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 알랭 드 보통의 영혼의 미술관...예술은 어떻게 우리를 치유하는가
[신간] 알랭 드 보통의 영혼의 미술관...예술은 어떻게 우리를 치유하는가
  • 김민성 미래한국 기자
  • 승인 2018.08.13 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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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알랭 드 보통 은 1969년 스위스 취리히에서 태어났으며,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수학했다. 사랑과 인간관계에 관해 탐구한 독특한 연애소설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로 전 세계 독자들의 주목을 받았다. 2003년 프랑스 정부로부터 ‘슈발리에 드 로드르 데자르 에 레트르’ 기사 작위를 받았다. 현대를 살아가는 도시인의 일상과 감성을 정밀하게 포착해낸 우아하고 지적인 에세이로 널리 사랑받고 있다.

대표작으로는 『여행의 기술』 『불안』 『행복의 건축』 『일의 기쁨과 슬픔』 『무신론자를 위한 종교』 『사랑의 기초: 한 남자』 등이 있다.『영혼의 미술관』은 영국 출신 미술사가 존 암스트롱과 함께 ‘예술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라는 주제로 심도 있는 이야기를 나누며 알랭 드 보통이 집필한 책이다. 알랭 드 보통 특유의 재치와 논재치와 논리가 예술의 세계, 그리고 예술과 인간의 관계를 더 풍요롭게 이해하도록 안내한다.

출간 직후부터 예술 분야 스테디셀러로 자리잡은 『알랭 드 보통의 영혼의 미술관』 포켓북이 출간되었다. 알랭 드 보통 특유의 위트와 통찰이 절묘하게 어우러진 글과 140여 점의 크고 선명한 도판으로 이루어진 『영혼의 미술관』은, 우리가 예술작품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에 대한 독특하고 아름다운 성찰을 보여줌으로써 독자들의 꾸준한 사랑을 받아왔다. 『영혼의 미술관』 포켓북은 하드커버 원본과 동일한 글과 그림을 담고 있지만, 한손에 쥐고 읽을 수 있어서 미술관을 안내하는 특별한 도슨트 같은 책이다. 이 작고 아름다운 책은 인생과 예술의 의미를 음미하며 조용히 이야기 나누는 동행자가 되어줄 것이다. 

살아가면서 어쩔 수 없이 마주하게 되는 인생의 질문들이 있다. “우리는 더 잘 사랑할 수 있을까?” “좋은 연인이 된다는 건 무엇일까?” “우리는 어떤 사람이 되려고 노력해야 할까?” 피하려 해도 피할 수 없는 인생의 화두이지만 답은 없는 듯하고 우리는 그런 질문 앞에서 우왕좌왕 방황하기만 한다. 

이 책은 예술작품이 우리의 고단한 삶을 보듬어 안으면서도 우리 삶을 더욱 향기롭게 만들어주는 예술의 치유 기능에 대해, 알랭 드 보통이 특유의 철학적 글쓰기를 통해 써내려간 독특한 책이다. 이 책은 미술사가 존 암스트롱과 대화하며 알랭 드 보통이 직접 엄선한 전 시대의 빼어난 예술작품 140여 점을 선보이는데, 알랭 드 보통 특유의 위트 있고 섬세한 필치가 예술작품이라는 프리즘을 통해 더욱 그 빛을 발하고 있다. 인생의 발걸음이 그 목적지를 잃어버렸다고 느낀다면, 잠시 멈춰 서서 이 책과 함께 인생의 의미와 방향에 대해 한번쯤 사유해보는 것은 어떨까. 

모네의 <수련 연못> 같은 예쁘장한 그림이 시대를 뛰어넘어 인기를 얻는 이유는 무엇일까. 전 세계 아파트들 벽마다 걸린 예쁜 모사화는 어떤 의미로 받아들여야 할까. 누군가에게 예쁜 그림을 좋아한다고 말할 때, 우리는 자신이 삶과 세상의 긴급하고 더 중요한 문제들에 관심 없어 보이는 것은 아닐까 내심 걱정하고 부끄러워하게 된다. 그림의 천진난만함과 단순함이 삶과 사회의 심각한 문제들을 외면하는 듯 보이게 하기 때문이다. 또 아름답기만 한 그림은 우리의 감각을 마비시켜 우리를 둘러싼 구조적 부당함을 온전히 비판하거나 경계하지 못하게 하는 듯하다. 게다가 우리는 너무나도 쉽게 심각한 문제들을 잊어버리고 지나치게 낙관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처럼만 느껴진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오히려 우리는 과도한 우울로 고통받고 있지는 않을까. 오히려 유쾌함은 우리 인간의 멋진 성과이고 희망은 인간에게 내려진 축복이 아닐까. 

오늘날의 문제들을 보면 세상을 너무 밝게 보는 사람들 탓에 생긴 건 거의 없다. 그리고 세상의 고민거리가 끊임없이 우리의 주의를 들깨우는 탓에 우리는 우리의 희망적인 성향을 지켜낼 도구가 필요하다. 마티스의 <춤Ⅱ>에서 춤을 추는 사람들은 이 행성이 고민거리로 가득하다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지만, 우리와 현실의 관계가 불완전하고 껄끄러우며 그런 관계가 일상적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그들의 태도는 우리에게 용기를 줄 수 있다. 그들은 세상에서 어쩔 수 없이 마주치게 되는 거절과 굴욕에 대처할 줄 아는 우리 자신의 유쾌하고 무사태평한 능력을 일깨워준다. 마티스의 그림은 모든 게 좋다고 말하지 않으며, 그와 마찬가지로 여자들이 항상 서로의 존재로부터 기쁨을 얻고 서로 도우면서 그물 같은 결속력을 유지한다고 말하지도 않는다.

삶이 고단할 때 마주친 우아한 꽃 그림은 우리의 내면을 요동치게 한다. 그것은 아름다운 그림이 슬픔을 전달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그림을 볼 때 그림의 아름다움과 대비되는 우리 삶의 고단함과 슬픔을 떠올리게 되기 때문이다. 알랭 드 보통은 우아하고 사랑스러운 예술작품들을 싸잡아 싸구려 감상의 발로라고 일축할수록 큰 손실이라고 말한다. 즉 인생의 고난을 겪으며 성숙해질수록 예술의 아름다움은 더욱 깊이 체험될 수 있으며, 아름답고 낙천적인 작품들을 통해서도 인생의 의미를 풍부하게 성찰할 수 있다는 점을 놓쳐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예쁜 미술작품의 쾌감은 불만족에서 기인한다. 만일 인생이 고되지 않다고 느낀다면, 아름다움은 현재와 같은 호소력을 갖지 못할 것이다. 혹시 미를 사랑할 줄 아는 로봇을 만드는 프로젝트를 구상한다면, 우리는 그 로봇이 인생을 증오하고, 혼란과 좌절을 느끼고, 고통을 겪는 동시에 그럴 필요가 없기를 희망하도록 아주 잔인한 조건을 부여해야 한다. 그래야만 아름다운 예술이 단지 좋기만 한 게 아니라 우리에게 소중해지는 배경이 완성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걱정할 필요가 없다. 산적한 문제들을 보면 앞으로 수세기 동안 예쁜 그림이 매력을 잃어버릴 위험성은 전무하다고 확신할 수 있으니. 

우리들의 연애를 되돌아보자. 사랑은 당연하게도 인생의 큰 축복이자 즐거움이어야 한다. 그럼에도 우리가 가장 쉽게 상처를 주고받는 사람은 다름 아닌 나와 가장 가까운 연인이다. 연인들은 다투면서 세상에서 제일가는 원수를 만난 것처럼 잔인한 말들을 서슴없이 내뱉고는 이내 좌절하고 만다. 사랑이 충만함의 강력한 원천이길 바라지만, 사랑은 때때로 무시, 헛된 갈망, 복수, 자포자기의 무대로 변해버리고 마는 것이다. 게다가 연애의 더 우울한 점은 처음 알게 되었을 때는 더없이 감사하다고 느꼈던 상대에게 너무나 빨리 익숙해진다는 사실이다. 처음에는 아주 작은 스침만으로도 우리를 흥분시켰던 사람이 눈앞에 벌거벗고 누워 있어도 무덤덤해지는 순간이 어김없이 찾아온다. 연애에 성공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오래된 연인이 새롭게 사랑을 회복할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일까? 알랭 드 보통은 이때에도 예술작품은 사랑을 위한 좋은 수업이 될 수 있다고 한다. 

상대방을 재평가하고 다시 갈망하게 되는 법을 고려할 때, 예술가들이 익숙한 것을 다시 보는 방법을 관찰하면 본받을 점을 얻을 수 있다. 연인과 예술가는 똑같은 인간적 약점에 부딪힌다. 쉽게 지루해지고, 사람이든 사물이든 일단 알고 나면 관심을 기울일 가치가 없다고 선언하는 보편적 경향이 그것이다. 따분해져버린 것에 대한 우리의 열정을 되살리는 능력은 위대한 예술작품의 두드러진 특징이다. 그런 작품들은 이미 익숙해져서 간과하기 쉬운, 경험의 감춰진 매력을 일깨운다. 

사랑이 우리 기대에 어긋났을 때 찾아오는 또하나의 가장 큰 위험 중 하나는, 사람들이 우리를 위로하기 위해 응원의 말을 해줄 때 찾아온다. 우리의 아픔을 달래주고 싶은 마음에 그들은 행복은 가까이에 있고, 고통은 순간이며 헤어진 연인은 눈물이 아까운 사람이었다고 힘주어 말한다. 그러나 진정한 위로나 조언은 이런 것이 아니다. 사랑의 항해를 떠나기 위한 현실적 장비들을 마련해주는 것이 필요하다. 그것은 다름 아닌 새로운 사랑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용기를 북돋아주면서도 또다시 닥쳐올 사랑의 위기에 대처할 수 있도록 사랑의 의미를 더욱 깊이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것들이다. 좋은 예술작품은 이러한 통찰에 도움을 준다. 그런 작품들은 ‘가치 있는 여행이 쉬우리라고 기대하지 말라’고 이야기해준다. 사랑의 들판으로 나갈 때도 다른 많은 일들처럼 연습이 필요하고 단단한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말이다. 

누구나 외로움, 고통, 굴욕을 겪으며 살고 죽는다 


알랭 드 보통에 따르면, 예술은 인간의 조건인 고난을 웅대하고 진지하게 바라볼 수 있는 유리한 관점을 제공한다. 특히 낭만주의적 의미로 숭고함을 지닌 작품들이 그러하다. 이 작품들은 별 이나 대양, 거대한 산맥이나 대륙의 단층을 묘사한다. 그 앞에서 우리는 즐거운 공포에 휩싸이고 영원의 존재 양상에 비해 인간의 불행이란 게 얼마나 사소한지 느끼면서 인간의 보잘것없음을 깨닫고, 모든 삶에 스며들어 있는 이해할 수 없는 비극에 더욱 기꺼이 고개를 숙이게 된다. 이 지점에서부터 일상의 초조와 근심은 무력화된다. 자신이 무시당하고 있다고 주장하며 굴욕을 만회하려 하기보다, 우리는 작품이 이끄는 대로 우리의 본질적인 무가치를 이해하고자 노력할 수 있고, 또 결국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일상에서 숭고에 대한 자각은 대개 찰나에 이루어지고 무작위로 찾아온다. 고속도로 위에서 먼산 위로 비구름이 갈라져 햇살이 비치는 장면을 보거나, 비행기에서 기내 TV를 보던 중 창밖으로 힐끗 베르나알펜을 알아보거나, 싱가포르 해협을 지나는 유조선의 불빛을 바라보는 것처럼. 하지만 예술은 그러한 무작위와 우연을 줄여준다. 예술은 믿을 만한 기초 위에서 의미 있는 경험을 이끌어내는 도구이며, 그래서 우리가 슬픔에 잠겨 있다가도 고개를 들 수만 있다면 언제나 숭고의 경험에 계속해서 다가갈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우리는 모두 의미 있는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하고 뜨겁게 사랑하기를 갈망하며 더 나은 사회를 만드는 데 도움이 되고자 한다. 모든 시대의 예술가들도 마찬가지였고 지금도 예술가들은 그러한 열망을 품고 있다. 그러하기에 예술작품을 통해서 우리는 다시 한번 우리의 삶을 되돌아보고 앞으로 나아갈 방향에 대한 힌트를 얻을 수 있다. 어려운 작품 해설에 곤란해할 필요가 없다. 그것은 그저 아카데믹한 이야기일 뿐 어쩌면 우리 삶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다. 우리 삶 속으로 다시금 예술을 끌고 들어와 우리의 삶과 사랑, 일을 더욱 아름답고 풍요롭게 만들어줄 수 있도록 예술을 추동해야 한다. 인생에는 좌절과 고통이 항시 따르지만 우리는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낙천적인 힘 또한 지니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훌륭한 예술작품은 그렇게 우리가 처한 상황과 우리의 힘을 일깨워준다. 나아가 우리의 한 번뿐인 삶을 더욱 아름답게 만들어줄 수 있는 상상력과 포부를 제시해준다. 

예술에 대한 진정한 열망은 그 필요성을 줄이는 데 있어야 한다. 어느 날 갑자기 예술이 다루는 가치, 즉 아름다움, 의미의 깊이, 좋은 관계, 자연의 감상, 덧없는 인생에 대한 인식, 공감, 자비 등에 냉담해져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우리는 예술이 나타내는 이상들을 흡수한 뒤, 아무리 우아하고 의도적이어도 단지 상징적으로밖에 드러내지 못하는 가치들을 현실에서 구현하기 위해 싸워야 한다.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의 궁극적 목표는 예술작품이 조금 덜 필요해지는 세계를 건설하는 것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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