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화주의와 자유 그리고 번영] 왜 지금 공화주의를 말하는가?
[공화주의와 자유 그리고 번영] 왜 지금 공화주의를 말하는가?
  • 김주성 전 한국교원대 총장
  • 승인 2018.09.17 1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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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내용은 2018. 8. 27 자유한국당 김무성 의원실 주최로 개최된 국회토론회의 발제문을 요약 정리한 것입니다.

민중의 ‘불민주주의’가 새로운 국시(國是)라는 대한민국, 그래서 대한민국은 지금 안녕한가. ‘이게 나라냐’던 분노의 적폐청산이 법대신 지배하는 대한민국, 그래서 ‘이건 나라인가?’빗나간 민주주의를 회복할 정치 철학은 무엇인가. 자유 보수의 대안적 정치철학이 시급한 지금, 민주주의를 넘어 공화주의에 대한 새로운 아젠다가 제기되고 있다. 이에 미래한국은 보수주의 정치철학으로서 공화주의에 대한 독자들의 이해를 위해, 3회 연속 ‘공화주의와 자유 그리고 번영’을 주제로 김주성 전 한국교원대 총장의 글을 소개한다.(편집자注)

1부 왜 지금 공화주의를 말하는가?

2부 공화주의와 자유

3부 한국 정치체제의 모순을 넘어서

왜 뜬금없이 공화주의인가? 그동안 우리는 대한민국의 정치를 선진화시키기 위해 민주주의를 추진해오지 않았던가? 대한민국은 건국 초부터 근대국가건설과 자본경제발전, 그리고 민주정치확립이라는 3대 정치 목표를 차례차례 모두 성공시켜오지 않았는가? 이제 우리는 꿈에도 그리던 선진 대열에 올라서지 않았던가? 어느 누가 대한민국의 성공을 칭송하지 않던가? 무엇이 부족해 공화주의를 새삼 꺼내는가?

공화주의를 살펴보려는 까닭은 최근 우리의 정치의식이 너무 민주주의에 경도 되어 있기 때문이다. 마치 민주주의가 유일무이한 정치이념이라는 듯이, 모든 정치행위는 민주적인가 아닌가로 평가되어야 한다는 듯이, 그리고 정치결과가 아니라 정치과정으로만 정당화 되어야 한다는 듯이 생각한다. 그러기에 우리나라의 3대 정치 목표 가운데 최종 목표였던 민주화를 달성한 뒤에는, 제1목표였던 근대국가건설의 정치업적이나 제2목표였던 자본경제발전의 정치 업적도 폄훼하기 일쑤였다.

민주주의 일변도의 경향은 2016년 10월 29일부터 2017년 3월 11일까지 주말마다 20회에 걸쳐 일어났던 대규모 촛불시위 이후에 더 거세졌다. 촛불시위의 기간에 국회에서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안이 가결되고 헌법재판소에서 대통령 탄핵이 최종 결정되었다. 뒤이어 5월 10일의 대통령선거에서 진보진영의 문재인 대통령 후보가 당선되었다. 보수세력과 진보세력 사이에 3번째로 정권교체가 일어난 것이다. 이번에 집권한 진보정권은 특이한 정치의식을 가지고 있다. 오직 민주주의만을 최대·최고·최종의 가치척도로 삼고, 촛불시위를 촛불시민혁명으로 일컬으며 마치 촛불혁명정부처럼 처신하고 있다.

민주주의를 유일한 가치척도로 삼고 촛불혁명정부로 자임하자 수많은 문제들이 발생하고 있다. 놀랍게도 모순적인 정치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하나는 국가권력의 상대화현상이고 다른 하나는 국가권력의 절대화현상이다. 상대화현상은 국가권력이 법집행을 제대로 못하는 것이고, 절대화현상은 국가권력이 법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을 말한다. 서로 모순되어 보이지만 사실상 일란성 쌍둥이나 다름없다.

국가권력의 상대화현상은 집권세력이 오랫동안 방조해왔던 것이다. 예를 들면 경상북도 성주에서 벌어진 일을 들 수 있다. 성주에는 북한의 핵폭탄을 감시하는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사드(THAAD)의 건설공사가 작년 9월 중단된 채로 허송세월을 했다. 사드 배치를 반대하는 시민단체가 기지 입구를 막고 출입하는 군경차량을 검문검색했기 때문이다. 지난 4월 23일 시민단체와 몸싸움 끝에 군차량 22대에 실린 공사 장비가 사드 기지에 반입되었다. 그렇지만 지금까지도 군경차량의 기지출입은 자유롭지 못하다.

미군 장병들은 아예 헬기를 타고 기지를 출입하고 있다. 군경을 통제하고자 시민단체가 국가권력보다 더 큰 권력을 행사하는 모양새이다. 아마도 세계에서 시민단체가 군경차량을 검문검색한 나라는 우리나라밖에 없을 것이다.

민주를 내세워 실패하고 있는 국가

가끔 ‘이게 정말 나라인가’ 싶을 때도 있다. “이게 나라냐”고 분노해 촛불을 들고 세운 나라가 이 지경이니 이제 와서 촛불민심은 어디에 가 있을까 궁금하다. 더 놀라운 일은 동시에 국가권력이 절대화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요즈음 천정부지의 지지도를 등에 업고 무소불위로 국가권력을 행사하는 경우가 많다. 도를 넘는 국가주의가 판을 치고 있는 것이다. 국가주의란 시민사회를 국가가 지나치게 간섭하고 억누르는 정치행태를 일컫는다. 현대사회에서는 국가의 공영역과 시민사회의 사영역을 엄격히 구분하고 국가의 정치행위를 되도록 공영역에 한정시키려고 한다. 그런데 최근에 들어와 국가가 시민사회의 사영역에 무리하게 개입해 권력을 행사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최저임금인상과 탈원전 정책을 예로 들어보자. 최저임금인상과 탈원전 정책은 문재인 정권의 대표적인 공약 사항이기도 하다. 공약을 준수하려는 정치의지를 나무랄 까닭은 없다. 그러나 아무리 공약 사항이라도 반드시 지켜야 하는 것이 아닐 뿐더러, 반드시 지키기를 국민이 바라는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공약 사항을 지킬 수 있는지 없는지는 정치의지도 문제지만, 정책현실이 더 큰 변수가 되기 때문이다. 정책으로 수립하고 집행할 때는 수많은 현실 요소를 감안해 조정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정책실패를 피하기 어렵다.

2018년에 들어와 최저임금을 16.4%나 인상했다. 그러자 최저임금 인상에 따른 ‘고용 쇼크’가 일어났다. 평시 20만 명을 넘기던 월별 취업자 증가폭이 올 들어 10만 명 안팎으로 떨어졌고 7월에는 5000명으로 급감했다. 하지만 정부는 생산 가능인구(15∼64세)가 감소하면서 취업자 증가폭이 줄어든 것일 뿐이라고 강변했다.

최저임금 인상과는 직접 관련이 없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올해 6월 15∼64세 고용률(67.0%)이 지난해 6월(67.1%)보다 0.1%포인트 감소했다. 최저임금 인상에 따른 고용 충격이 정부가 의지해온 고용율 지표에서도 가시화된 것이다.

정부의 주장이 설득력을 잃었는데도 불구하고 문재인 대통령은 최저임금의 인상 속도를 더 못 높인 것을 안타까워하고 있다. 내년에 10.9%를 인상해도 최저임금이 8350원 밖에 안 된다고 미안해한다. 그렇지만 자영업자들은 경영난으로 최저임금 불복종운동을 벌이고 있다. 그러자 자영업자의 이익을 대변하라고 청와대에 비서관을 신설했다. 그 비서관은 오히려 어서 빨리 최저임금이 공약대로 1만 원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자영업자의 가슴만 후벼 파고 있다.

탈원전 정책은 너무나 허망하다. 집권하자마자 일본에서 일어난 후쿠시마 원전사고를 빌미로 뜬금없이 탈원전 정책을 밀어붙였다. 고리원자력 5·6호기 건설도 갑자기 중단했다가, 국민 여론이 나빠지자 공론화위원회를 열어서 공론투표결과에 따라 공사를 재개한 바 있다. 이때 탈원전은 공론화위원회의 의제도 아니었는데, 말미에 갑자기 끼워 넣고는 어설픈 결과를 얻어냈다. 공론 투표의 창시자인 피시킨 스탠퍼드대 교수는 공론화위원회의 의제는 반드시 하나여야 한다고 못 박는다.

2박3일의 짧은 일정에 중차대한 문제를 다루려면 의제 하나도 벅차다는 것이다. 탈원전의 공론투표 결과를 신뢰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공화주의에 새호운 위협으로 등장한 시민단체, 때로는 국가권력을 무력화시키도 한다/ 연합
공화주의에 새호운 위협으로 등장한 시민단체, 때로는 국가권력을 무력화시키도 한다/ 연합

시드는 언론, 자유의 소멸

탈원전으로 말미암은 경제적 손실은 말할 것도 없지만, 바람도 적고 햇빛도 적은 한반도에서 신재생에너지를 생산한다고 산림과 농지를 마구 훼손하고 있다. 부족한 전력을 화력발전으로 메꾸자니 러시아산으로 둔갑한 북한산 석탄까지 수입하는 웃지 못 할 작태까지 생겨났다. 앞장서서 유엔 대북제재를 강화해야 할 처지인데도 오히려 유엔 대북제재에 구멍을 낸 꼴이다. 정치현실로 보나 국민 여론으로 보나 고집할 일이 아닌데도 밀어붙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견을 못 받아들이는 오만함은 어디에 연유하고 있을까? 촛불혁명의 소명의식으로 무류사상에 빠져든 것인가?

고공행진을 하는 지지율에 취해 정권 스스로 민중과 일체시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국가권력의 절대화는 이에 그치지 않는다. 요즈음 눈에 보이지 않게 권력집중이 심각해지고 있다. 정부권력을 견제해야 할 다양한 기관권력과 사회권력이 정부권력으로 수렴하고 있다. 예를 든다면, 김명수 대법원장의 사법부 운영에 뭔가 석연찮은 점이다. 김 대법원장은 ‘판결로 정치를 할 수 있다’고 믿는 진보적인 판사들의 모임인 우리법연구회와 국제인권법연구회의 회장 출신이다. 최근 그 모임의 출신 판사들이 대거 사법고위직에 포진되었다. 정치적으로 중립적이고 공평무사해야 할 법원 판결이 정치의 도구가 된다면 보통 우려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혹시 권위 정부 시절처럼 사법권이 행정권과 결합되기라도 한다면, 몽테스키외의 우려처럼, 재판관은 압제자의 힘을 갖게 될 것이다.

또 다른 예로 노영방송화 되는 지상파 방송의 사례를 살펴보자. KBS와 MBC가 대표적이다. 세월호사건 당일에 노래방에 갔다던 양승동 씨가 어렵사리 KBS 사장으로 임명되자, 적폐청산을 한다고 주요 보직자를 거의 모두 물갈이했다. ‘진실과미래위원회’를 만들어 과거에 파업에 참여하지 않았거나 기자협회 정상화를 촉구하는 성명서에 서명했던 기자들을 일일이 조사해 보직 해임시켰다. 빈자리에는 주로 KBS 언론노조 출신들로 채워 놓았다. 진실과미래위원회는 법적 권한이 없는데도 사장과 손발을 맞추면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하고 있는 셈이다.

2010년 MBC 파업 당시 해고를 당했던 최승호 씨가 MBC 사장을 맡자마자, ‘노사공동재건위원회’를 출범시키고 대대적인 보직 물갈이를 시작했다. MBC노동조합(3노조) 산하의 공정방송감시센터에 따르면, “최승호 사장은 취임 직후 보도국 국·부장단 전원을 보직 해임하고 민노총 언론노조 파업에 참여했던 기자들로 그자리를 속속 채웠다”며, “파업에 불참한 기자 80명도 방송기자 업무가 아닌 곳으로 골라 배치했다”고 한다. 더구나 지난 3월 15일 이완기 방송문화진흥회 이사장이 돌연 사퇴를 선언하면서 내놓은 입장문이 놀랍다. “방문진법에 방문진 이사장은 이사회에서 호선하게 돼 있지만 실제로는 대통령을 앞세워 청와대가 낙점했고 이사회는 요식 절차를 수행했다.” 정권이 MBC를 장악했다는 말이다.

KBS나 MBC의 이사진들은 정권에 장악되었고, 방송데스크는 노조원에 장악되어 있다. 언론노조는 민노총에 소속되어 있는 만큼 정권 창출에 적극적이었고, 이제는 정권 실세들과 운명을 함께 하고 있다. 그런 만큼 노영방송화 되는 것을 누구도 막을 수 없다. 이렇게 방송이 진영화 되자, KBS나 MBC의 시청률은 폭락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KBS 뉴스9의 시청률은 10.5%로 전년도 보다 7-8% 빠졌다.

MBC의 뉴스데스크의 시청률도 1.97%로 전년도 보다 2-3% 빠졌다. 정권의 지지도가 높은데도 시청률이 낮아진 까닭은 정권 비호에 급급해서 시청자들이 식상했기 때문이다.

언론기관은 입법·행정·사법에 이어 제4부라 할 정도로 막강한 권력기관이다. 현재 행정과 사법의 권력이 수렴하고, 언론권력도 함께 수렴하면 집중된 권력의 밀도가 너무 높아진다. 그렇잖아도 “한국 대통령은 막강한 권한을 갖고 있으므로 선출된 독재”라고 프랑스의 기 소르망 교수가 일갈할 정도다. 대통령의 막강한 권력을 견제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미흡하기 때문에 대통령의 권한이 남용될 소지가 크다. 이런 판국에 사법권력과 언론권력이 집권세력에 호응하면 살아 있는 국가권력은 한없이 비대화될 것이다. 만일 다음 총선에서 의회마저 집권세력에게 장악된다면, 끔찍한 일이 벌어질 수 있다.

모순되어 보이는 국가권력의 상대화현상과 절대화현상이 일란성 쌍생아라는 것을 파헤쳐보고, 이런 현상이 궁극적으로 어떤 위험을 안고 있는지 살펴보자. 성주의 경우처럼, 시민단체가 국가권력을 무력화시키는 국가권력의 상대화현상 뒤에는 국가의 법제화된 권력보다 시민의 살아 있는 정치의지가 더 주권적이라는 생각이 숨어 있다. 사실 시민의 살아 있는 정치의지가 국가의 법제화된 권력보다 우선한다는 것은 원형적인 민주주의의 정치원칙이다.

촛불혁명정부처럼 국가를 운영하면서 수많은 문제들이 생겨나고 있다.
촛불혁명정부처럼 국가를 운영하면서 수많은 문제들이 생겨나고 있다.

시민단체가 무력화시키는 국가권력

원형적인 민주주의에서는 시민의 모임 자체가 국가이고, 모임에서 결정지은 것이 국가정책이고 법이다. 법원칙에 신법우선의 원칙이 있듯이, 사람들이 모여 새로이 결정지으면 새로운 국가정책이나 새로운 법이 되고, 이들은 당연히 예전에 모여 결정한 옛 정책이나 옛 법에 우선한다. 민주주의 국가란 시민들의 살아 있는 정치 의지를 국가의지로 삼는 국가이다. 따라서 시민의 정치의지에 어긋나면 법제화된 국가권력은 상대화될 수밖에 없고, 시민의 정치의지에 어울리면 법제화된 권력의 한계를 넘어 국가권력이 절대화될 수 있는 것이다.

촛불혁명의 소명을 자임했다고 생각하거나, 고공행진하는 지지율에 비춰 정권 스스로 살아있는 시민의 일반의지를 체화했다고 생각한다면, 국가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를 수 있게 된다. 자신의 의사가 곧 시민의 정치의지이므로, 자신들이 행사하는 국가권력은 곧바로 국민주권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법제화된 국가권력을 상대화시키고 국민주권으로 살아 있는 국가권력을 절대화시키는 정치논법이다. 독재를 정당화시키는 정치논법인 셈이다. 이런 정치논법으로 히틀러는 민주적인 정치과정을 거쳐 절대권력을 획득했고, 스탈린은 볼셰비키혁명의 소명을 자임하면서 절대권력을 휘두를 수 있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 옛날에도 이러한 형태의 민주주의를 최악의 민주주의로 평가했다.

민주주의는 스스로를 무너뜨릴 수 있는 자기 파괴의 생리적 시한폭탄을 장착하고 있다. 지금 추세로 권력이 계속 집중되어 법제화된 국가권력이 상대화되고 주권화 된 국가권력이 절대화된다면, 다음 총선의 결과에 따라 우리나라의 운명은 파국을 맞을 수도 있다. 혹시 집권세력이 이번 지방선거에서처럼 다음 총선에서도 압도적으로 승리한다면, 우리의 국가권력은 전체주의화의 문턱에 올라설 것이다. 이런 극단적인 경우가 발생하지 않기를 바라지만, 요즘처럼 민주주의에 경도된 정치의식으로는 정치위험을 인식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정치위험이 다가와도 제대로 자각할 수 없다. 그러기에 더 위험천만하다. 민주주의 일변도의 정치의식에서 벗어나 정치시야를 넓혀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김주성 전 한국교원대 총장
텍사스주립대 정치학 박사
전 한국동양정치사상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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