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 아흔일곱 번의 봄 여름 가을 겨울... 이옥남 할머니가 1987년부터 2018년까지 쓴 일기 151편
[신간] 아흔일곱 번의 봄 여름 가을 겨울... 이옥남 할머니가 1987년부터 2018년까지 쓴 일기 151편
  • 김민성 미래한국 기자
  • 승인 2018.08.28 0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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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이옥남은 1922년 강원도 양양군 서면 갈천리에서 태어났다. 열일곱에 지금 살고 있는 송천 마을로 시집와 아들 둘, 딸 셋을 두었다. 복숭아꽃 피면 호박씨 심고, 꿩이 새끼 칠 때 콩 심고, 뻐꾸기 울기 전에 깨씨 뿌리고, 깨꽃 떨어질 때 버섯 따며 자연 속에서 일하며 산다. 글씨 좀 이쁘게 써 볼까 하고 날마다 일하고 집에 돌아와 일기를 쓰기 시작한 지 30년이 넘었다. 글쓴이가 만난 자연과 일, 삶을 기록한 글을 모아 책으로 엮었다.
 

이 책은 강원도 양양 송천 마을에 사는 이옥남 할머니가 1987년부터 2018년까지 쓴 일기 가운데 151편을 묶어서 펴낸 것이다. 할머니는 어릴 적 글을 배우지 못했다. 아궁이 앞에 앉아 재 긁어서 ‘가’ 자 써 보고 ‘나’ 자 써 본 게 다인데, 잊지 않고 새겨 두고 있었다. 시집살이할 적엔 꿈도 못 꾸다가 남편 먼저 보내고 시어머니 보낸 뒤 도라지 캐서 장에 내다 팔고 그 돈으로 공책을 샀다. 글씨 좀 이쁘게 써 볼까 싶어 날마다 글자 연습한다고 쓰기 시작한 일기를 30년 남짓 썼고 지금도 쓰고 있다. 

할머니는 아흔일곱 살이 되어도 뭣이든 들여다보고 있으면 신기하다. 그래서 할머니 눈으로 만난 새소리와 매미 소리, 백합꽃, 곡식마저도 새롭게 다가온다. 도시로 나가 사는 자식들에 대한 그리움, 작은 벌레 한 마리도 예사로 보지 않는 따뜻한 눈길…… 커다란 사건이 있는 게 아닌데도 다음 장이 궁금해진다. 다음 날엔 또 어떤 이야기가 있나 하는 마음으로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한 사람의 삶에 푹 빠져든다. 자식들 이야기에서는 뭉클하기도 하고. 그래서 문득 어머니가 생각나 멈추게 된다. 

한 사람의 지극한 이야기에서 어머니를 만나고, 또 어느 순간에는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 모습을 보게 된다. 사람들은 더 크고 더 좋은 것을 바라며 살아가지만 사실 우리 삶은 일하고, 밥 먹고, 자식 생각하며 그렇게 하루하루 사는 것이지 않을까. 참 평범하지만 소박한 일상이 주는 힘. 더구나 자연 속에서 평생을 한결같이 산 한 사람의 기록이 더할 나위 없이 맑고 깊다. 그래서 그 삶이 우리 삶을 위로해 준다. 

할머니는 아흔일곱 살이 되었다. 눈 뜨면 밭에 가서 일하고, 산에 가서 버섯 따고 나물 캐고, 그걸 장에 내다 팔아 아이들 키우고 이때까지 살아왔다. 

일곱 살에 여자는 길쌈을 잘해야 한다며 삼 삼는 법을 배웠고, 아홉 살에는 호미 들고 화전밭에 풀을 맸다. 여자가 글 배우면 시집가서 편지질해 부모 속상하게 한다고 글은 못 배우게 했다. 글자가 배우고 싶어서 오빠 어깨 너머로 보고 익혔지만 아는 체도 못 하고 살았다. 그러다가 남편 죽고 시어머니 돌아가신 뒤에야 글을 써 볼 수 있게 되었다. 

“글씨가 삐뚤빼뚤 왜 이렇게 미운지, 아무리 써 봐도 안 느네. 내가 글씨 좀 늘어 볼까 하고 적어 보잖어” 하시며 날마다 글자 연습을 한다. 그렇게 하루하루 적은 글은 일기라기보다는 시가 되었다. 그 기록이 소녀처럼 맑다. 

할머니는 그저 잠만 깨면 밭에 가서 일한다. 김을 매면서 뽑혀 시든 잡초 보고 미안하고 미안해서 사는 게 모두 죄짓는 일이라 한다. 눈 쌓인 겨울에는 산짐승들이 무얼 먹고 사나 걱정이 한가득이고, 불난리에 집 잃은 이웃을 위해 고이고이 아껴 둔 옷가지를 챙긴다. 농사지은 것들을 장에 내다 팔고 먼 데 자식들 소식에 전화를 기다리고 다시 맞는 저녁에는 그리움이 밤처럼 쌓인다. 

그러다 가끔, 몸에 좋다며 개구리를 잡아먹던 갑북네 할멈도 먼저 갔다고 나직이 내뱉고, 비오는 날 일 못 하고 집에 있는데, 옆집 세빠또 할멈이 어찌나 말 폭탄을 터뜨리는지 내일 또 비 오면 올 텐데 어쩌나, 걱정하는 대목에서는 웃음이 빵 터진다. 

강낭콩을 팔려고 오색에 갔다가 나이 들어서 젊은 사람한테 ‘사시오, 사시요’ 하니 부끄럽지만 그래도 애써 가꾼 생각하며 문전 문전 다닌다. 아흔일곱 살이 되었는데도 어디서든 만나면 깜짝 놀랄 만큼 싫은 사람도 있다. 이웃한테 싫은 소리 듣고 와서 분해하기도 하고, 송이 따러 갔다가 잡버섯에 속았다고 신경질도 낸다. 또 어느 날 하얀 백합을 보고는 깨끗하고 즐거워서 사람도 그와 같으면 좋겠다 한다. 

어디 가든 늘 둘이 함께였던 동무 할매도 저세상으로 가고, 먼 산에 눈 오려는지 아지랑이처럼 안개 돌고 바람 부는 날. 밖에 비 오고 조용한 빈방에 똑딱똑딱 시계 소리만 들리는 저녁. 별이 총총 뜬 밤을 지나는 할머니의 날들에서 조용한 풍경 소리가 들린다. 

그렇게 봄 여름 가을 겨울도 할머니처럼 나이를 먹어 간다. 맑고 소박하고 다정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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