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시정부와 대한민국, 연속인가? 단절인가?
임시정부와 대한민국, 연속인가? 단절인가?
  • 박명수 미래한국 편집위원·서울신대 현대기독교역사연구소장
  • 승인 2018.08.07 1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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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한국 사회는 많은 갈등을 갖고 있다. 이념갈등, 지역갈등과 같은 오래된 갈등과 더불어 최근에는 역사 갈등도 심화되고 있다. 한국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역사 갈등의 핵심은 우리가 살고 있는 대한민국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점이다.

역사갈등의 시작

이 갈등은 80년대부터 시작된 소위 진보주의자들의 분단사관에서부터 출발한다. 이들은 해방은 친일·반공 세력의 방해 때문에 통일로 이어지지 못했고, 이것은 오늘 한국 사회의 모든 문제의 근원이며, 이런 분단의 극복이야말로 한국 사회의 최대 과제라고 본다. 이들은 이런 분단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좌우합작의 중도노선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역사 이해의 입장에서 보면 자유민주주의 반공국가 대한민국의 출현은 잘못된 것이며, 그 이후의 역사는 실패의 역사이다.

여기에 대항해 생겨난 것이 바로 건국사관이라고 불리는 새로운 입장이다. 이들은 80년대 말 진행된 동구권의 몰락을 보면서 남한에 민주주의 국가 대한민국이 세워진 것을 축복으로 본다. 이들에게 대한민국은 정치적으로 민주주의를 이룩하고, 경제적으로는 세계 10위권의 국가이며, 2차 세계대전 이후 가장 성공적인 나라이다. 여기에 비해 북한은 독재국가이며, 세계의 최빈국 가운데 하나이다. 그러면 이런 차이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그것은 해방 후 남한은 서구식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받아들였기 때문이요, 이런 국가의 기초를 놓은 사람이 바로 대한민국 초대대통령 이승만이다.

이렇게 건국사관이 새롭게 등장하고 있을 때, 소위 건국절 논란이 벌어졌다. 건국사관을 갖고 있는 소위 뉴라이트 인사들은 대한민국의 자랑스러운 역사를 기념하기 위해서는 1948년의 정부수립일을 건국절로 만들어 국민교육을 실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실 이것은 대한민국의 역사를 실패의 역사로 규정하는 분단사학자들에게는 매우 충격적인 내용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 같은 상황에서 등장한 것이 광복회이다. 이들은 오랫동안 임시정부에서 대한독립을 위해 노력한 분들이다. 이들에게 대한민국은 1919년 상해 임시정부에서 시작되었고, 그 후 이들의 독립운동의 핵심은 국제사회를 향해서 이 임시정부를 승인해 달라는 것이었다. 이런 사람들에게 1948년 건국절은 자신들의 노력을 부정하는 것이다. 이제 싸움은 1919년 건국을 주장하는 임시정부(김구) 세력과 1948년 건국을 주장하는 대한민국(이승만) 세력의 싸움으로 발전했다.

하지만 현재 벌어지고 있는 이런 논쟁은 역사적으로 타당한가? 과연 임시정부와 대한민국은 서로 대립하며, 이승만과 김구는 대척점에 서 있는가? 우리는 이 문제를 다루기 위해 두 가지 질문을 해야 한다. 첫째는 이승만을 중심으로 하는 대한민국의 건국세력은 과연 김구와 임시정부를 어떻게 생각했는가 하는 점이다. 결론부터 말한다면 이승만은 자신이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계승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둘째는 그러면 정말로 임시정부를 반대한 세력은 무엇인가? 한 마디로 임시정부가 수립될 때부터 줄기차게 임시정부를 파괴시키려 했던 것은 좌익세력이다. 필자는 여기에서 이 두 문제를 살펴보려고 한다. 특별히 해방을 앞둔 시점과 해방 직후에서 이 두 가지 문제가 전개되는 것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승만은 상해에 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대통령이었다. 하지만 이승만은 주로 미국에 있었고, 이것은 상해 임시정부 인사들에게 불만이 되었다. 그래서 그는 결국 1925년 임시정부에서 면직되었다. 이런 이승만이 다시금 임시정부와 관계를 회복한 것은 1941년이었다. 이 때 임시정부는 중경으로 이전했다.

1948년 vs 1919년 세력의 싸움

이승만은 오랫동안 국제사회, 특히 미국의 도움으로 대한민국의 독립을 이루려고 했다. 하지만 미국은 근본적으로 일본을 우호국가로 생각했다. 당시 대부분의 서구인들처럼 미국인들도 일본의 근대화에 경이를 표명하면서 찬사를 보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인들의 일본 비판은 먹혀들지 않았다. 하지만 1937년 중일전쟁이 벌어지자 상황은 바꿔지기 시작했다.

미국의 일각에서는 일본의 야욕을 경계하며, 중국을 돕자는 여론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을 보면서 이승만은 멀지 않아 미국과 일본이 전쟁을 할 것이라는 것을 예감하며 본격적인 외교를 위해 1939년 오랫동안 머물던 하와이를 떠나 워싱턴 DC로 왔다.

이승만이 워싱턴에 와서 제일 중요하게 생각한 일은 바로 주미외교위원부(이하 주미위원부)를 조직하는 일이었다. 이승만은 1941년 미주 교포들의 연합단체인 재미한족위원회의 도움을 받아 주미위원부를 만들고, 중경에 연락해서 임시정부의 공식 외교기관으로 인준을 받았고, 김구 주석으로부터 그 자신 역시 주미위원장으로 임명받았다. 이 때부터 이승만과 중경의 임시정부의 관계는 복원되었고, 본격적인 외교활동은 시작되는 것이다.

이렇게 이승만이 주미위원부를 통해서 외교활동을 시작하던 1941년 말 일본은 진주만을 공격했고, 미국과 일본 사이에 소위 태평양전쟁이 발발했다. 이것은 이승만과 한국인들에게 엄청난 기회를 가져다줬다. 아직까지 일본을 우호국가로 봤던 미국인들은 이제 일본이 미국을 향해 공격하는 적대국가라고 생각했고, 이것은 오랫동안 일본과 싸워온 이승만과 임시정부로서는 매우 좋은 기회가 아닐 수 없었다.

이승만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승인 노력

이승만과 임시정부의 전략은 먼저 임시정부를 정식 정부로 인정받는 것이었다. 사실 이것은 원칙상 어려운 일이었다. 독립이 이뤄지고 주권이 확보되어야 국가로서 승인을 받을 수 있지만 미국은 당시 독일에 패배한 프랑스와 같은 나라들의 망명정부를 인정해 줬기 때문에 이승만은 임시정부도 인정을 받을 수 있다고 봤다.

임시정부를 인정받으면 대한민국은 당당한 연합군의 일원이 되는 것이다. 원래 1942년 1월에는 26개국이었던 연합국이 종전 당시에는 44개국이 되었고, 임시정부도 그 일원이 되고자 한 것이다. 이렇게 되면 한국은 미국으로부터 막대한 무기를 대여 받을 수 있고, 그 무기로 전쟁에 참전을 하면 참전국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연합군이 승리하게 되면 참전국은 승전국이 되고, 해방된 나라에 주인으로 등장하게 될 것이다.

사실 태평양전쟁 시기에 임시정부의 가장 중요한 일은 바로 미국으로부터 임시정부를 승인받는 것이었고, 이 일을 실질적으로 주도하고 있는 것이 이승만이었다. 이승만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대통령이었을 뿐만이 아니라 해방직전까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승인을 위해서 최전선에서 가장 열심히 싸운 인물이었다.

이승만의 외교활동은 시련이 많았다. 먼저 미국이 주미위원부를 인정해 주지 않았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었다. 첫째는 당시 미국의 동맹국인 영국은 많은 식민지를 가지고 있었고, 이것을 의식한 미국은 피압박 민족이 세운 임시정부의 승인을 망설였다. 둘째는 소련은 한반도에 친미, 친중의 임시정부가 들어서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미국은 소련의 대일전 참전을 독려하고 있었기 때문에 소련의 반대를 의식했다. 셋째는 독립운동 내의 분열이다. 좌익들은 만일 임시정부가 승인이 되면 한반도에 서구식 민주주의국가가 성립될 것이기 때문에 임시정부 승인 반대 운동을 벌였다. 아울러 우익 세력 내에서도 이승만의 독주를 반대하는 많은 그룹들이 존재하고 있었다.

이승만은 여러 차례 미 국무부에 주미위원부를 승인해 달라는 요청을 했다. 그러나 국무부는 서류의 접수도 거부하고 기다리라고 했다. 이승만은 주미위원부를 중심으로 하는 공식적인 외교를 할 수 없게 되었다. 한국인들은 미국 정치가들을 움직일 만한 시민권자도 많지 않았고, 일본 정부처럼 막대한 로비 자금도 없었다. 이승만이 의지할 수 있는 것은 한국에 우호적인 친구들뿐이었고, 이들을 중심으로 국무부와 의회에 임시정부의 승인을 요청하는 것이었다. 미국 정계에서 활동했던 윌리엄 크롬웰과 미국 상원의 원목이었던 윌리엄 해리스를 비롯 많은 미국인이 참여해 일본과 싸우기 위해 미국은 한국 임시정부를 인정해야 하고, 그들에게 무기를 공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일을 한 단체가 바로 이승만이 세운 한미협회(Korean-American Council)였다.

당시 대부분의 미국 사람은 한국에 대해 전연 알지 못했다. 그 중에서도 한국에 대해 조금이라고 알고 있는 사람들은 미국 기독교인들이었다. 당시 미국 기독교는 개신교나 천주교를 포함해 많은 선교사를 한국에 파송했다. 특히 평양에는 세계에서 가장 큰 장로교 미션 스테이션이 있었고, 또한 미국 천주교 역시 평양에 가장 많은 메리놀 선교사를 보냈다. 그런데 이들은 태평양전쟁이 발발하면서 모두 철수해야 했고, 이승만은 이들과 협력해 주로 미국의회를 상대로 임시정부 승인운동을 벌였다. 이것이 이승만이 애비슨 선교사와 함께 세운 기독교인 친한회(Christian Friends of Korea)였다.

이승만과 임시정부를 결코 나눠 생각할 수 없다. 그는 임시정부의 승인을 위해 수많은 수모를 겪으며 최선을 다했고, 임정이 중심이 되는 나라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여기에서 기억해야 할 것은 비록 임정의 주석이 김구이지만 미국에서는 이승만을 임시정부의 대표로 인정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미국에서는 임정의 승인은 곧 바로 이승만을 대한민국 초대대통령으로 받아들이는 것으로 이해했다.

좌익 세력의 임시정부 해체운동

1919년 3·1운동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세워진 다음에 임시정부에 가장 큰 위협은 바로 공산주의였다. 물론 여기에 대한 근본적인 이유는 미국에 있다.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는 많은 민족주의자에게 희망을 줬고, 그 결과 3·1운동이 일어났다. 그러나 정작 독립운동이 일어난 다음 파리강화회의에서 미국은 우리의 입장을 지지하지 않았다. 이어서 1921년 미국 워싱턴에서 열린 태평양회의에서도 미국은 한국의 목소리를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오히려 미국은 일본을 태평양지역의 파트너로 삼았다. 한국 민족주의자들은 크게 실망했다.

이와 같은 시점에 소련은 자신들이야말로 피압박민족의 구원자라고 선전하며 실망한 민족주의자들을 유혹했고, 1922년 모스크바에서 제1차 극동피압박민족대회를 열어 이들을 초청했다. 여기에 참여한 사람들 가운데는 김규식, 여운형, 박헌영이 포함되었고, 이들은 레닌을 만나 막대한 자금을 받게 되었다. 이들은 미국을 자본주의적 제국주의라고 비판하며 반미주의자가 되었고, 세계의 중심은 워싱턴이 아니라 모스크바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들이 다시 상해로 돌아와 첫 번째로 한 일은 국민대회를 열어 임시정부를 없애고 새롭게 창조하거나 아니면 임시정부를 공산주의와 연합전선을 할 수 있도록 개조하는 것이었다. 이들은 소련으로부터 들어온 막대한 자금을 배경으로 당시 자금난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던 임시정부를 접수해 코민테른의 휘하에 집어넣으려고 했다.

여기에 대해 미국에 있던 이승만도 반대했지만 실질적으로 상해에서 여기에 대해 싸운 사람은 김구를 중심으로 한 민족주의자들이었다. 이들의 노력으로 소련의 지원을 받은 좌익들의 시도는 실패로 끝나고, 상해 임시정부는 여전히 우익단체로 남게 되었다.

그 뒤 공산주의자들은 자신들의 독자적인 독립운동을 했다. 이들은 조선의 현 상황에서 소련식 프롤레타리아 운동을 하는 것은 시기상조이며, 우선 민족운동을 하고, 그 기반 위에서 계급투쟁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겉을 볼 때 이들의 목적은 민족주의자들과 같이 독립이 최고의 가치였으나, 그 다음 단계에서는 계급투쟁을 통해 노동자와 농민이 주인이 되는 국가를 건설하려고 했다. 이들의 궁극적인 목적은 인민(노동자와 농민)이 주역이 되는 인민공화국을 건설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1920년대 중반부터 두 가지 방향의 독립운동이 진행되었다. 하나는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민주공화국 건설을 목적으로 하는 민족주의 그룹과 다른 하나는 공산당을 중심으로 하고 인민공화국 건설을 목적으로 하는 사회주의 그룹이다. 이 같은 분열은 상당히 긴 시간 동안 지속되었다.

하지만 1937년 일어난 중일전쟁은 상황을 바꾸어 놓았다. 당시 중국을 지배하고 있던 국민당정부는 일본과 싸워야 했고, 미국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미국은 중국에 일본과 싸우기 위해서는 공산주의자들과 좌우합작을 할 것을 요청했다. 국민당의 장개석은 미국의 요청으로 모택동의 공산당과 좌우합작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은 임시정부도 마찬가지였다. 이것은 공산주의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소련도 미국의 도움으로 전쟁을 하고 있었고, 이것은 조선 공산당들도 마찬가지였다. 좌익과 우익은 다 같이 미국의 도움이 필요했고, 미국은 좌우합작을 요구했던 것이다.

이런 상황은 1941년 12월 8일 일본의 진주만공격으로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더 강화되었다. 미국은 일본과 싸우기 위해 모든 세력이 연합하기를 원했다. 미국은 중국 국민당과 공산당이 연합하고, 소련이 대일전에 참여하기를 원했다. 특별히 미국은 임시정부를 인정하려면 소련이 찬성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임시정부에 좌익이 포함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이런 외부의 압력에 의해서 임시정부는 좌우합작을 하지 않을 수 없었고, 몇 차례의 우여곡절을 경험하면서 1942년 가을 조선민족혁명당의 김원봉이 임시정부에 가담했고, 곧 이어 충성하기로 서약함으로써 임시정부는 좌우합작 정부가 되었다.

이 좌우합작은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인정하면서 좌익을 포함하는 우익 중심의 대동단결이었다. 조소앙은 1944년 비망록에서 “한국임시정부는 무엇보다 유일합법정부이다”라고 주장했다. 김구는 평생 공산주의자들과 싸웠으며, 민족의 통일을 위해 좌우합작을 하지만 결국 우익의 주도권을 포기하지 않았다. 여기에 대해 김원봉은 임시의정원과 임시정부를 좌익 중심으로 개조하려고 노력했지만 결국 성공하지 못했다. 1944년 국무위원의 조직을 보면 한국독립당이 8명, 민족혁명당이 4명이었다. 이렇게 해서 중경의 임시정부는 좌우합작의 불안정한 동거를 시작했다.

결국 이 불안정한 동거는 해방 직전과 직후를 통해 깨지기 시작했다. 임시정부의 주체세력은 해방을 맞이해 미국과 중국을 상대로 대표성을 인정받아 독립운동의 주체로 귀국하려고 하는 데 비해, 임정 내의 좌익 세력은 임시정부 자체를 해산시켜 버리려고 했다. 1945년 8월 13일 임정 내의 좌파세력은 임정 의정원이 임시정부 소재지의 한인들만 대표하기 때문에 의정원을 해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이들은 임정이 뚜렷한 공적을 세우지 못했기 때문에 국무위원들이 사직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간수(임시)내각을 만들어 사무이관작업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새로운 나라의 건설 작업은 국내에서 활동했던 사람들에 맡겨야 한다는 것이다. 중국 국민당 첩보당국은 이런 좌익의 활동은 임정이 한국에 친소정부를 세우는데 방해가 되기 때문에 미리 제거해 공산국가를 만들려는 작업의 일환이라고 봤다.

이 같은 좌익의 견해는 1946년 8월 11일자 독립신보에 기록된 김원봉의 회고에 잘 나타나고 있다.

나는 당시 중경에 있는 임정이란 기구가 국내에 들어가 인민의 지지를 받는 정권이 되지 못할 것을 예측하고, 임정 국무위원회를 열어 간수 내각을 조각해 가지고 주권을 전국 인민대표 양해아래 처리하자고 주장하였다. --- 그러니 임정이 --- 조선을 대표하는 정권으로 행세할 수 없다.

하지만 이런 주장은 김구의 강력한 반대로 현실화되지 못했다. 김구는 일제의 패망이 확정된 현실에서 임시정부가 주체가 되어 새로운 나라가 건설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여기에 김원봉과 같이 좌익의 계열에 있던 김규식이 동조했다. 그래서 해방을 앞두고 해소될 뻔했던 임시정부는 다시 살아나게 되었다. 처음에는 임정해소론을 주장하던 좌익들은 임정탈퇴를 주장했지만 결국 탈퇴하지 못하고, 엉거주춤한 상황 가운데 귀국하게 되었다. 임정을 고수를 주장했던 인물들은 일진으로 귀국하고, 임정해산을 주장했던 사람들은 2진으로 귀국했다.

해방 후 한국 사회의 임정봉대론과 여운형·김원봉의 반대

그러면 해방이 되었을 때 한국 사회에서는 임시정부를 어떻게 생각했는가? 해방 후 한국 사회의 가장 중요한 쟁점은 “누가 새로운 나라의 주역이 되어야 하는가?”였다. 해방 직후 여운형을 중심으로 하는 서울의 건국준비위원회(이하 건준)는 임정보다는 일제 강점기 국내에서 지하활동을 하던 공산당과 자신의 건국동맹으로 구성된 좌익세력이 새로운 나라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서울에서도 송진우를 중심으로 하는 우익 민족주의 세력은 임시정부가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전국적으로 보면 송진우의 임정봉대론이 훨씬 많은 지지자를 갖고 있었다.

우선 이북지역의 대표적인 독립운동가라고 말할 수 있는 평남 건준위원장 조만식은 송진우와 함께 임정봉대론을 주장했다. 여기에 평북의 이유필, 황해의 김응순도 동조했다. 이것은 이남도 마찬가지였다. 해방 직후 강원도 건준위원장 김우종도, 충북의 구연직도, 전남의 최홍종도 다 같이 임시정부를 지지했으며, 전북의 민족주의자 배은희도 임정의 지지자였다. 해방 정국에서 대부분의 한국인은 1919년 이래 대한독립운동을 이끌어 왔던 임시정부가 새로운 나라의 주역이 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아마도 해방 정국에서 명시적으로 임정봉대론을 반대했던 사람은 서울 건준의 여운형과 공산주의자들 밖에 없었다.

그러면 여운형이 임시정부를 반대하는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여운형이 임정을 반대하는 이유는 1) 임정은 스스로 자멸할 단체이며, 2) 국내의 조직 기반이 없으며, 3) 인민이 토대가 되지 못하며, 4) 임정보다 유수한 독립운동단체가 많으며, 5) 해외의 안전지대에 있었으며, 6) 미국과 소련이 다 같이 인정하지 않고, 7) 임정은 건준의 건국 활동에 장애가 된다는 것 등이다. 특별히 임정이 건준의 활동에 장애가 된다는 점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여기에 반대해서 새로 세워지는 나라는 임정에 기초해야 한다고 주장한 사람은 바로 송진우였다. 송진우는 거국적으로 임정환영위원회를 열고 임정을 중심으로 나라를 세우려고 했다. 이런 송진우의 준비로 이승만과 김구는 국민의 환영 가운데 귀국할 수 있었다. 비록 임시정부가 정식 정부로서 귀국한 것은 아니지만 미군정은 과거의 입장을 바꿔 군정의 파트너로 인식했다.

이승만, 임시정부, 그리고 대한민국

지금 우리는 빗나간 역사 갈등을 겪고 있다. 김구의 임시정부와 이승만의 대한민국을 분리해서 서로 싸우고 있다. 하지만 이 두 사람은 큰 그림에서 볼 때 동지였지 적이 아니었다. 이승만은 임시정부의 초대대통령이었고, 김구는 이것을 이어 임시정부를 지켰으며, 일제 말에 이 두 사람은 힘을 합해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에서 임시정부를 승인받기 위해 노력했다. 이 두 사람은 다 같이 공산주의의 위협에서 임시정부를 지켜냈다.

1920년대 좌익과 일부 세력이 임정을 파괴하거나 개조하려고 했을 때, 이들은 함께 이것을 지켜 냈으며, 해방 직전에 좌익이 임정의 해소를 주장했을 때 김구는 이것을 반대했고, 이승만은 이것을 적극 지지했다. 해방 후 상당한 기간 동안 이승만과 김구는 형님과 동생의 관계로 서로 협조했다.

물론 우리는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과정에서 이승만과 김구의 갈등을 잘 알고 있다. 이승만은 남한의 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했고, 김구는 남북협상을 지지했다. 이것은 평생 같이 해왔던 동지관계를 금가게 했다. 그러나 김구는 말년에 자신의 입장을 바꿨다. 김구는 암살 직전인 1949년 5월 북한의 조만식에게 남북 민족지도자 회담을 제안했다. 그는 민족주의의 입장에서 통일을 하려고 했던 것이다.

임시정부는 이승만과 김구의 공통분모였다. 이승만은 미군정의 반대로 김구의 임정봉대론이 실현되지 못하게 되자 김구에게 우선 미군정의 요청대로 보통선거를 통해 국회를 세우고, 그 다음에 정부를 수립할 때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삽입하자고 제안했다. 이승만은 이것을 실천했다. 대한민국 제헌헌법 전문에는 “우리들 대한국민은 기미 삼일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 세계에 선포한 위대한 독립정신을 계승”한다는 문장이 들어가 있다.

우리가 염려하는 것은 과거 임시정부를 무너뜨리려는 세력이 있었던 것처럼 오늘날도 대한민국을 부정하는 세력이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임시정부의 독립운동을 폄하하며, 대한민국을 친일파가 세운 나라라고 비판한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볼 때, 오늘의 대한민국은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기나긴 세월 일본과 싸운 애국자들이 건립한 나라인 것이다. 이들이 반공주의자들인 것은 맞지만 친일파는 아니었다. 오히려 이들은 서구식 민주주의의 옹호자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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