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비평] 아무도 말하지 않는 동학, 그리고 일진회 이야기
[역사비평] 아무도 말하지 않는 동학, 그리고 일진회 이야기
  • 김용삼 박정희기념재단 기획실장·전 월간조선 편집장
  • 승인 2018.10.08 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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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병희는 진보회를 일으켜 일본과 손을 잡고 러시아에 맞서고자 했다. 이것은 결코 어리석거나 친일 매국적인 판단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왜냐 하면 당시엔 정도의 차이가 있었을 뿐 다수의 개화 지식인들이 일본이 선전한 ‘문명화’ 논리를 근본적으로 부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에 동학에 대한 신기루가 횡행하고 있는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급기야 정부마저 이 대열에 합류했다. 정부기관인 문화체육관광부가 9월 5일부터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와 후손의 명예 회복을 위한 유족 등록 사업을 9년 만에 재개한다는 것이다. 정부가 이 사업을 벌이는 취지와 목적은 “봉건제도를 개혁하고 일제의 침략으로부터 국권을 수호하기 위해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한 사람과 그 후손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동학의 정치사상>의 저자 임형진은 동학은 내세보다 현실에 충실한 종교로서 지난 100여 년 간 봉건사회의 모순을 지양하기 위해 여러 차례 개혁 운동을 벌여 온 집단이라고 주장한다. 나아가 그는 동학의 민중운동사는 그대로 한국 민중운동사이며, 근대 우리 민족의 수난과 저항, 그리고 새로운 도약의 밑거름이라고 주장한다.

신(한울님)과 인간은 동일한 존재라는 동학의 시천주(侍天主) 사상은 인간평등의 원리로 발전하여 양반-상놈-노비의 엄격한 신분구조로 억눌려 살았던 사람들에게 복음으로 다가갔다. 실제로 동학에 입도했던 백범 김구는 자신의 저서 <백범일지>에서 “상놈 된 한이 골수에 사무친 나로서는 동학의 평등주의가 더 할 수없이 고마웠다”면서 동학의 평등주의에서 자신의 이상향을 발견했음을 밝히고 있다.

너무나 뻥 튀겨진 동학

동학은 그 자체논리에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각성, 민본사상, 계급타파, 남녀평등 등 민주주의적 요소가 다수 발견된다. 구한말 동학은 전통적인 양반지배 사회질서에 대한 부정, 새로 전파된 서학에 대한 저항이라는 뜨거운 기운 위에 서 있는 정신적 기둥이었다.

그것은 조선 말기에 정치·사회적으로 직면해 있던 여러 가지 복잡한 문제를 민중 차원에서 개혁하고, 점점 압박해 오는 외국의 압력으로부터 민족적 이익을 지키려는 조선 사회의 역사적 바람을 반영한 사상이었다. 한편에선 고난을 피하고자 하는 유토피아적 종교로서의 성격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일부 학자나 정부의 주장처럼 그것을 ‘혁명’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이견이 많이 존재한다. 동학농민봉기가 외세(청국군·일본군)를 끌어들여 청일전쟁을 야기한 결정적 단서가 되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동학 농민군 봉기는 청일 양국군 조선 출병→청일전쟁→민비 시해→조선에서 러시아 세력 득세→러일전쟁→을사보호조약→한일합병의 도화선에 불을 붙였다. 망국이라는 뇌관을 때려 대폭발을 일으킨 것이 바로 동학농민봉기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동학을 ‘혁명’으로 자리매김할 경우 좌파나 전체주의 추종자들이 그토록 저주하는 외세의 군대를 이 땅에 불러들임으로써 촉발된 망국 책임에 대해 뭐라고 설명할 것인가?

1894년 전라도를 중심으로 농민들이 두 차례 봉기를 일으켰다. 1차 봉기는 1894년 2월 전봉준이 중심이 되어 백성들을 착취하는 고부 군수 조병갑을 징치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이것이 청군 조선 파병을 불러왔고, 이것이 일본군의 출병까지 연쇄작용을 일으켜 청일전쟁이 벌어졌다.

2차 봉기는 1894년 가을 조선을 점령한 일본군에 저항하기 위한 봉기였다. 1894년 11월부터 12월, 공주 일대에서 동학 농민군은 일본군 및 조선관군 연합군과 전투에서 전멸하여 농민봉기는 좌절되었다. 이 과정에서 동학의 봉기와 관련하여 과장되거나 가짜 내용들이 부풀려져 마치 그것이 역사적 사실(historical fact)인 것처럼 횡행하고 있다.

우선 고부에서 일어난 전봉준 봉기부터 살펴보자. 이때의 봉기는 동학이나 민족주의적 동기와는 전혀 관련이 없다. 그저 조선 후기 지방 곳곳에서 발생했던 전형적인 민란이었다. 이러한 민란을 동학 대봉기로 끌고 간 주범은 민란 진압을 위해 파견되었던 안핵사 이용태였다.

그는 고부 관아를 습격한 난민 가운데 동학교도들이 상당수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용태는 동학교도들이 고부 민란을 일으킨 것으로 판단, 민란 참여 여부와 관계없이 동학교도들을 대대적으로 탄압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동학 지도자인 손화중과 김개남이 전봉준의 봉기에 가세하면서 그제야 종교적 색채를 띠게 된다.

다시 정리하면 전봉준의 봉기는 처음부터 동학의 조직적인 거사가 아니라 이용태의 탐학 행위에 저항하기 위해 뒤늦게 합류했다. 또 1차 봉기는 전라도 중심의 동학 세력(남접)만이 참여한 거사였다.

동학 지도부, 전봉준을 “국가의 역적, 사문난적”으로 규정

동학의 본류라고 할 수 있는 최제우와 북접 세력은 전봉준이 중심이 된 1차 봉기에 참여하지도 않았고, 찬성하지도 호응하지도 않았다. 북접 지도자들은 고부에서 민란이 일어나고 그것이 동학과 연계되자 불쾌감과 배신감을 느꼈다. 덕분에 전봉준은 거사 과정에서 동학 교주 최시형으로부터 완전 무시당했을 뿐만 아니라 동학 지도부였던 북접은 남접을 적대했다. 교주 최시형은 성격상 수도사적인 비폭력주의자였기 때문이다.

전봉준과 동학이 합세하여 관군과 치열한 전투를 치르고 있을 때 최시형은 전봉준에게 밀사를 보내 해산을 지시하고 거병이 잘못된 일임을 준엄하게 꾸짖었다. 최시형은 전봉준이 끝내 자신의 비폭력 노선을 따르지 않자 4월에 전봉준을 모욕하는 경고문을 보냈다.
 

자신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전봉준이 거병했다는 소식을 듣자 북접 지도부는 “전봉준을 비롯한 남접 지도자들은 국가의 역적이요 사문난적”으로 규정하고, 이들에 대한 토벌군을 조직하기 위해 교도들에게 통유문까지 돌린 사실이 천도교 역사에 기록되어 있다.

최시형을 중심으로 한 북접이 봉기에 참여한 것은 1894년 9월 2차 봉기 때의 일이다. 그것도 자발적 참여라기보다는 내키지 않는 참여를 하게 된 것이다. 명분상 보국안민(輔國安民)을 주장하는 동학 지도부가 남접의 항전과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 조선 침탈을 눈 감고 넘어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남접을 중심으로 한 농민군이 일본군에 맞서 봉기하자 일부나마 북접 지도자들이 이에 가세하여 면목을 세워준 정도라고 이해하면 될 것이다.

이때 동학의 3대 교주가 되어 훗날 민족지도자의 한 사람으로 떠오게 되는 손병희가 중군 통령으로, 친일파의 거두 역할을 하게 될 이용희가 손병희 부대의 우익부대장으로 참전한다. 이용희도 동학 교단에서 무시할 수 없는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던 인물이었다.

게다가 전봉준이 과연 동학교도였는가에 대해서도 이견이 제기되었다. 천도교 자료 가운데 전봉준이 동학교도, 혹은 동학접주라고 주장하는 최초의 기록은 이돈화의 <천도교창건사>다. 이 책에서 이돈화는 전봉준이 30세 되던 1884년 동학에 입도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유영익은 전봉준이 동학교단에 가입한 것은 사실이나, 교리에는 관심이 없었던 사이비 동학도였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전봉준평전>의 저자 신복룡은 전봉준의 동학교도 혹은 동학접주설을 강력 부정한다. 그가 동학에 입교한 내용은 어떠한 사료로도 입증되지 않으며, 후세 사가들의 곡필에 의해 동학교도로 규정되었다는 것이다. 전봉준이 동학교도가 아니었다면 우리는 ‘동학혁명’ 운운하는 용어로 붕붕 띄워온 이 사건의 성격 규정에 어떤 변고를 겪을 것인가?

이와 관련하여 신복룡은 갑오농민혁명의 성격은 “종교의 표피를 쓴 민란”이라고 정의한다. 전봉준이 동학교도, 혹은 동학접주가 아니었다는 신복룡의 주장이 타당하다면 ‘동학혁명’이라는 명칭은 재검토되어야 한다. 이처럼 과장된 용어는 영웅과 자신의 동일시를 통해 위광효과(identifi cation)를 얻으려는 동학교단 측과, 학문적 수련이 철저하지 못한 몇몇 학자들의 일방적인 해석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전주화약(全州和約) 내용도 허구

동학 농민운동을 설명하는 자료들을 보면 전주화약에 대해 흔히 “농민군은 외세의 출병 구실을 없애고 민족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폐정개혁안을 제시, 이를 받아들이면 해산할 용의가 있음을 밝혔다. 정부 측이 이에 응하여 6월 10일 정부군과 농민군 사이에 화약이 체결되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기술은 역사적 사실과 부합되지 않는다.

전봉준이 병법을 좀 공부했다면 양식이 풍부한 전라도 곳곳을 누비면서 게릴라전을 벌여 관군을 지치게 만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병법에 문외한이었기에 농민군을 전주성으로 끌고 들어가 관군에게 포위를 자초함으로써 자멸에 이르는 치명적 실수를 저질렀다. 전주성 전투와 전주화약을 정리해보자.

첫째, 전주성 전투는 동학 농민군의 승리가 아니라, 관군의 일방적인 승리였다. 전주성 전투에서 농민군이 관군을 제압한 것처럼 기술한 내용은 역사적 사실과는 반대 되는 허구의 창작이다.

둘째, 일방적으로 완벽하게 승리한 관군이 동학 농민군에게 화약(和約)을 요청할 이유가 없었다. 농민군은 두 차례 성문을 열고 나가 무모한 전투를 벌이다 패주를 거듭하여 궤멸 일보 직전에 몰렸다. 이 상황에서 농민군이 휴전 조건으로 뭔가를 요구할 상황도 아니었다.

셋째, 홍계훈도 농민군에게 폐정개혁이나 탐관오리의 처벌을 약속한 적이 없다. 초토사의 목표는 ‘비도(匪徒)의 귀화’였다. 다시 말하면 농민군과 관군 사이에 전주화약은 존재하지 않았다. 관군의 무력에 압도당한 농민군이 자진해산했고, 관군은 농민들이 빨리 도주하여 해산하도록 포위를 풀어주었다.
 

조정과 농민군 대표가 각 읍에 집강소를 설치하고 폐정개혁을 위한 12개조를 공포한 것은 전주에서 농민군이 해산하고 난 뒤에 발생한 일이다. 그런데 12조의 ‘폐정개혁’도 완벽한 소설 창작이다. 학자들이 주장하는 폐정개혁 12개조의 일부인 노비제도 혁파, 천민에 대한 차별 금지, 토지균등 등 반봉건적·평등주의적 개혁 요구조항은 가히 충격적이다. 이 요구조항이 사실이라면 동학은 봉건체제 변혁을 추구한 ‘혁명’이 분명하다.

하지만 폐정개혁 12개조는 1894년 이전에 쓰인 다른 어떤 동학란 관련 논저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내용이다. 그렇다면 문제의 ‘폐정개혁 12개조’는 하늘에서 떨어졌다는 말인가? 그렇다. 그것은 실재했던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일제 후기인 1940년, 오지영이란 사람이 지은 <역사소설 동학사(東學史)>에 처음 등장한 내용이다. 다시 말하면 소설가가 “이렇게 되었으면 좋았을 것을…” 하면서 꾸며낸 ‘허구’라는 뜻이다.

동학 농민혁명의 ‘반봉건’ 부분도 사실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엉터리 주장이라는 의견이 제기되었다. 국사편찬위원장을 역임한 유영익이 그 주인공이다. 유영익은 전봉준의 재판기록, 일본영사관 심문기록 등을 분석한 끝에 전봉준은 농민항쟁을 통해 체제변혁을 추구한 사실이 없다는 점을 낱낱이 밝히는 <동학농민봉기와 갑오경장>(1998)이란 저서를 이미 오래 전에 발간했다.

유영익의 연구에 의하면 전봉준은 ‘반봉건 혁명’을 한 것이 아니라, 농민들을 괴롭혀온 수령, 탐관오리, 보부상의 작폐, 부세의 남징을 국왕이 바로 잡아 달라는 요구를 했을 뿐이다. 즉 전봉준은 농민군을 이끌고 서울로 진격하여 국왕을 현혹하는 권세가를 멸하고, 기강과 명분을 바로 잡고, 성인의 가르침을 떨치고자 하는 유교적 질서 하의 개혁을 원했던 것이다.

이런 역사적 사실이 엄연하게 밝혀졌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체제변혁을 시도한 진정한 혁명”이라고 우겨댈 수 있단 말인가?

손병희, 동학의 3대 교주가 되다

1894년 12월 우금치 전투를 비롯한 일련의 전투에서 동학 농민군은 3만 6000명의 전사자를 기록했다. 일본군 측 전사자는 단 1명. 도쿠시마 현 출신의 상등병 스기노 도라키치(杉野虎吉)가 그 주인공이다. 칼과 창, 낫과 죽창, 화승총으로 무장한 중세 군대와 스나이더 소총, 기관총, 대포로 무장한 근대식 군대의 대결에서 가히 충격적이고 치욕적인 패배를 당한 것이다.

일본 군부는 이 1명의 전사자를 동학 농민군과 전투 중 사망한 것이 아니라, 그보다 5개월 전인 성환 전투에서 청군과 전투 중 사망한 것으로 날조하여 야스쿠니 신사에 안치해 놓았다.

전사자 1 대 3만 6000의 비참한 싸움 끝에 궤멸적 패주를 하여 동학은 거의 와해 상태가 되었다. 1897년 최시형은 동학의 도통을 손병희에게 전수했다. 다음해 최시형이 체포 처형되자 3대 교주 손병희는 동학 재건에 앞장서는 역할을 떠맡게 된다.

그는 탄압이 심한 남부 지역을 피해 북부 지역에서 교세 확장을 위한 활동에 전념했다. 손병희는 동생 손병흠과 함께 평안도 황해도 등 관서지역의 개항장 부근이나 국경 근처의 상업지역을 중심으로 상업과 무역 활동에 종사하면서 새롭게 교세 확장을 꾀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서구 문명에 대한 눈을 뜨기 시작한다.

윤정란은 <한국전쟁과 기독교>라는 저서에서 서북지역은 중국과의 무역 등으로 조선의 다른 어느 지역보다 상업 활동이 활발했다고 지적한다. 이는 서북지역이 척박한 농토, 정치적 차별 등의 영향으로 인해 선택의 여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이 지역 사람들은 일찍부터 상업에 관심을 뒀다. 서북을 대표하는 기업이 대동상회이고, 그보다 더 후에 등장한 근대적 기업인이 일제 때 화신그룹을 일궈낸 박흥식이다.

동학은 이 지역을 재건의 기반으로 삼아 포교활동을 전개했다. 덕분에 동학은 1900~1905년 무렵 북부 지역에서 교세가 급속 성장했다. 손병희는 관헌의 추적으로 국내에서는 활동이 어렵게 되자 1901년 세계문명의 대세를 살피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갔다.

손병희는 일본에 체류하는 동안 ‘이상헌’이라는 가명으로 위장했다. 그는 고급 승용차를 타고 호화로운 생활을 하면서 일본 정계의 실력자들에게 접근해 국제 정세를 파악하고 조선이 나아갈 길을 모색했다. 이때 훗날 친일파의 거두가 된 동학의 2인자 이용구가 손병희를 수행해 일본으로 건너간다.

이용구는 동학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 인물이었다. 동학에서는 포교한 사람의 숫자에 따라 지위가 상승한다. 40명을 포교하면 해접주(該接主), 300명을 포교하면 수접주(首接主), 1000명을 포섭하면 대접주(大接主) 지위가 부여된다. 1만 명을 포섭하면 의창대령(義昌大領), 5만 명을 포섭하면 해명대령(海明大領), 15만 명이면 수청대령(水淸大領)이다.

문명개화의 세례를 받은 손병희

당시 동학에서 수청대령은 이용구 한 명뿐이었고, 그 위에 대도주(大道主), 즉 3대 교주 손병희가 있었다. 이용구는 신도 15만 명을 거느린, 손병희 다음가는 동학 지도자였다.

손병희는 일본에 망명해 생활하면서 동학의 실패는 국제적 안목의 부재로 인한 실패였다는 사실을 처절하게 자각했다. 이 와중에 대역죄인으로 몰려 일본에 망명 중인 권동진, 오세창, 조희연, 이진호, 조희문, 박영효 등 과거의 개화파 인사들과 깊은 교분을 나눴다.

오세창은 독립협회 창설 멤버였다. 수구파들은 독립협회가 고종을 폐위시키고 공화제를 추진하려 한다고 모함했다. 고종은 독립협회 해산 명령을 내리고 지도자들을 대거 체포했다. 이때 이승만이 국사범으로 체포되어 한성감옥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는다.

고종이 1898년 12월 군대를 동원해 만민공동회를 강제 해산하고 독립협회를 불법화하자 오세창은 일본으로 망명했다. 조희연은 아관파천으로, 권동진은 민비 시해사건에 연루되어 망명객이 되었다. 후에 조희연은 한일합병 후 일제로부터 작위를 받아 친일파 족보에 이름을 올리게 된다.

손병희는 일본에서 문명개화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소설가 이광수를 비롯한 64명의 조선 청년을 일본에 유학시키는 데 앞장섰다. 이들을 조선의 지도자로 키우기 위한 원대한 구상이었다. 손병희는 아직도 구시대의 미몽에서 깨어나지 못한 조선 백성과 지도자들의 의식개혁을 통해 자주독립의 동력으로 삼고자 했다.

손병희는 1903년 일본에 협력할 결심을 하고 그 뜻을 국내의 동학도들에게 알렸다. 그는 러일전쟁의 그림자가 다가오고 있는 모습을 봤다. 러일 간에 전쟁이 나면 일본이 승리할 것이며, 승자인 일본에 협력하는 것이 조선의 앞날에 유리한 선택이라고 판단했다.

교토 나라 일대에서 활동하던 손병희는 1904년 2월 러일전쟁이 터지자 도쿄로 가서 일본 정부에 거금 1만 원을 전쟁기금으로 쾌척했다. 요즘 화폐가치로 환산하면 10억 원 정도의 거액이었다. 그리고 동학 지도자 40명을 도쿄로 불러 “이번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도록 물심양면으로 일본을 도우라”고 명했다.

그는 조선의 근대화 개혁을 위한 응원세력으로 일본을 꼽았다. 일본과 동맹을 맺고 조선 근대화와 자주권을 회복하기 위해 손병희는 아시아 연대론을 주장했다. 하지만 일본과의 연대 주장은 러일전쟁을 통해 조선을 보호국으로 삼으려는 일본의 근본 목적을 이해하지 못한 패착이었다.

“일본군을 도우라”는 교주의 연설을 듣고 귀국한 동학 지도자들은 이용구를 중심으로 1904년 4월 대동회(大同會)를 조직했다. 이 단체는 중립회(中立會)를 거쳐 진보회(進步會)로 이름을 바꿨다. 진보회는 일본에서 깨달음을 얻은 개화파 손병희의 문명개화노선의 결과였다.

손병희, 일진회 설립에 앞장서다

동학은 진보회를 중심으로 일사불란하게 행동했다. 당시 정부는 상투를 자르는 단발령을 공표했으나 위정척사 세력을 중심으로 한 양반들과 백성들의 광범위한 저항에 직면했다. 진보회는 손병희의 지시에 따라 하루아침에 수만 명에 이르는 회원들이 상투를 자르고, 검정색 옷을 입고 대규모 집회를 열어 개혁과 진보, 국정쇄신을 외쳤다. 이후 동학은 진보회, 단발흑의(斷髮黑衣)로 상징되었다.

단발에 흑의 복장을 한 회원이 자신들의 주장대로 100만 명에는 미치지 못했으나 진보회 회원은 14만 명 정도로 추산되었다. 정식으로 회비를 내는 회원 수가 이 정도였으니, 회비를 내지 않는 회원들 숫자는 이보다 훨씬 많았을 것이다.

진보회는 손병희의 지시에 의해 러일전쟁 중 전략물자 수송을 자원해 3000명의 수송 인부와 50명의 정찰 인원을 동원했다. 또 군용철도 경의선 부설에 황해도·평안도 일대의 회원 26만 명을 동원함으로써 일본군의 철도 건설과 군수품 운반을 원조했다.

비슷한 시기인 1904년 8월 구 독립협회 계열 인사들이 주축이 되어 유신회(維新會)라는 단체가 출범했다. 이 조직은 송병준을 통해 일본인들과 연결되었다. 이들은 명칭을 일진회(一進會)로 바꾸고 일본군 지원 아래 활동했다.

일진회는 진보회가 자기들과 비슷한 성격의 단체라는 점을 감안, 진보회와 합병을 제의했다. 손병희는 이 제안을 받아들여 1904년 12월 하나의 단체로 통합되었다. 일진회에는 해산 당한 독립협회가 참여해 중앙조직을 담당했고, 동학교단은 광범위한 지방조직이 동원되어 하부 구조를 형성했다.

일부 연구자들은 손병희가 실질적으로 일진회 창립에 관여했으며, 통합 전에 이미 서울의 일진회가 각 지방 일진회의 상부기관 역할을 수행했다는 주장을 제기한다. 즉 송병준이나 그에게 매수당한 이용구가 아니라, 손병희로 대표되는 동학 세력이 일진회 성립의 주도세력이었다는 주장이다.

손병희는 진보회를 일으켜 일본과 손을 잡고 러시아에 맞서고자 했다. 당시 국제 정세로 볼 때 이것은 결코 어리석거나 친일 매국적인 판단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왜냐 하면 당시엔 정도의 차이가 있었을 뿐 다수의 개화 지식인들이 일본이 선전한 ‘문명화’ 논리를 근본적으로 부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1906년 손병희는 천도교를 세워 일진회와 결별했다. 이로써 손병희는 일진회의 노골적인 합방 찬성 친일 행위와는 일정한 선을 그을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적어도 1906년 일진회와 결별하기 전까지는 손병희의 친일 행위에 대한 책임을 물을 수밖에 없다. 이처럼 일진회는 친일과 매국이라는 콩쥐팥쥐 식, 흥부놀부 식 흑백 논리로는 도끼로 장작 패듯 선악을 재단할 수 없는 근본적인 모순과 딜레머를 안고 있다.

이후 이용구는 손병희와는 완연히 다른 길을 걸었다. 일본 외무성과 주한 일본공사관 측은 일진회에 과거 동학 계열 사람들이 대거 참여한 것을 문제 삼으며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다. 이때 우치다 료헤이(內田良平) 등 대륙낭인들이 등장해 일진회를 적극 후원해 영향력을 강화한다.

이용구는 1905년 11월, 일진회 명의로 대한제국이 일본의 보호를 받아야 한다는 ‘일진회 선언서’를 발표했고, 12월 일진회 회장에 올랐다. 1906년 9월 손병희가 일진회 지회 해산을 명하자, 이에 대항해 동학교도들을 일진회 산하로 끌어들이려다 출교 처분을 당했다. 그는 시천교를 설립해 스스로 교조에 올랐다.

1909년 12월 일진회는 한국 정부를 폐지하고 일본 정부가 직접 정치할 것, 통감부를 폐지할 것 등을 주장하는 ‘일진회 합방성명서’를 발표했다. 그의 소원대로 한일합병이 성사되자 그는 일제로부터 은사금 10만 엔을 받았다.

어느 길을 선택할 것인가?

토끼 사냥이 끝나면 사냥개를 삶는 법이다. 한일합병 직후인 1910년 9월 조선총독부는 더 이상 쓸모가 없어진 일진회에 해산명령을 내렸다. 매국행위로 맞아 죽을 것을 우려한 이용구는 일본으로 도주해 그곳에 뼈를 묻었다.

구한말 나라가 기울어가고 있을 때 이땅은 “만인에 의한 만인의 투쟁”이 벌어지는 홉스적 자연 상태였다. 망해가는 왕조를 구하기 위한 거룩한 투쟁이 아니라 제 한 목숨 부지하기 위한 동물적 생존을 위한 보급 투쟁을 벌여야 했던 극한 상황이었다. 이 무렵 한반도에는 근대를 지향했지만 일본의 침략에 저항하지 않은 개화파, 민족적 저항은 했지만 봉건적 성격에 머물렀던 척사파가 존재했다. 그 시절, 권리는 없고 의무만 존재했던 백성들 앞에는 두 가지 선택지가 놓여 있었다.

첫째, 무능 부패하고 미래에 대해 어떤 비전도 제시하지 못한 채 외세에 빌붙어 왕조 유지에 급급한 조선 국왕의 봉건적 통치를 받을 것인가.

둘째, 비록 이민족이지만 보통교육을 실시하고, 전염병이 돌면 근대식 치료를 해 주고, 문명개화한 일본의 근대화 된 통치를 받을 것인가.

둘 중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라면, 당신은 과연 어느 편을 택하는 것이 더 자신의 삶에 유리했다고 보는가?

김용삼
박정희기념재단 기획실장
전 월간조선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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