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독 건국에서 몰락까지 - 에리히 밀케(Erich Mielke)
동독 건국에서 몰락까지 - 에리히 밀케(Erich Mielke)
  • 미래한국
  • 승인 2002.09.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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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리히 밀케는 동독의 건국에서 몰락에 이르기까지 한번도 권력의 핵심을 떠나지 않았던 인물이었다. 그는 청년시절 공산당 시위현장에서 경찰간부를 살해한 사건과 관련 기소돼 소련으로 도주, 모스크바 레닌대학을 다니며 군사정치학을 전공했다. 스페인, 벨기에 등 유럽 전지역을 돌아다니며 공산당활동을 전개했고 철저한 공산주의자로서 친소파로 분류되는 대표적인 인물이었다.밀케는 위성국가 건설에 혈안이었던 소련과 긴밀한 협조 하에 동독 국가건설의 선봉에 섰다. 전후 동독지역을 점령 통치한 소련은 이 과정에 깊숙이 개입해 영향력을 확대하고 밀케와 같은 친소파들을 국가기관의 요직에 앉히고자 했다. 인민경찰을 창설했고 경찰 내에 슈타지의 핵심근간이 된 경찰 제5국도 만들었다. 제5국의 임무는 체제 저항세력을 감시하고 인민들의 단체행동을 통제관리해 새로 탄생할 국가권력의 순탄한 행보를 보장하는 것이었다. 또한 건국의 명분이 될 나치 전범 관련업무도 이 부서가 관장하던 주요 업무 중 하나였다. 1946년에는 지역관할을 위한 내무행정부가 신설됐고 1948년에는 인민재산관리위원회가 조직되어 밀케는 그 위원장직을 맡았다. 인민재산관리위원회는 인민경찰 제5국과 함께 차후 동독의 국가안보기관인 슈타지의 핵심기둥이 되었다. 1907년 베를린 노동자 가정의 둘째아들로 태어난 밀케는 14세에 이미 독일공산청년단에 입단했고 18세인 1925년에는 독일공산당 당원이 되었다. 그 후 3년간 공산당 회보 ‘붉은기(Rote Fahne)’의 지역기자와 당의 자위대원으로 공산당활동에 적극 참여했다. 1931년 8월 밀케는 당시 극렬한 공산당 시위현장에서 2명의 경찰간부의 등을 쏘아 사살한 사건의 배후자로 지목돼 기소되자 즉시 소련으로 도주했다. 이 사건으로 독일에서는 밀케에 대한 궐석재판이 열려 사형이 선고됐고 귀국할 수 없었던 밀케는 모스크바 모교에 남아 군사정치학을 강의했다. 그리고 1936년부터 3년간은 스페인 시민전쟁의 국제감시단원으로 활동했고 39년부터 45년까지는 벨기에와 프랑스에서 공산당 활동에 참여했다. 1945년 히틀러의 무조건 항복으로 전쟁이 종결되자 밀케는 베를린으로 돌아와 공산당활동에 주력하고 동독공산당 사회주의통일당 SED를 조직하는데 기여했다. 이렇듯 동독 건국과정에 핵심역할을 했던 밀케는 1957년 최고 핵심기관인 슈타지의 수장이 되어 1989년 동독이 붕괴될 때까지 무려 32년간 첩보 및 감시시스템을 구축해 동독 공산당의 권력의 중추로 일해왔다.동독이 붕괴한 직후인 89년 12월 7일 밀케는 체포되어 구치소에 수감됐다. 그의 죄목은 서독 반체제 테러단체였던 적군파 지원, 살인교사, 베를린 장벽탈출자 사살, 1931년 두 명의 경찰간부사살혐의였다. 이 죄목으로 밀케는 6년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인 95년 건강상의 이유로 형 집행정지 처분을 받고 석방 베를린의 한 양로원에서 외로이 지내다 2000년 5월 21일 9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당의 ‘칼과 방패’로 동독의 비밀첩보망을 쥐고 흔들던 밀케의 쓸쓸한 죽음 속에는 독재권력의 허무함을 깊이 드리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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