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속기획] 대한민국 건국과 공화주의 혁명
[연속기획] 대한민국 건국과 공화주의 혁명
  • 김용직 성신여대 교수(정치학)
  • 승인 2018.09.19 11:5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1948년 대한민국 건국의 역사는 20세기의 공화주의혁명의 대표적인 성공적인 사례 중의 하나로 기록될 사례이다. 그것이 공화주의 혁명적 사건이었다는 점은 당시에는 그 주역들이나 이를 기억하는 동시대의 사람들에게는 생생한 감격적 사실이었음에 틀림없지만 그것이 10년의 세월이 7번이나 바뀐 오늘날에 있어서 후세인들에게는 자칫하면 잊혀질 수 있는 사건인 것 같다.

70년 동안 대한민국은 세계사에서 여러 가지 모습으로 기억되어야 하는 존재로 이해되었는데 그 상징적 의미도 몇 차례 바뀌어 왔다.

첫째는 가장 험난한 과정을 겪고도 이룩한 국가 형성이요, 둘째는 척박한 자연환경을 극복하고 이룩한 산업화와 경제발전이었고 셋째로 비교적 최근인 1987년 이래의 제3의 파도유형으로 분류되는 한국의 압축적 역동적인 민주화와 자유민주주의의 달성 사례이다. 이 세 가지 상징적 업적은 20세기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가장 중요하며 잊혀져서는 안 되는 것이라는 일반적으로 공감되는 인식에서 확실하게 해야 할 것이 바로 대한민국 건국의 공화주의혁명에 대한 역사적 인식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대한민국을 굳건한 공화주의의 사상적 기반에 서 국제적으로 공화정으로서 손색이 없는 국가를 수립하는 데 에 최우선적 고려를 하였다. / 고성혁
이승만 대통령은 대한민국을 굳건한 공화주의의 사상적 기반에 서 국제적으로 공화정으로서 손색이 없는 국가를 수립하는 데 에 최우선적 고려를 하였다. / 고성혁

대한민국 건국이 수 십 년에 걸친 민족지도자들의 특수한 유형의 공화주의적 정치이념을 실현하기 위한 정치적 혁명의 과정에 의해 달성되었고 그것은 대한민국이 이후 자유민주주의의 경로로 발전해 나가게 되는 원초적 혁명(Original Revolution)이었다. 대한민국의 건국은 그 명시적 기원은 당연히 최초로 한반도에서 공화주의적 사건과 사상들의 교호적 전개들이라 할 수 있는 1919년 3·1운동과 이후 임시정부의 등장을 중심으로 하는 혁명적 과정의 전개에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바로 이 시기에 대한민국 국호가 공화정국가의 수립이라는 정치적 목표로 확정되게 된 것이다. 이것은 실학 이래의 오랜 정치개혁의 패러다임이 구왕정의 큰 틀을 전제로 이뤄졌던 전통을 완전히 청산하고 전적으로 정치단위의 목표를 세계사적인 서구근대국가의 유형으로 설정한 정치패러다임의 혁명적 전환을 받아들인 것을 말해준다.

독립운동의 이념적 기반 공화주의

한국의 민족운동가들에 의한 공화주의적 정치운동이 3·1운동기에 폭발적으로 분출된 것은 러일전쟁 이후 경술국치 망국기에 시작된 신민회운동과 같은 계몽주의적 정치운동이나 망명 민족주의자들이 현지의 공화주의적 정치제도나 사건 등의 영향으로 그 사상을 수용하게 된 계기가 중요하게 작용했다.

중국이나 미주 등지에서 선진 공화주의 정치 현상을 직접 목도하고 이에 영향을 크게 받은 이들이 1910년을 전후해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한인들의 공화주의 독립운동의 노선은 1920년대와 1930년대에 민족주의자들 사이의 여러 가지 갈등과 사회주의자들의 도전 등의 요인으로 현실적인 어려움을 겪었고 침체기와 혼란의 시기를 겪었다. 아울러 일제의 한반도와 동북아지역에서의 강력한 패권적 지배추구와 세력확장 및 전쟁의 전개 때문에 이 시기의 공화주의운동은 민족주의 독립운동 전선에서 잠재적 주제로 침잠하기도 했던 것도 사실이다.

1941년 12월 진주만 사건을 계기로 공화주의 건국운동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세력과 미주지역의 이승만 등의 한인민족주의자들에 의해 재개되었고 2차 세계대전의 전개과정에서 등장한 카이로선언을 계기로 한국의 공화주의적 건국의 노력은 활성화 되게 되었다. 1945년 8월 광복을 맞이해 국내외 민족독립 운동가들이 국내에서 활동을 재개하게 되었을 때에 공화주의 건국노선은 미소의 이중점령에 따른 국내외적 혼란으로 요동치게 되었다. 미소의 얄타합의에서 제기된 신탁통치를 둘러싼 협력노선은 이후 2년간 한반도에 비현실적 정치현실을 강요했지만 결국 남한의 공화주의 건국 노력은 3분되게 되었다. 하나는 극좌파 박헌영을 중심으로 한 친소 공산주의 노선과 미군정의 지지를 배경으로 한 김규식과 여운형의 좌우합작파의 노선, 그리고 이승만과 한민당 및 김구계의 우파 민족주의연합세력의 불안전한 동거를 중심으로 하는 노선으로 3분되어 전개되었다.

1948년 5·10 제헌의회를 구성하는 총선은 대한민국 공화주의 대혁명이었다. 사진은 5·10 총선 포스터 / 위키디피아
1948년 5·10 제헌의회를 구성하는 총선은 대한민국 공화주의 대혁명이었다. 사진은 5·10 총선 포스터 / 위키디피아

이러한 혼란과 혼돈의 상태는 한인의 공화주의 건국의 노력을 심각하게 변질시킬 위험성을 노정하는 것이었고 이에 이승만은 이른바 ‘정읍발언’으로 알려진 남선지방의 순회유세 중에 1차 미소공위가 결렬됨에 따라 즉각적으로 자율정부를 수립해야 한다는 주장을 제기했다. 이는 소련이 북한지역에서 빠른 속도로 사실상의 정부를 수립하는 조치들을 단행하면서 미국과의 협상을 지연하는 술책을 전개해 한반도에서 동구권과 같은 소련의 위성국가 수립의 비책을 추구할 것을 간파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한국의 노련한 정치가의 혜안일 뿐 아니라 그의 공화-민족주의적 결단이 시작됨을 알리는 중대한 공화주의적 행동인 것이다.

결국 2차 미소공위가 다시 교착상태로 빠지고 나서 트루먼은 한국의 독립 문제를 유엔을 통해 해결해야 한다는 이승만의 주장을 수용했다. 그 결과 미국은 한반도에서 한국 주민들이 원하는 자유롭고 민주적인 선거를 실시할 것을 제안해 압도적 다수의 지지를 통해 유엔결의안을 통과 시켰다. 그리하여 1948년 1월초에 유엔한국임시위원단(UNTCOK)이 한국에 입국함으로써 한국의 건국혁명은 주민의 자결적 의사를 확인하는 총선거에 의해 종료될 것이 확정되었다.

1948년 5·10 총선은 공화주의 대혁명

그 결과 1948년 대한민국의 건국은 30년의 장기 공화주의혁명의 대장정의 마침표를 5·10총선거라는 민주주의적 사건을 통해 찍는 대단원의 막을 내리게 된 것이다. 즉, 5·10 총선은 하나의 독립적 사건이 아니라 수 십 년에 걸친 대한민국의 건국과정의 마지막 단계에서 일어난 정치 혁명적 사건이다. 아울러 1919년에 시작되어 1948년 성취된 대한민국 건국은 가장 원초적인 혁명적 사건이었다. 그것은 전후 20세기의 대표적 시대정신인 민족자결주의의 원칙에 입각해 근대국가를 탄생시키는 20세기의 모범적인 공화주의적 정치혁명 사례들 중 가장 인상적인 사건이었다.

그럼에도 5·10 선거가 국내적으로 상대적으로 저평가되어 온 이유는 어디에 있는 것인가? 그 저변에는 무엇보다 그것이 공화주의혁명이었다는 점이 제대로 인식되지 못했던 것이 가장 큰 이유로 간주된다. 이 점이 제대로 조명되기 위해 건국운동의 중심적 지도자였던 이승만과 그의 핵심 정치적 지지자들의 정치적 비전과 관점을 이해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그런데 미국을 비롯한 서구 우방의 지도자들조차 대한민국의 건국이 전후에 전승국으로부터 시작된 전후처리의 산물이라는 피상적인 역사인식에 머무르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그것이 공화민족주의 대혁명과의 조우의 결과였기에 가능한 것이라는 점을 충분히 인지 못한 것이다. 즉 우리의 혁명적 사건을 우리가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면 그 역사적 진실을 자칫하면 역사의 망각 속으로 사라질 수 있다는 위기감을 갖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대한민국 건국이 프랑스의 대혁명이나 영국의 명예혁명이나 미국의 독립혁명 못지않은 대혁명적 사건이 될 수밖에 없는 점을 밝히 보여준 사건이 바로 1948년 5·10 총선거이다. 우리는 이 우리 민족사에 접목된 세계사적 대사건의 성격을 규명하고자 하는데 대한민국 건국의 중심에는 이승만과 상해임시정부라는 행위주체가 있었다.

1919년 3월 시작된 한국민족주의 독립운동의 새로운 출발점에서부터 그 어려운 세월과 과정 중에 온갖 장애와 반대를 만나고 이를 극복해야 하는 대한민국 건국 과정은 이를 초지일관 의지로 뚫고 나가는 원동력을 가진 핵심세력의 형성과 그들의 역사적 비전, 즉 공화주의적 혁명관이 뚜렷했기 때문에 계속 이어질 수 있었다.

1948년 대한민국의 탄생을 가져온 5·10 총선거는 도대체 언제부터 시작된 것인가? 이 질문은 5·10 선거의 기원을 묻는 질문과 동일한 질문이다. 그것은 우선 총선거를 통한 대한민국 정부를 구성하는 대사건이며 이것이 강대국에서 발원한 것인가 아니면 약소국에서 발원한 것인가를 우리는 먼저 따져 봐야 한다.

첫째, 만일 그것이 강대국이 아니라 전적으로 약소국에서 발원한 것이라면 이 사건은 민족주의 혁명의 한 단계적 현상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이 사건이 한국인들의 국가재건과 형성 또는 국가건설의 사건이라면 충분히 혁명적 성격이 어떠한 것이었는지 설명할 수 있다. 하지만 왜 그것이 굳이 30년이나 경과된 후에 어렵게 달성되었는지 설명이 필요할 것이다. 또한 이사건이 유엔의 특별한 감시를 통해 진행되었다는 점에서 이를 전적으로 약소국의 노력으로부터만 유래한 것으로 보기는 힘들다고 생각된다. 특히 1945년 미국의 공식적 외교적 입장이 한국 같은 나라의 독립을 기존의 민족운동 단체에 국한해서 파악할 수 있기에는 한계가 있다.

둘째, 만일 이 사건이 강대국이 독자적으로 주도적으로 기획한 사건에 불과한 것이라면 이것은 민족주의보다는 다른 기원, 강대국정치의 산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이 경우에 1943년 전시 미, 영, 중의 정상들이 카이로에서 전시회의를 개최해 한국 독립에 관한 최초의 선언이 나온 것이 그것의 기원이라면 이는 카이로선언의 당사국들의 공통 이해관계의 표현이 5·10 총선의 기원을 형성하는 것이 된다. 특히 1945년 2월 얄타회담에서 신탁통치안의 시행이 실패한 이후 본격적으로 실현된 안이라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셋째, 이 사건이 강대국과 약소국의 노력이 어우러지면서 이루어진 사건으로 본다면 이는 이것이 두 가지의 쌍생아적인 기원을 배태한 복합적 사건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즉 이것은 절묘한 한국의 민족주의 독립운동세력이라는 내세와 전후 국제 질서를 주도하는 초강대국 미국 및 소련이라는 외세와의 결합 또는 조우에 의해 빚어진 복합적 사건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

해방 후 한국의 국가형성을 위한 강대국과의 어려운 줄다리기 끝에 강대국의 신탁통치안을 물리치고 마침내 한국인들의 자치정부 수립을 위한 자결권을 유엔과 국제사회에서 인정해 주는 공식적 대사건 특히 소련의 반대를 물리치고 자유민주주의를 수립하기 위한 미국의 정책의 승리를 의미한다.

1948 공화주의 건국혁명에 대한 연구 계속되어야

대한민국의 독립으로 이어지는 건국혁명은 이승만과 많은 한국인 민족주의자들에게 무엇보다 공화민족주의 혁명 과정이었다. 이 점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이승만에 대한 잘못된 판단을 하게 될 수 있고 또한 대한민국 건국 과정이 어떠한 혁명적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는지 혼란스러울 수 있다. 1948년 대한민국 5·10 선거의 의미는 약 30년간의 공화주의혁명 과정의 정점에서 주권자 대한민국 국민이 제정권력자로서 탄생하게 된 혁명적 사건이다. 이를 위해 우리는 대한민국이라는 새로운 공화국의 탄생의 필연적 과정의 그 사상적 발전의 발자취를 찾아봐야 할 것이다. 역사적 진실의 전체 모습을 재현하기 위해 잊혀진 기억의 편린들의 간극 차이를 연결하고 메꾸는 지난한 작업을 이제 시작해야 한다.

유럽 근대의 비교역사적 혁명사에 대한 방대한 연구를 수행한 찰스 틸리 교수의 정의에 따르면 혁명이란 혁명적 상황과 혁명적 결과로 구성된다. 한국에서도 혁명적 위기 상황이 1919~1948년 기간 중에 적어도 수차례 등장한 것이 확인되며 또한 1948년에는 분명히 새로운 공화정체제의 근대 국가가 형성되었기 때문에 혁명이라는 정의에 부합한다.

1919년 3월에 시작되어 1948년 8월에 완성된 대한민국 건국의 장정은 공화민족주의 혁명의 과정이었다. 이승만은 그 시작의 시점에서 임시대통령으로 임명된 이후 공식 대한공화국의 독립과 승인이라는 대의명분을 위해 독립운동의 전과정을 시종일관 헌신적으로 대한의 독립운동가로서 활동하고 마침내 그 대단원의 막인 대한민국 건국의 완성이라는 대과업을 달성하는 데 성공했다. 미국의 건국에서 조지 워싱턴의 역할이나 체코슬로바키아의 독립에서 마사리크의 공로와 비견될 수 있는 것이 대한민국 건국에서 이승만의 역할이라는 점에 대해 아는 이들은 많지만 대한민국의 건국혁명을 이끌었던 사상이 공화-민족주의라는 점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미국의 건국사상이 자유주의와 공화주의의 양대축에 의해 이뤄졌고 특히 페더럴리즘, 즉 연방주의사상으로 합중국체제를 구현한 미국 헌법으로 귀결되었듯이 대한민국의 건국사상도 자유민권주의 사상과 입헌공화주의 사상, 그리고 민족주의 사상의 영향을 받았고 그것이 최종적으로 1948년 건국 헌법으로 표현된 것이다.

이승만은 1912년 도미 망명 이후 항일투쟁을 하는 기간 동안 저항민족주의, 민족자결주의, 공화주의의 사상을 자신의 이념으로 자주 공포했다. 또한 이러한 사상들은 국내 및 해외의 한인 민족독립운동가들에게는 1919년 전후의 시기에 이미 널리 받아들여지는 사상이었다. 이승만은 대한민국을 굳건한 공화주의의 사상적 기반에서 국제적으로 공화정으로서 손색이 없는 국가를 수립하는 데 최우선적 고려를 했다. 그가 제헌헌법에 미국식 공화정제도인 대통령제를 강력하게 주장한 것은 우리나라 헌법이 크게 볼 때 미국식 공화주의제의 모델로 분류되게 되는 원인이 되는 것이다.
 

김용직
성신여대 교수(정치학)
노스캐롤라이나주립대 정치학 박사
전 대한민국역사박물관 관장

본 기사는 시사주간지 <미래한국>의 고유 콘텐츠입니다.
외부게재시 개인은 출처와 링크를 밝혀주시고, 언론사는 전문게재의 경우 본사와 협의 바랍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