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문점 선언, 국회 동의 대상 아니다
판문점 선언, 국회 동의 대상 아니다
  • 제성호 미래한국 편집위원, 중앙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 승인 2018.10.01 11:2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정부는 11일 국무회의에서 의결된 4·27 판문점선언의 국회 비준동의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여당은 13일 외교통일위원회에 이 비준동의안을 상정하려 했으나, 야당의 반대로 일단 무산됐다. 하지만 9월 18-20일 간 평양에서 열리는 정상회담 직후부터 여야가 이 문제를 두고 치열한 샅바 사움을 본격적으로 벌일 것으로 내다보인다.

무릇 법적 문제는 법적 기준과 잣대에 의해 풀어야 한다. 그러므로 판문점선언에 대한 국회의 비준동의 여부는 문재인 정부의 ‘추진 의지’가 아니라 합의문의 ‘법적 성격’에 따라 결정해야 마땅하다. 판문점선언은 여러 곳에서 ‘…(노력)하기로 하였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이 점에 비춰 보건대, 당사자 간에 ‘구체적인 권리·의무관계’를 설정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법적 문서는 합의사항을 ‘… 한다(shall)’고 표시하기 때문이다. 합의 내용도 구체성이 떨어지고, 또 발효조항을 두고 있지도 않다. 결국 판문점선언은 남북한 정상들의 ‘정치적 협력 의지’를 밝힌 문건이라고 보는 게 타당하다. 그것은 정식 합의서 채택 이전에 맺는 ‘의향서’ 혹은 앞으로 어떤 내용의 ‘합의를 하겠다는 합의(agreement to agree)’에 가깝다.
 

제성호 미래한국 편집위원, 중앙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제성호 미래한국 편집위원, 중앙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국제법에서는 정치지도자들 간에 ‘성의 있는 이행을 약속’하는 법적 구속력이 없는 합의를 신사협정(gentlemen’s agreement)이라고 칭한다. 국제사회에서는 이 같은 합의문이 빈번하게 채택된다. 1941년 윈스턴 처칠 영국 총리와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 간에 채택된 ‘대서양 헌장’이나 1975년 동서 유럽국가들 간에 체결된 ‘헬싱키 최종의정서’가 그 대표적인 예다. 다만 신사협정이라 할지라도 전혀 실효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당사국을 법적으로 구속하는 조약 못지않게 잘 준수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판문점선언은 정치적 합의의 일종이므로 국회의 지지 결의의 대상이 될 수는 있으나, 비준동의 대상이 될 순 없다. 이런 이유에서 판문점선언의 선례라 할 수 있는 6·15공동선언, 10·4 정상선언 등은 국회동의를 거치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여권은 지금 ‘국가나 국민에게 재정적 부담을 지우거나 입법사항에 관한 합의서’에 대해 국회 동의를 받도록 한 ‘남북관계 발전에 관한 법률’ 제21조 제3항을 원용하며, 국회 동의를 강행하려 하고 있다.

하지만 무리수임이 분명하다. 정치적 약속인 판문점선언이 성질상 예산의 집행을 수반하거나 국가나 국민에 대해 새로운 재정적 부담을 지우지는 못하는 까닭이다. 따라서 비준동의안도 문제이지만, 여기에다 비용추계서를 첨부한 것 역시 법리적으로 맞지 않는 것이며, 국회 동의 절차를 기정사실화하려는 꼼수라고 할 만하다. 더욱이 전체 예산 규모가 아니라 내년 추가 소요비용만 적시한 것은 야당의 반발과 국민적 비판을 우회하기 위한 편법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판문점선언이 신사협정에 해당한다면, 이미 4월 27일 남북한 정상이 서명한 순간 발효했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 그럼에도 선언이 채택된 지 무력 138일이 지난 후에 정부가 국회에 비준동의안을 제출한 것 역시 ‘변칙’과 ‘반헌법’을 반영한다. 이 사안의 처리 건은 향후 문재인 정부가 대북·통일정책에서 과연 법치주의를 실현할 의지가 있는지 여부를 가늠하는 중요한 척도가 될 것이다.

본 기사는 시사주간지 <미래한국>의 고유 콘텐츠입니다.
외부게재시 개인은 출처와 링크를 밝혀주시고, 언론사는 전문게재의 경우 본사와 협의 바랍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