운동가들이 같이 분투했다고 하더라도, 결국 마지막에 국제적 공인을 받는 나라로 서느냐 못 서느냐 하는 것은, 그때 이승만 박사가 국제적으로 신망을 두텁게 쌓아 왔고 또 국제 정세에 대해 잘 알았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그분이 있었기 때문에 1948년 8월 15일 이 나라가 대한민국으로 새로 태어날 수 있었다고 봅니다.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왜곡된 평가는 언젠가는 바로 잡혀야 한다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왜곡된 평가는 언젠가는 바로 잡혀야 한다

대한민국 건국, 이승만을 빼고 논할 수 없어
 

- 이승만 대통령 본인의 애국애족 정신에 평점을 얼마로 할 수 있을까요?

저는 평점 99점을 매깁니다.

- 이승만 대통령의 기여에 비해 평가와 예우를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제가 이승만 건국대통령에 대한 우리의 평가가 잘못되었다는 데 대해 마음 아파하는 것은, 단지 한 인간으로서의 이승만이라는 사람에 대한 예우가 잘못 되었다는 차원이 아니라, 우리 국민들이 어떻게 이 나라를 되찾았고, 어떤 이상으로 이 나라를 세우고 발전시켜 왔는지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다는 점 때문입니다.

사실 45년 당시의 상황을 생각해 보면, 이승만은 우리 같은 약한 민족의 독립운동가일 뿐 돈도 조직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스탈린은 2차 세계대전의 전승 대국의 독재자로서 소련이라는 어마어마한 제국을 지배하던 실력자였습니다. 결국 미.소 양군이 38선을 중심으로 우리를 점령하는 불의의 상황을 맞게 되었지요. 그런 상황에서 이 박사는 적어도 남한만이라도 소련의 손에서 구해 내 독립국가로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싸웠어요.

당시 이승만이 스탈린의 적수가 됐겠습니까?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승만 박사는 미국 사람들을 교육시키고, 미국 사람들과 싸우고, 또 유엔의 다른 나라들을 설득해서 우리가 남북한 공동선거를 통해 새로운 나라를 세운다는 유엔의 결정을 어렵게 받아냈습니다. 그게 불가능해지자 그러면 적어도 남한만이라도 지켜내야 되겠다고 생각하고 독립국가를 만들었죠. 그런 면에서 저는 이승만 박사가 아니었으면 이 대한민국이 세워질 수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공산권에서는, 그리고 오늘날까지 북한에서는, 이승만 박사를 결코 용서할 수 없는 인물로 생각하고 이분을 매도하는 데 온갖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겁니다.

- 이승만 대통령은 대한민국 정통성의 뿌리이자 정체성의 뿌리인데 제대로 예우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 대해서 한 말씀해 주시죠.

지금까지 버젓한 이승만 대통령 기념관 하나 없다는 것은 우리 국민 전체의 수치입니다. 그것은 어떤 한 인간에 대한 예우가 바르지 못하다고 하는 그런 차원의 문제만이 아니고, 결국은 이 나라가 어떤 원칙 위에서, 어떤 고난의 과정을 겪어서 세워진 나라인가 하는 것을 우리 국민들이 망각하고 있으며, 그렇게 해서 배은망덕(背恩忘德)의 죄를 짓고, 그 결과 우리 스스로를 저평가하고, 국민들의 의식은 마비되어 있다는 걱정을 합니다.

이인호 서울대 명예교수
이인호 서울대 명예교수

이승만에 대한 왜곡된 평가 바로 잡혀야
 

- 더 안타까운 일은 일부 사학자들이 1919년 4월 13일 상해임시정부가 시작된 날이 곧 대한민국이 건국된 날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또 정부는 대한민국이 건국된 1948넌 8월 15일을 건국기념일로 정하지도 않고, 기념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건국일은 마땅히 국가의 명절인 건국절로 제정해서 온 국민이 경축해야 마땅한데도 그렇게 하지 않고 있는 현실에 대해서 한 말씀해 주시죠.

본래 ‘광복절’이라는 말은 1948년 8월 15일에 대한민국이 신생국가로 다시 태어났음을 기념하는 기념일이었어요. 그런데 6·25를 겪으면서 언론이나 정부 측에서 광복절을 48년부터 계산을 해서 경축하지 않고 45년의 해방과 혼동하는 일이 빚어지면서 광복절이 마치 1945년의 해방을 기념하는 날처럼 되어버린 것 같습니다.

사실 김대중 대통령 때만 하더라도 (1998년 8월에) 건국 50주년을 기념하는 기념우표까지 발행하면서 기념을 했어요. 그 후부터 잘못됐는데, 거기에는 또 연유가 없지는 않습니다.

해방 전까지는 ‘광복(光復)이라고 하면, 일제가 물러나면 우리는 독립을 다시 찾는다’는 의미에서 광복이라는 말을 썼어요. 그런데 불행하게도 해방은 되었지만 해방은 독립을 가져오지 않고 미·소 양군이 38선을 경계로 우리를 점령하는 불행한 사태가 발생했고, 그 다음에는 미·소 양국이 우리를 신탁통치하에 둔다는 합의를 했기 때문에, 우리는 독립을 위해 다시 투쟁을 해야만 했어요. 1948년 8월 15일 이전까지는 본래 의미의 광복이 아니었고, 1945년 8월 15일은 정확하게 말하면 해방(解放)이었습니다.

해방 기념일에 맞춰서 1948년 8월 15일에 대한민국 건국을 선포했던 것은 바로 3·1운동에서부터 임시정부로 이어지면서 해방을 맞았고, 그 후 3년간의 투쟁을 거쳐 드디어 대한민국이 태어난 것이 광복(光復)이었어요. 즉, 본래 광복절이란 말에는 독립이란 의미가 있었어요. 처음에는 광복절이 아니라 독립기념일이라 하려다가 3·1절, 개천절 등의 기념일과는 어감이 좀 다르기 때문에 독립기념일이라고 하기보다는 광복절이라 부르는 것이 낫겠다고 해서 광복절이란 말이 선택된 걸로 압니다. 그래서 1949년에는 광복 1주년이라 했고, 50년에는 광복 2주년이라고 했는데, 50년에는 우리 서울이 적진(敵陣) 하에 있어서 기념식을 하지 못했어요. 그런 과정에서 계산을 잘못하는 잘못된 관행이 들어오게 된 것이죠.

- 이사장님은 러시아, 핀란드 대사를 역임하신 외교관으로서 외교의 귀재, 외교의 달인이라고 평가받는 이승만 대통령의 외교 능력과 업적에 대해 말씀해 주시죠.

이승만 박사는 독립운동가로서 여러분과 힘을 합쳐 노력했지만 그 가운데도 특출했던 점은 국제 외교의 중요성, 즉 우리보다 강대한 힘을 가진 나라들이 우리를 도와주지 않으면 독립을 성취하기 어렵다는 점을 깨달았습니다. 우리 힘만으로 무장투쟁을 해서 일본을 넘어뜨린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지만, 결국은 일본이 실수를 하는 가운데 국제 여론이 우리에게 우호적으로 된다면 우리가 독립의 기회를 찾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그 부분에서 노력을 했습니다.

이를 인정 받아 일찍이 임시정부에서 임시대통령으로 선출됐고 그 후 대한민국이 건국되면서 4번이나 대통령에 당선됐던 것이죠. 그만큼 그 시대를 같이 살았던 사람들은 이승만 대통령의 노력을 알아줬습니다. 후대의 사람들은 북한 측의 거짓 선전에 속아 이승만 박사를 ‘4·19 때 불명예스럽게 물러났으니까 독재자’라고 하는 식으로, 심지어는 친일파라고까지 잘못 생각하는데 이야말로 엄청난 국민적 비극입니다. 창피하고 아주 불행한 일이죠.

이승만 박사의 반공(反共)은 자주독립이라는 원칙에서 나온 반공이었어요. 그분은 공산주의의 이상(理想)만은 높이 평가했던 분이에요. 그러니까 진보적 반공주의자였지요. 그런데 우리나라에선 그 후의 불행한 역사 때문에 반공주의자들은 보수, 그리고 친공(親共) 또는 용공(容共) 또는 친북(親北) 쪽은 진보인 것처럼 착각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전혀 진실이 아닙니다.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는 공산주의 독재체재를 물리쳐야만 된다는 원칙을 다시 상기해야 합니다.

- 이승만 대통령이 우리 민족사에 엄청난 기여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말년인 1960년 4월 19일에 학생운동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학생 186명이 희생을 당하고 수 천 명이 부상을 당합니다. 이런 불상사가 발생하자 이 대통령은 자유당의 총재로서 부정선거에 대한 책임을 지고 하야를 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도 한 말씀해주시죠.

이승만 박사는 사실 70세 고령에 귀국해 나라를 세웠는데 그 후 후계자가 될 만한 사람들 가운데는 이승만 박사만한 그런 포부나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없었죠, 그런 면에서 이승만 박사는 상당히 불행했다고 봅니다. 그분은 “공명선거 하시오” 하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습니다. 실제로는 그렇게 되지 못하고 부정부패가 만연하고 부정선거가 이뤄져 이에 대한 책임을 지고 물러났습니다. 그러나 이 대통령은 4·19 때 부정부패와 부정선거에 항의해 일어난 청년들을 극구 칭찬했어요. 그때까지 전체의 민도가 이 대통령이 바라는 수준까지 올라가지 못해서 그런 불행한 사태가 벌어졌지만, 그가 심어 놓은 민주주의의 싹들이 결국은 터서, 청년들이 잘못된 것을 지적하고 일어날 수 있게 되었다고 하는 것은 그분이 했단 사업이 그만큼 성공했다는 이야기지요.

특히 학생들이 희생된 것은 사후(事後)에 알았지, 본인이 알고 나서는 다른 희생이 전혀 없었어요. 부통령이 거취를 분명히 하지 않자 그때 교수들이 나와 대통령도 물러나라고 구호를 외치자, 민의가 그렇다면 물러나겠다고 하면서 물러난 분이에요.

그리고 또 한 가지 더하고 싶은 말은, 이승만 박사가 하와이로 망명을 갔다고 하는데, 그분은 망명을 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본인은 휴식차, 휴양차 하와이로 간다고 했어요. 나중에 군사정변이 일어나 군사정권 측이 그분의 귀국을 막았기 때문에 그것이 결국은 망명이 된 것이지, 본인이 물러날 때 국민의 뜻을 따라 자의로 물러나 휴양을 간 것이므로 망명이 될 수 없었어요.

대한민국사랑회 <이승만을 말한다>

본 기사는 시사주간지 <미래한국>의 고유 콘텐츠입니다.
외부게재시 개인은 출처와 링크를 밝혀주시고, 언론사는 전문게재의 경우 본사와 협의 바랍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